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를 결정하기까지 정말 오랜 회고의 시간이 필요하다. 수 없이 이어지는 "왜?"에 모든 대답을 끝내기까지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마음을 굳게 먹었어도 그룹 장, 팀장으로 이어지는 면담에서 또다시 나의 결정에 돌을 던지는 질문을 받게 되는데 그럼에도 변하지 않는 나의 대답 하나는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이 업무, 이 팀에서 계속 커리어를 쌓고 싶은 마음이 없다는 것이다.
이 회사는 내가 입사 시 어디에도 없던 (현재는 없어진) 신입교육과정을 만들어 냈다. 모든 신입사원들은 현장 파견 1년 후 부서를 배치하겠다는 파격적인 과정은 그 당시 그리고 지금까지도 꽤나 말이 많은 시도였다. 덕분에 모든 신입 사원은 회사 지원 시 분야 선택 없이 공통으로 지원하였고, 1년 반이 지난 후 내가 배치받은 부서는 이 회사를 지원할 때 생각조차 해본 적 없는, Plan Z에도 없었던 팀으로 발령받았다.
회사 입장에서 보면 참으로 편리한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뽑아놓고 대충 실 업무에 대해 가르친 뒤 인사팀 재량으로 흩뿌려진다. 누군가는 원하는 부서에 들어가서 일을 하게 되었지만, 나 같은 경우는 이 회사에서 그렸던 커리어 패스가 부서배치 이후 사라졌다. 전혀 생각도 해보지 않은 일의 생각에도 없었던 부서로의 배치. 그렇게 들어가면 좋겠다고한 회사에서 처음으로 아, 이곳은 나의 의견을 이런식으로 무시할 수 있구나 라고 느꼈다. 한국의 회사, 특히나 대기업의 업무란 게 다니고 보니 특정 전공, 특정 지식이 아니라서 고등학교만 졸업했다면 할 수 있는 일이 대부분이다. 저렇게 부서 배치를 해도 회사는 문제가 없지만 개인의 커리어는? 업무 만족도는?
개인의 커리어, 업무 만족도?
그렇게 대학 전공과는 1도 관련이 없는, 그리고 내가 그렸던 회사 업무와는 비슷한 것이 없는 진짜 회사생활이 시작되었다. 업무를 하다 보면 선택의 순간이 많이 오는데, 첫 단추가 잘못 끼워져서 일까? 그 이후로의 나는 최선의 선택을 한 기억이 없다. 내가 생각하는 최선의 선택은 그 옵션 중에 있지도 않은 상황이 4년이나 흘렀다. 언제나 선택을 하고 나면 이렇게 최악만 피해 가는 게 맞는 걸까?라는 의문이 가득했다. 회사일은 돌고 돈다고 부서도 옮길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으로 4년 동안 이런저런 노력도 했었다. 하지만 회사는 개인의 꿈과 미래를 지켜주는 않는 곳이라는 것을 또다시 느낄 수 있었다. 회사는 회사의 성장만을 고려할 뿐이다.
5년쯤 다니고 나니, 사실 모든 회사 일이 다 거기서 거기다. 내가 원하는 부서에 가도 하는 일은 크게 다르지 않을 것 같다. 그곳에도 그동안 끊임없이 경험했던 불합리는 계속 있을 것 같다. 그 부서에 들어갔어도 지금쯤 나는 퇴사를 이리저리 알아봤을 수도 있다. 그래도, 반짝반짝 빛나던 신입사원 때 내가 이 회사에서 그렸던 이제는 망쳐진 내 커리어에 대한 속상함은 지금도 여전하다. 여전히 내가 만약 그때 부서 배치를 잘 받았다면?이라는 질문의 답은 이제는 할 수조차 없게 만든 회사에 대한 알 수 없는 배신감이 서럽기도 하다.
첫 단추는 중요하다. 물론 퇴사할 사람은 어딜 가나 퇴사하고 버틸 사람은 어딜 가나 버티겠지만, 내 선택이 아닌 회사의 선택으로 업무가 정해졌다는 것이 나에겐 컸던 거 같다. 회사가 헬 이라고들 하지만 그래도 그 헬 중 내가 고른 헬 이라면, 그만큼 더 버틸 수 있었을지도 모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