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념에 대하여

in #kr7 years ago

'나쁜 놈들'에 대한 분노에도 정확한 절제가 필요하고, 아무리 사악한 놈들에게도 지켜져야 할 권리가 있으며, 우리가 아무리 정의롭다 해도 넘지 말아야 할 선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건 우리가 '인간의 존엄성'을 근간으로 하는 민주주의를 지향하기 때문이라는 거창한 이유 외에도 나부터, 우리부터 언제 '나쁜 놈'이 될 지 모른다는 공포 때문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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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또 염전 노예들에 대한 방송이 화제가 돼 가해자들에 대한 분노가 충만했고....... 야당 대표의 단식과 폭행을 두고도 말이 많은 요즘...... 제 개인적 경험 하나 다시 풀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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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딱 이맘 때, 한 시골에서 저는 나쁘다기보다는 참으로 개념이 없어 뵈는 한 촌로를 만났습니다. 나이 예순 여섯이라고 했는데 그보다 다섯 살 (실제로는 일곱 살) 위이지만 겉보기로는 10년은 더 늙어 뵈는 다른 노인을 노비처럼 부리고 있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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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에게 접근해서 도대체 일하고 있는 노인은 누구이며 왜 이리 힘들게 일하고 있느냐고 물었을 때 그는 쑥스러운 빛도 없고 경계하는 내색도 없이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어릴 때부터 머리가 이상해서 그 형이 자신에게 맡긴 사람이며, 나이는 많아도 힘은 나보다 세고 삽질하는 거 보면 대단하다."고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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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말 아닌 말에 감정을 속이지 못하고 이미 삐딱해진 제 목소리가 "품삯은 주셔야 되는 거 아닙니까?"라고 물었을 때 그는 예의 당당한 어투로 "담배는 내가 대는 거고...... 먹여 주고 재워 주고 입혀 주면 됐지....."라고 답하더군요. 그러면서 리어카에 거름을 싣는 할아버지에게 "그만 가져가! 감당하지도 못하면서....."라고 걱정해 주는 건지 핀잔을 주는 건지 모를 소리를 반말로 내뱉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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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화를 끝낸 뒤 대기하고 있던 차로 돌아와 이 이야기를 전하니 듣고 있던 기사 아저씨가 한 마디 뇌까립니다. "개념없는 자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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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대에서 이등병이 제일 듣기 싫어하는 말 가운데 하나가 개념 없다는 말일 겁니다. 그 말에는 여러 의미가 숨어 있지요. 경우가 없다거나 아직 뭘 모른다거나 속된 말로 똥오줌을 못 가릴 만큼 허둥댄다거나 뭘 얼마나 해야 할지에 대해서 전혀 무대책이라거나 등등 다양한 경우에 쓰이는 말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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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지를 부리던 촌로에 대해서 제가 든 생각 역시 동일했습니다. 그는 나쁜 사람이라기보다 인간에 대한 개념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가족도 버린 모자라는 영감, 먹여 주고 입혀 주면 감지덕지이지 늙어 버린 노친네 두어 시간 일 시키는 걸로 품삯을 준다는 것은 그의 상식 밖의 일이었던 거지요. 오히려 그를 거친 세상에 내치지 않고 자신의 울타리 안에서 거두어 주고 있는 사실로 인해 내심 복받을 거라 스스로를 쓰다듬고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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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박정희 대통령의 국민투표 관련 담화문이 아직도 붙어 있는 쓰러져가는 행랑방에서 황소바람을 넘어 공룡 바람이 드나듬직한 구멍 뚫린 창호지 밑에서 전기담요 한 장으로 겨울을 나는 것도, 소변을 방바닥에 지려서 썩은 내가 완전히 장악해 버린 방 안에서 새우잠을 자는 것도 '이 서방' (이른바 주인이 일하는 할아버지를 부르는 호칭이었습니다)에게는 매우 합당한 처우로 생각했는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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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바 주인의 부인 역시 개념 없기로는 부창부수를 넘어 청출어람 수준이었습니다. 쓰레기를 주워 먹는 모습을 보고 도대체 밥을 주기는 하는 건지 물으러 간 제작진 앞에서 그녀는 "누가 죄 받으려고 우리를 모함하느냐?"면서 밥을 챙겨 주는 걸 보여 주겠다고 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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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작진의 카메라 앞에서 그녀가 할아버지의 밥상을 차려 준 곳은 다용도실이었습니다. 그래도 이 할아버지가 어떻게 사는지 보러 왔다고 눈을 부라린 카메라 앞에서 그녀는 "냄새가 나서 집 안에는 못 들인다"고 선언했습니다. 그녀에게 그것은 당연한 행동이었던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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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이 돌보고 있다는 한 사람의 밥상을 질퍽질퍽한 다용도실에 차려 놓고 쭈그리고 앉아 먹게 하면서도 그녀는 득의양양하게 "저렇게 밥을 고봉으로 퍼 주지 않느냐?"면서 저희들을 다그쳤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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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개념의 부재가 아니라, 개념의 상실이며 개념의 실종이고, 개념의 사망이었습니다. 인간에 대한 개념, 아무리 보잘것없는 인간에 대해서라도 마땅히 지켜져야 할 예의, 그리고 보호받아 마땅한 심신 미약자에 대한 배려 따위는 그들 부부가 늘상 해 왔던 관성이라는 불도저 앞에 깔아뭉개지고 납작해져 있었던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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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하나의 개념 상실은 마을의 일부 주민들로부터 왔습니다. 할아버지에 대해 묻는 제 앞에서 그들은 "태생이 그런 걸 어떡하느냐"거나 "호령 안하면 일이나 하는 줄 알아요? 그냥 아무것도 없이 와서 살던 사람이에요. 그렇게 살다가 가는 거지."라고 스스럼없이 외부인에게 말하는 그들에게 주인 내외는 할아버지를 "정으로 거두는 (어떤 주민의 증언)"것일 뿐일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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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개념 상실의 높은 벽 안에서 한 사람은 쓰레기를 주워 먹으며 "나는 그 집에 냄새가 나서 들어가지도 못해요" (이른바 주인 아줌마의 고백)라는 말이 실감나는 끔찍한 방에서 시들어 가고 있었던 겁니다. 그러다 숨을 거두면 주인은 양지 바른 곳에나 묻어 주고서 자신의 선행에 만족해했을지도 모릅니다. 가련한 사람, 다음 생에는 좋게 태어나게.... 하는 덕담이라도 했으면 금상첨화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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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모습을 상상하고 있자니 온몸에 소름이 돋아 왔습니다. 그것은 공포였습니다. 인간에 대한 개념이 상실된 현장을 목격하는 공포 말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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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개념 없는 일부 마을 사람들과 후천성 개념 결핍증인 듯한 부부의 보호(?) 아래 있던 한 할아버지의 사정을 폭로하고, 할아버지를 격리시켜 좋은 곳으로 모신 것을 골자로 하는 방송이 나간 직후부터 꽤 오랫 동안 저는 전혀 뜻하지 못했던 또 하나의 공포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그 공포의 진원지는 인터넷 게시판이었습니다. 그것은 방송 당일의 밤과 그 새벽부터 시작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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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해자에 대한 분노가 터뜨려지고 세상에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느냐는 통탄이 이어지고 할아버지에 대한 애틋한 감정들이 금새 수천 건의 글로 게시판을 달군 것이야 당연한 일이고 제작 PD 입장에서 어깨에 힘이 들어갈 상황입니다만, 방송 후 불과 몇 시간이 지나지 않아 네티즌들에 의해 밝혀진 가해자의 실제 주소가 떴을 때 저는 기절할 것처럼 놀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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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가해자의 실명에 대해 왈가왈부가 잦더니 마침내 이런 글까지도 떴더군요. “제가 그 집에 가서 문패를 보고 왔습니다. XXX가 맞습니다.” 어떤 이는 가해자가 사는 동네의 위성 사진을 다운받아 올려놓았고 하루 쯤 뒤에는 가해자의 아들이 어디어디에 근무한다는 황당한 정보가 게시판을 장식하더니 그 근무처의 홈페이지가 다운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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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가 뜨거운 분들 가운데 몇 분은 해당 마을의 면사무소로 원정 가서 등본을 뗀 다음 그 등본을 구겨서 잔돈과 함께 직원들에게 던지는 방식의 ‘응징’을 했고 어떤 열혈남아는 그 집을 불살라 버리겠다고 휘발유를 싣고 가는 중이라고 했고 쓰레기를 투척했다는 사람들마저 나타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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촬영 중 비밀을 지켜 주고 정보를 제공해 주며 할아버지의 구원을 진심으로 응원했던 사람들마저 그 마을에 살고 그걸 오랫동안 지켜봐 왔다는 이유로 갱생 불가능한 악마가 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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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에 대한 개념의 상실을 고발하고 그 개념 없음이 빚어낸 참상에 화를 냈던 PD로서 제가 만든 프로그램이 역으로 한 인간 - 그가 용서가 어려운 죄를 지었을지언정- 이 천부적으로 가져야 할 권리가 잠시 잊혀지는 돌팔매의 무대가 된 것이 적지않이 당혹스러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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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이상 마녀사냥하지 말자”는 조심스런 발언은 “그놈은 진짜 마녀다. 진짜 마녀를 사냥하는 게 무슨 문제냐”는 노호(怒號) 앞에 태풍 속 가랑잎처럼 녹아 없어져 버리더군요. ‘부인할 수 없는 마녀’에 대한 황당할 정도로 커다란 분노의 파도 앞에서 아연실색하고 있던 제 머릿 속에는 질문 하나가 계속 깜박이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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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질구질해서 쓰레기나 파먹고 다니는 정신병자 늙은이에게 밥이나 재워 주고 옷이나 입혀 주고 잠자리나 재워 주면 땡이라는 사고방식과 "저놈들은 나쁜 놈들이니 우리의 분노는 정당하다"는 논리로 그 ‘나쁜 놈들’의 권리를 침해하는 행동 양태 사이에 어느 정도의 거리가 있을까 하는 것이지요.

세상에서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이 누려야 할 권리와 세상에서 가장 악독한 사람에게 보장되어야 할 권리는 평범하고 선량한 대한민국 일반 국민이 지니는 권리와 같은 무게여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기막힌 현실에 분노하는 것은 지극히 정당하며 당연한 일이지만 저는 이흥규 할아버지의 삶으로 인해 촉발된 분노가 “다시는 이런 일이 없게 하겠다.”는 다짐으로 이어지기를 바라봅니다.

죄를 지은 사람은 그에 따라 처벌받으면 되지만, 또 죄 지은 사람을 욕하기는 쉬운 법이지만, 누군가 다시 그 죄를 짓는 것을 막는 일은 결코 쉽지 않은 우리 모두의 과제라고 생각합니다. 분노가 분노로만 끝난다면 우리에게 남은 것은 무엇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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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사례를 보면 정작 피해자는 인간답지 못한 대우를 받지 못하면서도 그걸 전혀 자각하지 못하는게 더 무서운것 같네요.
1970년도의 전태열이 분신자살까지 해가면서 사람다운 권리를 주장해야만 했던 과거를 가지고 있는게 바로 대한민국이니까요.
겉으로 보이는 법적처우는 예전에 비하면야 좋아졌지만 그 망령은 오늘날에도 살아 숨쉬는것 같습니다.

점점 좋아져야 하겠죠.... 우리도 이만하면 됐다 자만하지 말구요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 성폭행이나 학교폭력 사태도 가해자에 대한 집단의 심판보다는 피해자에 대한 배려와 재발 방지에 대한 담론이 함께 이루어졌으면 좋겠네요. 현대인들은 항상 화낼 준비가 잘 되어 있는 것 같아요. 더 나아가 냉정하게 문제점을 직시하는 법도 배웠으면...

말씀공감합니다..... 화낼 준비가 돼 있는 듯..... 분노의 제한이 없어지면 모두가 불탈 수도 있는데 말이죠

그러나 그런 행동하는 분노가 있기에 또 사회가 돌아가는 것 아니겠습니까? 맞아야 할 것을 안 맞고 안 때리면서 키워왔던 영향이지요. 인간이 갖는 천부적 권리라면 기껏해야 마음가는 대로 행동하는 것 정도입니다. 법적 권리는 사실 천부적인 것이 아니라 인간사회에서 만들어낸 것이죠.

분노의 필요성을 부인하는 거라기보다는 분노의 합리적 소비(?)에 대해 고민하자는 것입니다. 정당한 분노와 도를 넘어선 광기를 가르는 것은 결국 인간에 대한 존엄성이 아닐까 합니다.... 아무리 약한 사람에게든 귀한 사람에게든 나쁜 놈에게든 좋은 놈에게든..... 말입니다

너무나 많은 생각을 하게 되는 글입니다...
미디어에서 접하게 되는 살인, 폭행, 강간들의 사건을 보게되면 법의 잣대가 너무 약하다는 분노가 치밀때가 많습니다. 저런 인간같지도 않은 사람들에게 인간대우를 해주어야 하는가에 대한 의문이 들게 됩니다.
피해자의 인권은 이미 짓밟혔는데 가해자의 인권은 존중되어져야 한다? 이게 과연 옳은걸까요?
저는 모든 범죄의 재발과 모방범죄의 발생은
가해자에게 같지도 않은 인권을 인정해주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저 할아버지가 나에 가족이었다면 과연 어떻게 했을까요?
...저 개념없는 사람들을 가만히 두고 볼수 있었을까요?
죄 지은자의 처벌 수위를 결정하는건 누구일까요?
남의 권리를 짓밟으면서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는 사람에게 그래 그건 니 권리다라고 해야 할까요?
지은 죄대로 똑같이 처벌받는다면 두려워서라도 개념을 찾을 겁니다.
사람들이 분노하는 이유는...
그사람이 그가 한짓에 대한 제대로된 처벌을 받지 않을거라는걸 알기 때문입니다.
인과응보라는 말이 제대로 지켜진다면
불필요한 분노는 사라지게 되지 않을까요?

제대로 된 처벌을 받게 하는 시스템을 갖추는 게 더 급선무라는 생각이 듭니다. 피해자의 인권을 짓밟은만큼 벌을 받는 믿음은 중요하죠. 그 시스템이 망가졌을 때 결국 사회는 복수의 윤회에서 벗어나기 어렵다는 생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