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5년 10월 7일 김창룡 감독 이종태 주연 “너희는 속았다.”
요즘에야 남의 나라 일같이 되었지만, 옛날에는 대통령에 대한 직접적인 공격 시도가 종종 있었다... 얼마 전 그 일생을 다룬 대단한 다큐멘터리가 방송된 이승만도 예외는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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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은 1952년 6월 25일 암살 음모를 겪는다. 정말 죽일 의도가 있었는지는 확실치 않지만 권총은 불발이었고, 독립운동가였던 암살 기도자와 그 배후로 의열단 출신의 국회의원이 체포된다. 그 사건이 잊혀져 갈 무렵 1955년 10월 7일 또 하나의 암살 음모가 적발된다. 아니 적발되었다고 주장되었다. 공보처의 발표는 사뭇 살 떨리고 긴박한 것이었다.
“조소앙의 비밀지령에 의한 국가원수 암살 흉계”였고 그 전모는 물론 주모자 명단과 암살 대상 명단까지 망라한 일대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연루된 이들은 나재하, 김재호, 김병호, 민영수, 이범륜, 그리고 육군 장교였던 김동훈 등이었다. 이들은 대개 납북인사인 조소앙의 사회당 계열 또는 김구의 한독당 계열로서 대개 독립운동을 했던 인사들이었다. 즉 이승만에 대해서 불만이 많을 수 밖에 없고, 이승만에서 보면 껄끄러운 존재들이었다.
혐의는 간단하지만 중대했다. 하수인 ‘이종태’를 시켜 10월 3일 중앙청에서 개최될 개천절 기념식장에서 이승만에게 수류탄을 던져 살해하려 했다는 것이었다. 공보처에 따르면 이는 북한에 있는 조소앙의 ‘비밀 지령’에 의거한 것이라고 했다. “....남북 협상 가능성은 이승만의 존재로 말살되고 있다. 조국은 협상에 의한 통일로서 연립정부를 수립하여야 한다.,,,,한독 및 사회당계에서는 잔류하여 협상공작을 추진하여 남북이 호응, 통일을 완수하라.”는 것이 조소앙의 지령이었다고 하는데, 이 지령(?)을 내린 것이 5년씩이나 전의 전쟁통이었다는 건 좀 이상하지만 아무튼 그랬다.
이 사건의 핵심에는 이종태가 있었다. 그는 단순한 하수인이 아니었다. 일본 헌병 보조원 출신의 특무대장과 친일 경찰들이 판을 치는 헌병대에 의해 보위되고, 친일파들의 폭넓은 지지를 받는 이승만 정권에 불만을 토로하던 독립운동가 출신 그룹에 나타난 우국 청년이 그였다. 그는 열변을 토하며 노 독립운동가들을 격동시킨다,.
“이 나라는 이승만 때문에 망합니다. 이승만만 없어지면 이 나라가 다시 살아날 겁니다. 제게 폭탄 하나만 있어도 이승만은 그날로 죽은 목숨입니다. 목숨요? 나라가 이 모양인데 무슨.....아 이몸이 죽고서 나라가 산다면,......” 이 의롭고 기특한 청년은 자주 모임을 찾아 그 답답한 소회를 털어 놓았고, 행동해야 할 때라고 책상을 내리쳤다. 동탁을 죽이겠다고 기염을 토하는 조조의 모습 그대로였고, 한독당 사회당의 ‘잔당’이자 독립운동가들이었던 중년 내지 노인들은 영낙없이 조조에게 보검을 내미는 왕윤이 되었다. 건네진 것은 군인 아들을 통해 빼돌린 수류탄이었다.
며칠 뒤 그들의 집에는 요란한 발소리와 함께 특무대가 밀어닥친다. 특무대는 모든 것을 알고 있었고 일망타진이라는 말 그대로 모두가 앞으로 나란히 특무대로 끌려간다. 그런데 딱 하나 의혈청년 이종태는 빠져 있었다. 기소도 되지 않았고, 피의자로 이름에 오르지도 않았고, 심지어 증인이 된 것도 아니었고 조조처럼 막판에 들통나서 튄 것도 아니었다.
그는 특무대의 프락치였다. 특무대장 김창룡은 과거 일본 헌병 보조원으로 배웠던 바로 그 수법으로 조직 내에 프락치를 투입하여 사태를 키운 뒤에 때려잡는 일종의 반간계를 쓴 것이었고 이종태는 그 주연이었던 것이다. 특무대 지하실에서 실컷 두들겨 맞고 있던 이들 앞에 이종태가 싱글거리며 나타났을 때에야 사람들은 상황을알아차렸다.
군법 회의에서 두 명이 사형을 당한다. 한 명은 수류탄을 빼돌린 이였고, 또 한 명은 “이종태를 포섭한” 이였다. 특무대에는 김창룡과 같은 일본군 관동군 헌병 보조원들과 만주군 헌병 보조원들이 득시글거리고 있었고, 그들은 기회가 왔다는 듯 독립운동가들을 족쳤다. 김창룡은 아늑한 사무실에서 보고를 받으면서 얼마나 키들거렸을까. “멍청하지비. 일정 때나 뒤나 똑같이 멍청한 것들이지비.” 하면서.
특무대에서 두들겨 맞던 이들 가운데 하나였던 김교식은 훗날 이렇게 치를 떨었다. “우리가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할 때 독립투사들을 잡아 죽이던 관동군 헌병 출신한테, 해방된 조국에서 또 고문을 당하게 되니 그것이 견딜 수 없이 분했소.” 고문을 받으면서도 소리도 질렀을 것이다. 이 매국노 새끼들아 하늘이 무섭지 않으냐...... 멋진 각본을 쓰고 좋은 배우까지 발탁한 김창룡 감독은 또 웃었을 것이다. “멍청하지비. 엽전들은 이래서 멍청하지비.”
하지만 역사란 게 항상 야속한 것만은 아니다. 김창룡은 사건이 일어난 지 반 년도 못가서 동료 군인의 총에 맞아 죽었던 것이다. 하나 더 덧붙인다면 폭력성과 무지막지함에 관한한 김창룡을 능가할 정도의 중앙정보부장이었던 김형욱, 우리 나라 달러 보유고가 5천만 달러가 안되던 시절 2천만 달러를 빼돌리는 수완을 보였던 남산 돈가스 김형욱도 1979년 10월 7일 오늘 지상에서 사라졌다. 최소한 자연사하지는 못했으리라.
기가찬 노릇이군요 박정희 저리가라네요ㅡㅡ
독립운동하시느라 삼국지를 못 읽으셨을까요...
김형욱이라면 파리에서 납치 암살된 그분인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