딸에게 들려주는 역사 이야기
재앙에 맞선 한국인3 - 세상에서 제일 돈을 잘 쓴 김만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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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제주도는 자타 공인 한국 최고의 관광지야. 제주도의 역사를 돌아본다면 그 아름다운 풍광 속에 도사린 피눈물의 비린내와 짠내에 몸서리치게 마련이지. 몽골의 침략이나 툭하면 되풀이되던 왜구의 습격, 그리고 끔찍한 4·3 사건 등 밖으로부터 들이닥친 풍파가 아니더라도 제주도는 그리 유복하고 살기 좋은 고장이 아니었어. 섬의 특성상 태풍이나 가뭄 같은 자연재해가 들이닥치면 문자 그대로 ‘고립된 지옥도’가 적나라하게 펼쳐지곤 했으니까. 경신대기근 당시 제주목사의 장계를 보면 그 다급함이 생생하게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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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난 파도가 눈처럼 흩날려 소금 비가 되어 온 산과 들에 가득하였으며 사람이 그 기운을 호흡하면 꼭 짠물을 마시는 것 같았습니다. (···) 농민들이 서로 모여 곳곳에서 울부짖고 있으니 섬 안에 인간이 앞으로 씨가 마르게 되었습니다.”
경신대기근도 살벌했지만 이후로도 제주도에는 기근이 수시로 들이닥쳤단다. “계정대기근(1713~1717), 임을대기근(1792~1794)은 재앙의 수준을 넘어섰다. 이때에는 각각 제주 인구의 30%와 23%가 떼죽음을 당했다(<한겨레> 2018년 7월16일)”라고 하니까 말이야. 그런데 임을대기근 연간에 우리 역사는 매우 특이한 여성과 조우하게 돼. 김만덕이라는 사람이지.
제주도 여자를 비바리라고도 불러. 제주대학교 국문과 강영봉 교수에 따르면 이 ‘비바리’라는 말은 ‘전복 따는 사람’이라는 뜻이었다는구나. 12세기 초 중국 문헌 <계림유사>에 “고려 사람들은 전복을 ‘비’라고 한다”는 기록이 있고 ‘바리’라는 말은 그에 붙은 접미사라는 거지. 전복 따는 건 십중팔구 여자의 일이었으므로 제주 여성 일반을 가리키는 말로 변했다는 거야.
우리 전통사회에서 여성의 지위가 어느 정도였고 그 역할이 얼마나 힘겨웠는지에 대해서는 따로 얘기할 필요가 없겠지만 제주도 비바리들의 신세는 특히나 비참했어. 전란과 자연재해 그리고 탐관오리들과 육지 양반들이 부과한 각종 부역과 진상을 피해 수많은 남자가 섬을 떠나자 인구는 엄청나게 줄었고 제주도는 ‘여자가 많은’ 섬이 됐어. 병자호란 때 청과 싸우자고 주장했던, 유명한 척화파 김상헌의 기록에 따르면 그가 제주에 머무를 당시 제주 인구는 2만2990명이었는데 남자가 9530명, 여자는 1만3460명이었다고 해. 남자 일곱에 여자 열이라는 얘기지. 남자가 적으니 여자들이 남자 일을 대신해야 했고 중앙정부는 혹시 제주가 텅 비어버릴까 봐 제주도 사람들이 육지로 나오는 것을 금지했어. 김만덕이라는 비바리 역시 그런 슬픈 운명의 섬사람 중 하나였단다.
김만덕은 상인이었던 아버지가 바다에 빠져 죽은 후 어머니도 곧 세상을 뜨면서 고아가 되었어. 이후 기생의 수양딸로 들어가 기적(妓籍)에 올랐다지. 김만덕은 결코 녹록한 사람이 아니었어. 전해오는 일화에 따르면 사또가 수청을 들라고 명령하자 소복을 입고 들어갔다고 해. 기절초풍한 사또가 이게 뭔 일이냐고 손사래를 치자 이렇게 대답했다는구나. “저는 원래 양민이었습니다. 사또를 모신 뒤엔 자결하려고 소복을 입었습니다.”
끈질긴 노력을 통해 기생으로 눌러앉는 팔자를 모면한 김만덕은 객주업에 손을 대면서 장사를 시작했어. “조선 후기의 사회경제적 변화 속에서 만덕은 운송체계에 기초한 유통망이 상업 발전의 근간이라는 사실을 간파하였다. 만덕이 재산을 만드는 데 전념한 분야가 바로 유통업이었다(한승철, <제주 여성 유통물류인으로서의 김만덕의 성공요인 탐구>).” 즉 김만덕은 육지의 쌀 등과 제주 특산물의 거래를 주도하고 여관업이나 창고업 등을 벌여 육지 상인들에게 편의를 제공하면서 돈을 벌었던 거야. “때에 따라 물가의 높고 낮음에 능하여 팔거나 샀다. 수십 년에 이르러 자못 명성을 쌓았다(채제공, <번암집>).” 그렇게 김만덕이 승승장구하던 무렵 임을대기근이 제주를 덮쳤다.
김만덕 객주터
1792년 임자년 이후 제주도의 기근 상황은 극도로 악화됐고 제주목사 심낙수는 거의 울먹이는 상소를 올린다. “만약 쌀로 쳐서 2만여 섬을 배로 실어 보내지 않는다면 백성들이 장차 다 죽을 것입니다.” 조정에서도 부랴부랴 구호 식량을 보냈지만 적지 않은 배가 험한 바다를 이기지 못하고 침몰하는 설상가상의 상황이 이어졌지. 제주가 생사의 기로에 선 순간 김만덕은 자신의 인맥과 역량을 총동원해 제주 사람 살리기에 나섰어. “만덕이 천금을 희사하여 쌀을 뭍에서 사들였다. 모든 고을의 사공들이 때맞춰 이르면 만덕은 그중 십 분의 일을 빌어다가 그의 친족을 살리고, 그 나머지는 모두 관가에 제공했다. 그리하여 부황(浮黃) 난 자가 그 소문을 듣고 관가 뜰에 모여들기를 마치 구름 같았다(채제공, <번암집>).” 굶주린 제주 백성들이 “만덕이 우리를 살렸다”라고 환호한 것도 무리가 아니지.
이 소식을 들은 정조 임금은 법으로 금지돼 있던 제주 여자 김만덕의 출도를 허용해. 한양까지 불러올려 직접 접견한 뒤 비변사에 지시해서 금강산 관광도 시켜줬단다. 정조 임금은 왜 그렇게까지 했을까. 조선 팔도 곳곳에서 활개 치던 탐욕스러운 사람들, 탐관오리는 말할 것도 없고 광에 쌀이 썩어나도 굶주린 사람들을 위해 내놓지 않던 지주들, 부자들, 거상들에게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사해가 한 형제인데 하물며 같은 섬사람들 아닌가.” 김만덕은 이렇게 부르짖으며 자신의 재산을 아낌없이 풀었어. 그녀는 훌륭한 마음에 앞서서 재물이라는 것을 어떻게 쓸 것인가를 명확하게 아는 사람이기도 했어. 김만덕은 한양에 올라왔을 때 신세를 진 대갓집 며느리에게 답례로 재물을 선사했는데 며느리가 웃으며 사양했지. 그러자 그 집 하인들이 “우리 아씨가 거절했으면 우리한테 쓸 것이지. 김만덕이 무슨 의로운 인물이냐”라면서 험담을 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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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식을 전해들은 김만덕은 이렇게 대답했다고 해. “재물을 잘 쓰는 자는 밥 한 그릇으로도 굶주린 사람의 인명을 구할 수 있지만 그렇지 않으면 썩은 흙과 같지요. 더구나 돈 천여 꿰미가 밥 한 그릇에 비길 바이겠습니까(이재채, <오원집>).” 즉 돈을 무작정 아무에게나 푼다고 해서 도움될 일이 아니고 적재적소에 꼭 필요한 이들에게 돌아가는 재물이야말로 사람과 세상을 살릴 수 있다는 뜻이야. 김만덕의 생각은 한양 체류 중에 행세깨나 하는 말썽꾼들이 그 재물을 노리고 접근할 때 내지른 일갈 속에서도 엿볼 수 있어. “굶주린 사람들을 구휼하기에도 부족한데, 어느 겨를에 탕자를 살찌우겠는가(이재채, <오원집>).”
자연재해는 가공할 위력으로 인간 세상을 덮치고 인간들은 그 재앙 앞에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듯 보인다. 세계사를 통틀어 인류가 겪은 대기근은 인간들의 무능과 탐욕, 몰상식과 아둔함에도 상당 부분 기대고 있어. 즉 대기근을 이겨내기 위해서는 자연의 배려 외에도 인간의 지혜와 용기, 사려 깊은 행동이 필요하다는 뜻도 되겠지. 김만덕은 그 모두를 갖춘 사람이었어. 수청을 들라는 사또 방에 소복 입고 들어갔던 ‘깡다구’의 비바리는 기생이라는 굴레에서 벗어난 뒤 악착같이 재물을 모아 사업을 번창시켰고 가장 절실할 때 가장 필요한 사람들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던졌던 거야.
5만원권 지폐가 발행될 때, 여성을 화폐 인물로 하자는 논의가 있었고 그때 입길에 오른 이름 가운데 김만덕도 있었다. 개인적인 생각으로 아빠는 지금의 5만원권 지폐 인물인 신사임당보다는 김만덕이 훨씬 더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단다. 한국 역사에서 그렇게 ‘돈’을 잘 쓴 사람은 드물 테니까.
제주농협에서 발행한 상품권 속의 김만덕
저도 한 때는 이분을
조폐공사의 모델로 써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신사임당도 훌륭한 여성이지만
그 분은 기득권층이었고
사실 김만덕 여사께서 무수한 생명을
살리셨으니 훌륭함에 있어 뒤지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잘 몰랐던 인물인데 소개해 주셔서 감사해요.
리스팀 해놓을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