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에게 들려주는 역사 이야기
기미년의 영웅들 2. 만세의 불씨를 되살리다 강기덕 김원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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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호에 탑골공원에서 만세를 부른 정재용 선생 이야기를 했지. 이게 식민지 조선에서 터져 나온 첫 독립 만세였냐 하면 그렇지는 않아. 정재용이 독립선언서를 열정적으로 읽어 내리기 두어 시간 전 평양에서는 개신교인 중심으로 대규모 만세 시위가 벌어졌고, 오후 2시께에는 함경남도 원산에서도 우렁차게 울리는 교회의 종소리와 함께 독립 만세의 봉화가 솟았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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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뜨거웠던 3월, 조선 어디에서나 만세 운동을 열정적으로 주도한 것은 학생들이었어. 목포 정명여학교 학생 김정애(당시 14세)는 경찰에 체포된 뒤 이렇게 또랑또랑하게 쏘아붙였다. “일본 사람들은 어른만 애국심이 있고 아이들은 애국심이 없는 식충이들만 산다는 이야긴가요? 조선 사람은 삼척동자도 나라를 사랑할 줄 알아요. 우리들은 벌써 14, 15세의 장성한 처녀들이에요(<한국근대여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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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1일 탑골공원에서 정재용이 독립선언서를 읽을 때 그 주변을 그득 채운 이들 역시 검은색 교복 차림의 학생들이었어. 경성 시내 학생들은 3월1일 훨씬 이전부터 시위를 준비해왔다고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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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말 이미 은밀한 모임이 시작됐고 음악회다 뭐다 하는 핑계로 학생들은 여러 차례 회합하면서 구체적인 행동 계획을 세우고 있었어. 학생들은 민족 대표 33인의 독립선언과 별도로 대중 시위를 조직하고자 했고 일제 경찰에 체포되거나 희생될 것에 대비해 2차 지도부까지 구성해두었으니 그 치밀함을 짐작할 수 있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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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1일 오후 탑골공원에 있던 학생들은 1차 지도부의 일원인 보성전문 학생 강기덕, 연희전문 학생 김원벽의 주도 아래 모인 이들이었지. 강기덕과 김원벽은 민족 대표들이 모여 있던 태화관으로 달려가 ‘왜 탑골공원에서 독립선언을 하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않느냐’며 거세게 항의했지만 소용이 없자 탑골공원으로 발걸음을 돌린 참이었어.
탑골공원에서 시작된 3·1운동은 일단 성공이었어. 노도와 같은 독립 만세의 대열에 일본 경찰은 한동안 바보가 되어 멀거니 시위를 지켜볼 따름이었어. 조선에 살던 외국인들도 흥분을 금치 못했지. 조선과 필리핀에서의 이익을 서로 보장하는 가쓰라·태프트 밀약 이래 철저한 친일 정책을 펴온 미국 영사도 조선 독립을 부르짖는 조선 학생들을 열렬히 격려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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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성 호수돈여학교 학생들이 눈물을 흘리며 독립 만세를 외치자 개성군수였던 야마사키(山崎)가 “어린 여학생들이 자기 조국을 위해 이처럼 열렬히 앞장섰다는 사실을 세계 어느 나라 역사에서도 본 적이 없다”라며 구속 학생들을 석방시킬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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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의 실무와 기획을 맡았던 17인 중의 일원으로 민족 대표 48인 명단에 드는 강기덕과 김원벽은 이 벅찬 만세 퍼레이드를 지켜보며 주먹을 부르쥐고 있었어. 그들에게는 또 한 차례 디데이가 대기 중이었지. 바로 3월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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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1일 폭발 이후 오늘날의 북한 지역, 특히 평안남북도에서는 유혈 항쟁을 방불케 하는 만세 시위가 이어졌지만 경성은 상대적으로 잠잠했다는구나. 3월3일이 고종 황제의 장례일이었고 사람들의 이목이 거기에 집중된 탓도 있었지. 고종 황제를 보내는 서글픔 속에 경성은 침묵했지만 만세 운동의 여진은 계속되고 있었어. 여기서 다시 강기덕과 김원벽이 등장한다.
3월5일 오전 9시, 서울 남대문역(현 서울역) 근처. 역전은 유난히 붐볐다. 고종 황제 장례식 참석차 올라왔다가 지방으로 내려가는 사람들도 많았지만 기차를 탈 것도 아니면서 역 근처를 배회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어. 3월1일 이후 일제 당국과 정면으로 ‘박치기’를 하고 있던 평양 학생들이 대거 서울에 왔다는 소문도 돌았지. “아니 어케 경성이 그리 고요할 수 있단 말이가?” 또 이화학당에서 교장의 만류를 무릅쓰고 담을 넘어온 유관순 등 여학생들도 불안과 설렘 반반씩 섞인 마음으로 뭔가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고.
마침내 “인력거 한 채가 나타나더니 턱 멈추었다. 이어 짙은 고동색 한복 두루마기 차림의 청년이 내리지도 않고 인력거 위로 올라섰다. 그는 품속에서 커다랗게 조선 독립이라고 쓴 기를 꺼내 높이 들더니 ‘조선 독립 만세’를 외쳤다. 또 다른 한 채의 인력거가 등장하자 분위기는 더욱 격앙됐다. 이번에는 흰색 한복 두루마기를 걸친 청년이 조선 독립이라고 쓴 커다란 기를 휘두르며 군중을 선도했다. 사람들은 두 손을 번쩍번쩍 올리고, 어린 중학생들은 껑충껑충 뛰면서 독립 만세를 환호했다(<조국을 찾기까지>).” 고동색 한복은 김원벽이었고 흰색 한복은 강기덕이었어.
남대문역 앞은 이내 만세 소리에 뒤덮여버렸어. 기차를 타려던 사람들도 뒤돌아 뛰쳐나와 만세를 부르고 여학생들은 울음이 터져 만세를 제대로 부르지도 못하면서도 연방 두 팔을 들었단다. 경성에서 출발하는 모든 열차는 만세 운동을 전국에 전파하는 매개체가 됐고, 남대문역에 집결한 시위대 수천명은 경성의 심장부 남대문(숭례문) 방향으로 행진하기 시작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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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선두에 강기덕과 김원벽이 있었어. 일본 경찰은 눈이 뒤집혀 둘에게 달려들었어. 강기덕은 곧 이마에 칼을 맞고 체포됐고, 남대문 경비선을 돌파했던 김원벽은 경찰의 몽둥이에 맞아 쇄골이 부러진 채 잡혀가고 말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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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기덕은 서른세 살의 늦깎이 학생이었고 김원벽은 스물세 살이었어. 조선 13도를 탈탈 털어서 대학생이나 전문학교 학생은 수백명에 불과했던 시절, 아무리 식민지 조선이라 해도 전문학교 학생이라면 그 앞에는 매우 다양하고 창창한 미래가 열려 있었을 거야. 강기덕과 김원벽은 감옥과 고문과 고통이 틀림없던 길을 택하여 3·1운동의 혈로를 텄고 그 선봉에서 일제의 칼과 몽둥이를 맨몸으로 받아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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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원벽은 출옥 후 언론 활동을 하다가 서른넷의 나이로 세상을 떴는데 체포 당시 부러진 쇄골 때문에 짧은 여생 내내 괴로워했다고 해. 강기덕은 고향인 함경남도 원산으로 돌아가 그 지역에 뿌리를 박고 일제강점기 내내 ‘불령선인’, 즉 반항적인 식민지 조선인으로 평생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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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산 계급·농민 계급의 참상과 그들의 활로를 언급했다거나, 또는 일제 경찰의 고문 끝에 숨진 독립운동가 박휘병의 장례를 주관했다는 따위 이유로 감옥을 제 집 드나들듯 했지(<동아일보> 1926년 11월13일자). 우리 노동운동사에 빛나는 원산 총파업의 정신적 지주였고 ‘일제 치하 최대 민족운동단체’ 신간회 핵심이었던 강기덕은 끝내 일제에 굴복하지 않고 해방을 맞는다.
1919년 3월5일 한때의 산발 시위로 끝날 수도 있었던 경성의 3·1운동을 본격적으로 재점화했던 두 사람. 강기덕과 김원벽은 남대문역 앞에서 보여준 늠연한 기상을 오롯이 간직하며 살다가 역사 속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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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으로부터 100년 전 그들이 젊었을 때를 상상해보자꾸나. 손대면 꽝 하고 터질 것 같은 화약 더미 같은 인파 속으로 횃불 같은 깃발을 들고 나타나 ‘조선 독립 만세’를 부르짖었던 하얀색과 고동색 두루마기 차림의 청년들. 그들 덕분에 오늘 아빠와 네가 우리말을 하고 우리글을 쓰고 있는 거란다.
멋진 내용이예요 멋진 분들이구요
네 정말 눈빛이 형형한 것이... 참 인물들이었던 거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