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2년 6월 15일 “해방 전에는 내 유해를 고향에 묻지 말라”
온 가족과 일문이 독립운동에 투신한 이른바 독립운동 3대 명문으로 불리우는 집안이 있다. 의병장 왕산 허위의 가문. 경주 이씨 이회영 가문, 그리고 고성 이씨 석주 이상룡 가문. 이상룡 가문은 아득한 옛날 단종이 수양대군에게 찬탈당할 때 그 꼴을 보기를 거부한 이증이라는 사람이 안동에 터를 잡으면서 누대를 이어온 지방 명문가였다. 안동역에 내려 한 15분쯤 거리에 임청각이라는 아흔아홉칸 옛 양반 가옥이 나오는데 이것이 석주 이상룡의 생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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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아흔아홉칸 가옥은 그 위세를 적잖이 잃어버리고 있는데 중앙선 철도가 가설되면서 임청각 행랑채 태반을 헐고 철로를 놓은 탓이다. 주변 사람들은 이것이 일제의 복수라고 수군거렸다. 한 집안이 몽땅 독립운동에 뛰어든 집안에 대한 복수라는 것이다.
석주 이상룡은 경술국치 때 이미 쉰 넷의 유학자였다. 당시로 치면 손자는 기본으로 볼 연배였고 환갑상 앞에서 그 재롱을 보며 일가친척의 절 받으며 이제는 살 날이 머지 않았구나 수염 쓰다듬으면 되는 나이였다. 하지만 일찍이 의병에 가담했으며 경술국치를 앞두고는 역적들의 목을 치라고 상소를 올린 이 꼬장꼬장한 선비는 전혀 다른 길을 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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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와 맹자는 시렁 위에 올려 놨다가 국권을 찾은 뒤에 읽어도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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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 유학 서적을 파온 유학자의 일갈이었다. 당시 안동의 유림들 가운데에는 국권 상실을 슬퍼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람이 열 명이 넘었는데 이 순절(?)들 앞에서도 이상룡은 냉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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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죽으면 쾌재를 부르는 것은 일본이다. 따라서 끝까지 싸우다 죽는 것이 우리가 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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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가산을 정리하고 고향을 떠나기 전 그는 유학자로서, 또 당시의 안동 분위기에서 까무라칠만한 일을 벌인다. 지금도 우리가 “무슨 신줏단지 모시듯 하느냐” 하는 관용어구를 쓰건지와 양반 가문에서는 목숨과도 같았던 신주들을 땅을 파고 묻어 버린 것이다. 기독교인으로 치면 십자가를 밟고 지나간 것과 같은 행동. “나라가 없는데 신주가 무슨 소용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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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사조약이 있은 해 1만 5천금을 투자하여 가야산에 항일 기지를 만든 적도 있던 이상룡은 가족들과 함께 만주로 향했고 ‘경학사’ 즉 밭 갈며 배우는 이주민 자치단체를 조직한다. 그와 그 동지들의 노고를 통해 끝도 없이 가을바람에 출렁이던 억새밭은 누런 벼들이 고개숙이는 논들로 변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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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에서 논농사를 짓게 된 것은 기본적으로 조선 사람들 때문이거니와 이상룡은 만주의 조선 사람들을 묶어 세우며 , 또 중국 옷을 일상적으로 입는 등 현지인과의 조화에도 앞장서면서 항일 투쟁에 나선다. 국경을 넘을 때 그의 시를 읽어 보자.
“삭풍은 칼보다 날카로워 / 나의 살을 에는데 / 살은 깎이어도 참을 수 있고 / 창자는 끊어져도 슬프지 않다. / 그러나 이미 내 밭 내 집을 빼앗고 또 다시 내 처자를 넘겨다보니/ 차라리 이 머리는 잘릴지언정 내 무릎 꿇어 종이 될까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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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창하자. 이런 사람들이 선비라는 사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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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교론이나 실력양성론 등 분분한 방안들 가운데에서 이상룡이 견지했던 것은 독립전쟁론이었다. 일단 근거지를 마련하고 그 다음에는 무력항쟁에 나설 수 밖에 없다는 것이 이상룡의 지론이었다. 상해에서 임시정부가 설립되자 도대체 그게 무슨 ‘정부’냐며 탐탁치 않아하는 만주 지역의 독립운동가들을 설득하여 연대를 설득한 것도 이상룡이었고 제멋대로 놀던 임정 대통령 이승만이 탄핵당하고 그 뒤를 이은 박은식도 힘을 쓰지 못하자 임시정부의 ‘국무령’이 되어 동분서주한 것도 이상룡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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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낙 성품이 관후해서 서로군정서 독판 때 나이 어린 병사들에게도 꼭 공대를 하고 동지라 불렀던” (손자며느리 허은씨 증언) 이상룡은 잃어버린 조국을 되찾겠다는 결심만큼은 칼날같았다. 항일 자금이 모자라자 임청각을 팔겠다고 아들을 국내에 들여보냈고 그것만은 안된다는 문중에서 돈을 걷어 주었던 것은 일화 축에도 들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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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자가 청년단체의 장으로 추대됐을 때 손자가 자신은 이대 독자이니 가족을 책임져야 한다고 사양하자 “나라도 없는 놈이 무슨 가족을 챙긴다고!”라고 호령하던 위인이었다. 만주사변 후 중국인들이 조선인들 때문에 일본놈들이 왔다며 박해하기 시작하고 신흥무관학교장 여준과 대한독립군단 참모총장 이장녕이 마적들에게 피살당했다는 소식에 노구의 이상룡은 급격히 기력을 잃고 1932년 6월 15일 세상을 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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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기 직전 대구에서 동생이 찾아와 고향으로 모시겠다고 하자 이상룡은 마비돼가는 혀를 가까스로 움직여 이렇게 말한다. “조선 땅이 되기 전에는 데려갈 생각을 마라. 조선이 독립됐다 하면 내 유골을 유지에 싸서 조상 발치에 묻어 다오.” 그 유언은 지켜졌다. 그러나 너무 늦게 지켜졌다. 1990년 9월 2일 일단의 한국 공무원들과 유족들이 중국 흑룡강성 아성시에서 이상룡의 유해를 모시고 들어왔던 것이다. 해방된 뒤 45년이 지나도록 그는 고향 땅을 밟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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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집안에 독립운동 훈포장을 받은 이가 아홉 명이 넘고 더 많은 이들이 할아버지의 뜻을 이어 일제와 싸웠지만 그 후과는 참담했다. 외아들 준형은 만주에서의 고단한 삶을 정리하고 국내로 들어왔지만 일제의 계속되는 회유에 시달리다가 칼로 목을 찔러 자결했다.
“일제 하에 사는 것은 수치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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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손자는 끝까지 만주에서 투쟁하다가 감옥에서 해방을 맞았고 해방 이후에는 남로당원으로 활동하다가 전쟁 중 병사했다. (해방조국 군경의 총에 죽지 않은 것이 다행일 듯.) 그리고 그 증손자는 고아원에 맡겨지기까지 하는 등 곤궁한 삶을 보내야 했다.
이상룡의 유해는 돌아왔지만 그 국적은 이후로도 오래도록 무국적자로 남아 있었다. 일제의 호적을 그대로 이어받은 것이 대한민국 호적인 바, 일제의 호적을 거부한 많은 이들 즉 단재 신채호나 이상룡을 비롯한 여러 사람들이 그 국적을 인정받지 못했던 것이다. 이게 바로잡힌 것은 2009년이다.
이상룡이 고향을 떠난 근 100년 만에 이상룡은 후손들의 나라의 국적을 회복한다. 그러나 여기서도 서글픈 얘기가 있다. 국적 회복 관련 법률은 제정됐지만 그 뒤처리는 개인에게 떠맡겨졌기에 이후 변호사 비용 등 무려 500만 원 가까운 비용을 부담해야 했던 것은 이상룡의 후손이었다는 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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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포스팅을 읽으시는 분들 가운데 이래서 친일파는 쓸어 버려야 한다고 비분강개하실 분들이 많겠지만, 나는 거기에 반대한다. 이미 친일파들 본인은 백골이 진토된 지 오래다. 원래 넋같은 것이야 없었던 위인들이고. 그 죄를 자손에게 물을 수는 없고 그건 연좌제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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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할 일은 오히려 이상룡같이 자신의 일생을 걸고 일본 제국주의와 맞섰던 이들을 기억하고 발굴하고 3대 후손이든 4대 후손이든 조상의 고난과 “3대가 망했던” 슬픔을 보상해 주어야 하는 일일 것이다. 공연히 박물관장이 이완용의 손자니 조카니, 그 할아버지가 악질이었느니 하는 족보를 캐는 것보다는, 이완용과 그 일파들이 왜 그런 길로 갔고 왜 그런 선택을 했고 어떻게 하면 그런 일들이 되풀이되지 않아야 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게 더 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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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청각에는 이상룡의 시 한 수가 남아 있다고 한다. “슬퍼 말고 옛 동산을 잘 지키라. 나라 찾는 날 다시 돌아와 살리라.” 그는 돌아왔다. 너무나도 늦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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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정보 감사합니다
네 감사합니다....
<악에 지지말고 더 큰 선으로 이기라>
마지막 문구에 저도 동의합니다
아마 이 포스팅의 댓글이 아닌 걸로 ^&^ 어쨌든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