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8년 9월 17일 서울 올림픽 개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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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까마득하게 거슬러 올라가보자. 1970년 아시안 게임이 방콕에서 열렸다. 그런데 원래 이 해 아시안 게임이 열려야 할 곳은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이었다. 1966년 아시아경기연맹 총회는 1970년 아시안 게임 주최지를 서울로 결정했던 것이다. "See You In Seoul!" 까지는 좋았는데 막상 서울시와 대한민국 정부는 결혼식 앞두고 초상난 난감함에 시달려야 했다. 당장 경기장도 없었다. 지금은 사라진 동대문 운동장과 요즘은 동네 축구장 취급을 받는 효창구장이 ‘스타디움’의 전부였다. 손님들을 맞을 숙박 시설도 암담했다. 부정이다 의혹이다 말도 많았던 워커힐 호텔 정도가 국제적인 행사를 치를 정도의 수준이었을 뿐, 요즘 우리가 이름을 댈만한 특급 호텔들은 주춧돌을 놓기도 전이었다. 결국 박정희 대통령은 아시안 게임 반납을 지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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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짜는 아니었다. 삿포로 동계 올림픽을 치르게 되어 있던 일본이 손사래를 친 마당에 만만한 게 태국이었다. 한국 체육계 관계자는 태국에 가서 읍소를 거듭한 끝에 경기 개최 비용의 상당 부분을 지원하겠다고 약속하고서야 마지못한 허락을 받아 낸다. 아시안 게임이 방콕에서 또 열렸을 때 한국 선수단은 태국 관중들에게서 엄청난 야유를 받았다고 한다. “저놈들 때문에 우리가 고생이야!”
박정희 대통령의 성격 중에 두드러지는 것 중의 하나가 집요함이다. 그는 훌훌 털어버리는 스타일이 아니라 당장은 티를 내지 않더라도 꽁꽁 숨겨놓았다가 언젠가는 불쑥 들이밀고야 마는 스타일이었는데, 이 1970년 아시안 게임 반납은 꽤 한이 되었던 것 같다. 거기에 스포츠라는 것이 단순한 운동 경기가 아니라 국민들의 관심과 시선을 일거에 잡아챌 수 있는 훌륭한 정치적 도구라는 사실도 깨달아 갔을 것이다. 1970년대는 한국 스포츠가 여러모로 웅비하던 시기이기도 했다.
손정목의 저서 <서울 도시 계획 이야기> (한울)에 따르면 박정희 대통령이 서울 올림픽 유치를 최종 결심했던 것은 1979년 7월 말, 즉 유신 체제가 가쁜 숨을 몰아쉬며 그 최후를 향해 돌진하던 즈음이었다. “3인의 박씨, 대통령 박정희, 대한체육회장 박종규, 문교부장관 박찬현”이 올림픽 유치 운동의 대대적 추진을 결의했다는 것이다. 박정희 대통령은 죽기 한 달 전, 1979년 9월 21일 “올림픽 유치를 나고야에 앞서 빠른 시일 내에 국내외에 발표하라.”고 지시한다. 하지만 정말로 올림픽이 한국에서 열릴 것이라고 믿는 사람은 거의 없었고 국민들도 박정희 대통령의 기대 (올림픽 유치라는 이벤트로 정치적 위기를 모면하려는)에 부응하지 않았다. 곧 부마항쟁이 일어났고 박정희 대통령은 심복의 총에 맞아 세상을 떠나는 것이다.
그 후 정권을 잡은 전두환 대통령 역시 그 빈약한 머리숱만큼이나 허술한 정통성과 광주항쟁이 남긴 피비린내를 어떻게든 희석시킬 필요가 있었다. 높은 분들의 서슬에 기가 질려 유치 추진을 하긴 했으나 도저히 자신이 없었던 서울시가 올림픽 개최에 난색을 표하자 전두환 대통령은 이렇게 쏘아붙인다. "전임대통령이 결심하여 국내외에 공표한 중대사항을 별다른 이유없이 변경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이 역사적인 사업을 추진해 보지도 않고 처음부터 패배의식 속에서 물러나서는 안된다."
어느 안전이라고 거기에 대고 노(No)를 부르짖겠는가. 총력전이 펼쳐졌다. 정주영 조중훈 등 기업 회장님들부터 전직 외교관과 체육계 인사들이 전방위적으로 투입되어 열과 성을 다한 노력을 펼쳤다. 변변한 ‘도우미’도 없던 시절, 서울 올림픽 홍보관에서 외국인들을 맞았던 것은 대한항공 스튜어디스들이었고, 각 기업들의 해외 지점들은 해당국가의 IOC 위원들에 대한 정보 수집에 혈안이 됐다. 결과는 일본의 나고야를 52대 27이라는 압도적으로 누르는 대승리였다. 40대 이상의 한국인들이라면 사마란치 IOC 위원장이 “쎄울 피프티 투! 나고야 트웨니 세븐”이라고 발표한 순간을 기억하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 설마는 사람만 잡는 게 아니라 그렇게 올림픽도 잡아 왔다.
그때부터 88 올림픽은 하나의 주문이 된다. 86 아시안 게임과 88 서울 올림픽을 들이대면 안되는 일이 없었다. 전국의 학교는 “1인 1기”를 의무적으로 수행하여 잠재력 있는 유망주를 일컫는 ‘88꿈나무’들을 발굴해야 했고, 88 올림픽을 유치하는 “선진조국의 국민 자세”를 배우고 암송해야 했으며, 매스게임에 참여하는 학교는 수업을 작파하고 거기에 매달려도 항의 한 마디 할 수 없었다. 한강을 따라 동서로 관통하는 도로의 이름은 88올림픽도로가 됐고, 최고급 담배의 이름은 88로 정해졌으며, 지역감정을 해소하고 영호남의 교류를 촉진한다는 거창한 명목으로 건설되긴 했지만 오늘날까지도 최악의 길로 남아 있는 대구 광주간 ‘고속도로’의 이름도 ‘88올림픽 고속도로’였다. 당시 중앙일보의 만평 왈순아지매에서는 이 현상을 이렇게 비꼰 적이 있었다. 경찰이 음주운전 단속을 하는데 차에 탄 사람이 고압적으로 “번호판을 보고 단속해.”라고 하자 경찰은 거수경례와 함께 그들을 보낸다. 번호판은 8688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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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대 초중반, 올림픽의 열기는 대중가요계도 비껴나지 않았다. 88 올림픽과 애국주의를 찬미하는 노래들은 넘쳐 흘렀다. ‘모이자 모오~~이자 아침의 나라에서’라고 김연자가 노래하면 “아름다운 우리 나라 내가 태어나 살고 있는 곳”이라고 인순이가 열창했으며 가요계의 황제 조용필이 “서울 서울 서울”을 그 특유의 비음 섞어 부르면 강병철과 삼태기가 “88아리랑”의 신명을 냈다. 현숙도 지지 않고 “건곤감리 청홍백”으로 태극기를 소재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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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뭐니뭐니해도 이런 류의 ‘건전가요’ 중 최고봉은 정수라의 <아 대한민국>일 것이다. 누군가의 힘이 작용했는지 어땠는지는 모르지만 이 노래는 가요톱텐에서 몇 주 연속이나 수위를 차지했고 이 노래를 부를 때마다 수십 명의 백댄서들은 집단적으로 태극기를 흔드는 장관(?)을 연출했었다. “아 아 대한민국 아 아 우리 조국 아 아 영원토록 사랑하리라.” 아마 21세기의 한국 청춘들이 보자면 “짱난다 짱나”를 연발했을 풍경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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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 올림픽 때문에 된서리를 맞은 이들이 있다면 단연 보신탕집 주인을 비롯한 ‘혐오식품’ 종사자들일 것이다. “개고기 먹는 한국인들”의 오명(?)과 복날만 되면 미어터지는 보신탕집의 ‘한국적 정서’ 사이에서 고심하던 정부는 마침내 1984년 보신탕, 뱀탕, 토룡탕, 굼벵이탕, 개소주 등을 ‘혐오식품’으로 규정하고 이를 도심에서 판매하는 행위를 단속하기로 한다. 보신탕집들은 그 간판을 내리고 골목으로 숨어들거나 판매가 허용된 ‘면단위’ 지역으로 옮겨가야 했다. 개고기를 즐기던 이들 또한 간첩 접선하듯이 단골집을 찾아야 했다. 사대문 안에 보신탕 간판을 내거는 일이 불가능했던 바, 종로의 한 보신탕집에서는 그저 “계속합니다.”라는 간판으로 자신들의 건재를 알려 손님들을 맞았다는 전설 같은 얘기가 전한다.
"인간의 친구인 개를 잡아먹는 보신탕을 금지하지 않으면 올림픽을 보이콧하겠다.“는 외국인들의 주장에 온 나라가 몸살을 앓던 시절은 또한 대한민국 사람이면서도 ‘개만도 못한’ 취급을 감수해야 했던 사람들의 슬픈 사연과도 맞물려 있다. 모든 관점이 “88올림픽 때 오실 손님들의 눈”으로 통일되던 시절, 퀴퀴하고 너덜너덜한 빈민가와 판자촌은 언감생심 ‘미관상’ 없어져야 할 대상으로 정리된다. 또 중동 건설 경기가 한풀 꺾인 뒤 돈벌이가 필요했던 건설사들은 재개발 사업에 목숨을 걸었다. 이런 이해와 기호가 맞아떨어지면서 전국의 달동네들은 홍역을 치르게 되는데 그 대표적인 지역이 4호선 전철역 개통과 더불어 ‘떴던’ 상계동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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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년 6월 26일 본격적인 철거가 시작된 날을 철거민 안은정씨는 이렇게 기억하고 있다. “포크레인이 무작정 밀고 들어왔어. 옥상에 있는 된장, 고추장 항아리까지 있는 대로 다 부숴버렸지. 심지어 애들이 방안에서 자고 있었는데 집을 무너뜨리더라고” 그 와중에 한 소년은 자신의 집 안에 있다가 무턱대고 휘두르는 포크레인 삽날에 무너진 집더미에 갇혀 죽기도 했고 그를 포함해서 4명이 목숨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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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4월에는 무려 1천여명의 구청직원, 용역, 깡패들이 대거 몰려와 그나마 지탱하고 있던 상계동 사람들의 터전을 깡그리 무너뜨리고 그 짐들을 실어가 버렸다. 적수공권이 된 그들이 찾은 곳은 명동성당. 그곳에서 300일을 넘게 버틴 끝에 부천의 고강동 고속도로변 부지를 매입하고 정착하기로 한다. 부천시도 고개를 끄덕였다. 몇 년만에 자신들만의 터전을 얻은 상계동 주민들은 신이 나서 고강동으로 이주해 가건물을 지어올리는데 갑자기 부천시 공무원들이 찾아왔다. 이들은 별안간 안면을 바꾸고 있었다 조금만 시간을 달라는 상계동 철거민들의 애원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철거민들이 쌓아올리던 가건물을 때려 부쉈다. 이 조변석개의 ‘페이스 오프’의 원인은 바로 그곳이 올림픽 성화 봉송로 근처에 위치해 있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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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다시피 성화는 단 몇 분이면 그 일대를 벗어난다. 하지만 정부는 그조차 “외국인 손님들에게 보여 줄 수 없는” 모습으로 규정해 가건물을 부숴 버린 것이다. 철거민들은 가건물이 무너진 그곳에서 움막을 짓거나 토굴을 파고 들어가 그 안에서 잠을 잤다. 그러자 정부는 아예 성화봉송로 주변에 높다란 담을 지어 그들을 ‘외국인들의 시야’로부터 차단해 버렸다. 상계동 투쟁 과정에 함께 했던 고은태 교수(중부대학교)는 그 모습을 이렇게 표현했다.
“‘외국인들에게 너희는 보여서는 안 될 존재야’라고 국가가 말하고 이를 실천에 옮긴 행위였다. ” 그리고 이 발상은 20년 뒤 중국 베이징 올림픽을 앞두고 중국 정부에 의해 ‘대륙적으로’ 계승된다. 베이징 시는 올림픽을 앞두고 ‘도시 미관’을 위한 대대적인 활동을 전개했다. 강제 철거민만 150만명이 넘는다는 통계가 있었고 노점상은 싹쓸이되었으며 베이징의 거지들은 모두 연행되어 각자의 고향으로 강제로 이송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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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울 피프티 투 나고야 트웨니 세븐” 이후 대한민국은 올림픽 특별 구역이었다. 올림픽에 반대하는 사람이건 열광하는 사람이건 그 혹독하고 장기적인 ‘8688’의 주문 앞에 점차 무방비 상태가 되어 갔다. 그것은 정권도 마찬가지였다. 올림픽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데에 여념이 없었지만 정작 올림픽은 정권도 어떻게 훼손할 수 없는 국가지대사로서 확고하게 자리잡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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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3 호헌 조치’ 연설에서 개헌을 ‘올림픽 이후’로 미뤘던 전두환이었지만 87년 6월 항쟁으로 정권의 운명이 경각에 달했던 시절, 군대 투입 카드를 만지작거리던 그의 덜미를 잡아챈 것 역시 88 올림픽이었다. 대학생들의 농성이 진행 중이던 명동성당에 공권력이 투입될 경우 로마 교황청은 88 올림픽 보이콧을 선언할 예정이었다고 하며, 윤보선을 비롯한 원로들도 ‘88 올림픽’을 들어 전두환 대통령을 막아섰던 것이다. 88 올림픽은 그렇게 우리 역사를 들었다 놨다를 반복하는 괴력의 키워드였다.
하지만 88 올림픽은 축복받은 올림픽으로 피어나게 된다. 두 번 연속 반쪽짜리 올림픽이었던 모스크바와 LA 올림픽의 악몽에서 벗어나 12년만에 열리는 명실상부한 세계인들의 축제가 될 운명이었던 것이다. 국교는 커녕 적성국으로 분류되던 공산 국가들이 북한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서울로 밀려들었다. 일단 현실이 된 ‘세계인의 축제’ 앞에서 한국인들은 놀라운 ‘선진 조국의 국민 자세’를 발휘했다. 자동차 홀짝운행제는 강제가 아니었음에도 경이로운 참가율을 기록했으며 각종 기초질서도 완벽에 가까울만큼 지켜졌다. ‘체면’을 중시하는 한국 특유의 문화 때문이었을까. 이는 소매치기단의 “올림픽 사수 선언” 전설에서 절정에 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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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설(?)에 따르면, 올림픽 개막 얼마 전, 치안본부에는 비상이 걸린다. 안 그래도 올림픽을 앞두고 소매치기 조직 소탕을 대대적으로 벌이는 등 그들의 ‘영업’이 올림픽을 방해할 것에 대해 노심초사하고 있었는데 그 두목들이 한 자리에 모인다는 것이었다. 이 사람들이 또 무슨 꿍꿍이를 꾸미나 촉각을 곤두세웠던 경찰들은 소매치기 두목들이 냈다는 결의안(?)에 입을 벌린다. 그 결의안은 다음과 같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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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우리는 우리 나라의 명예를 위하여 올림픽 기간 동안 일체의 공식, 비공식 활동을 금한다. 둘째, 우리들 중 조직의 결정을 어기는 자가 있으면 소속과 직위고하를 막론하고 조직의 쓴맛을 보여줄 것이다. 셋째, 우리는 올림픽이 성공적으로 끝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한다.”
이 전설(?)이 공식적으로 기록된 사실인지 또는 헛소문일 뿐이지의 여부는 확인하지 못했다. 하지만 당시의 한국인들이 어느 정도로 올림픽에 사활을 걸었는지 (또는 걸도록 촉구받았는지)를 확인할 수 있는 하나의 단서가 되기에는 충분할 것이다. 실제로 올해 열린 런던 올림픽조차 영국의 토종 소매치기 뿐 아니라 동유럽과 남미에서까지 원정 온 소매치기들로 몸살을 앓았던 데 비해 88 서울 올림픽 기간 내내 소매치기의 피해는 극히 미미했다고 전한다. 과연 소매치기단은 ‘88 올림픽 사수’를 결의했고 그를 실행에 옮겼던 것일까.
그렇게 올림픽의 깃발 아래 온갖 희생을 무릅쓰고, 세뇌에 가까운 홍보를 당하고, 온 나라가 휘둘리면서 준비했던 88 올림픽이지만 그 의미는 적다고 할 수 없다. 언젠가 가수 박정현이 <무르팍도사>에 출연했을 때 88 올림픽 이후에야 한국이 알려졌다며 “그때부터는 한국인이냐고 물어봐 주는 사람들이 많아 너무 좋았다.”고 말했다. 그 이전에는 중국인이냐 일본인이냐고 물었고 한국인이라고 하면 신기해하며 주위에 몰려드는 사람까지 있었다고 하니 그 기쁨(?)을 짐작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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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당시 미국이나 유럽인들에게 서울 올림픽이란 ‘다카르(세네갈의 수도) 올림픽’이나 ‘리브레빌(가봉의 수도) 올림픽’ 정도의 느낌이 아니었을지. 서울 올림픽은 일단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의 인지도를 파격적으로 올려 놓는 데에는 성공했다. 또한 동구권 선수들이 대거 참여하면서 그 이전까지는 북한과 동급으로 여겨지던 적성국들의 깃발을 흔들며 그들을 응원하는 일종의 이데올로기적 충격파를 경험하게 해 준 올림픽이었다. 미국과 소련의 경기에서 관중들이 낫과 망치의 붉은 기를 휘두르며 소련을 응원하는 일이 ‘실제로 일어났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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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 올림픽을 경험한 많은 이들은 저마다 인상 깊은 추억 하나쯤은 가지고 있을 것이다. 나에게 88 올림픽 중 가장 인상 깊은 장면을 하나 꼽으라면 1988년 9월 17일 잠실 스타디움을 내달린 성화 봉송 주자 가운데 하나였던 손기정 옹과 육상 선수 임춘애를 들겠다. 52년 전 일장기를 달고 올림픽을 제패했던 손기정 옹은 고국에서 열린 올림픽을 밝힐 성화를 들고 스타디움을 달리면서 가끔 펄쩍 펄쩍 뛰었다. “오죽 좋으시면 저럴까.” 소리가 절로 튀어나올 정도로 그분은 기쁨을 주체하지 못하고 계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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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분이 성화에 불을 밝힐까 했더니 그 성화는 다음 주자 임춘애에게로 넘어갔다. 86 아시안 게임에서 깡마른 체구로 악착같이 내달려 3관왕을 차지했던 어린 선수 임춘애에게 일제 치하의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손기정이 성화를 전달하는 그 순간은 일종의 엄숙한 세대 교체랄까 임무 교대랄까, 전쟁과 분단과 가난을 숙명처럼 지고 살았던 세대가 새로운 세대에게 “내 할 일은 다 했다. 이제 너희들의 시대다.”라고 선언하는 느낌으로 기억에 선연히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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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게는 초등학교 중학교때라 아시안게임과 올림픽은 TV로만 접했던 행사였는데 이렇게 뒷야기들을 알게되니 너무 재미있습니다.
국민(!) 학생 시절에 브라운관 티비로 구경하던 기억이 어렴풋이 나네요. 이런 국제 행사를 정말 신성시 하던 선생님 말씀도 어렴풋이 기억나구요.ㅎㅎㅎ
지난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생생한 글
감사합니다.
행복한 한가위 지내세요.
위 스팀클리너에 제대로 대응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다운보팅이 장난 아니네요.
저 사람 뭐하는 사람인지 모르겠네요.... 왜 다운보팅하는지도 모르겠고 ㅠㅠ 어떻게 대응하면 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