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보다연애] 정직함과 무례함 사이에서

in #kr6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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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의 최고 덕목, 정직함

“이야기 할 게 있어.”
“뭔데?”
“처음 만났을 때, 나한테 학번 물었었잖아?”
“어, 그랬지. 나이 물어보기가 좀 그래서.”
“그런데... 나 사실 집이 어려워서, 대학 못 갔어.”

연애를 막 시작했을 때, 정직해지기란 쉽지가 않다. 왜 안 그럴까? 연애를 하면 상대에게 세상에 가장 예쁘고 근사한 모습만을 보이고 싶은 게 인지상정이다. 아픈 과거나 스스로 생각하기에 흉한 모습이라고 여겨지는 부분은 숨기고 싶게 마련이다. 상대가 나를 오해하면 어쩌나 하는 불안감 때문이다. 술주정뱅이 아버지를 숨기고 싶어 남자 친구가 집 앞까지 데려다 주는 것을 꺼리는 여자, 작은 회사에 다니는 것을 숨기고 싶어 여자 친구에게 거짓말을 하는 남자는 흔하지 않던가.

하지만 누가 뭐래도 연애의 최고의 덕목은 정직함이다. 상대를 위해서도 자신을 위해서도 정직한 게 좋다. 술주정뱅이 아버지를 숨기고 싶은 여자의 사랑이 깊어지면 어떻게 될까? 남자 친구 집에 종종 놀러갔던 그녀는 이제 걱정되고 불안하다. 자신도 남자 친구를 집에 초대해야만 할 것 같아서다. 남자도 힘든 건 매한 가지다. 그녀를 너무 사랑하기에 더 가까워지기를 바랐지만, 어쩐지 그녀는 벽을 세워두고 있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남자도 걱정스럽고 불안하다. 자신이 그녀를 사랑하는 만큼 그녀는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것 같아서.

여자는 정직하지 못했던 대가로 자신도 그리고 남자 친구도 힘들게 만든 것이다. 최악의 경우, 그 정직하지 못했던 시작 때문에 이별을 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여자는 ‘아버지가 어떤 사람인지 알게 하느니 차라리 헤어지는 게 나아!’라고 생각할 테고, 그로 인해 남자는 또 다른 수많은 오해를 하게 될 테니까. 정직하지 못한 연애의 결말은 언제나 불행하다. 조금 창피하지만, 조금 아프지만, 조금 걱정이 되지만, 연애를 할 때는 정직한 게 최고다.

연애의 독, 무례함

“왜 전화를 안 받는 거야? 몇 번 전화한 줄 알아?”
“아, 수업 중이었어.”
“잠시 나와서 전화 받는 게 그렇게 어려워?”
“그래, 다음엔 받을 게.”
“저번에 말했지? 나 맞벌이에 외동으로 자라서 혼자 있는 거 싫어한다고”

연애를 하면서 정직함만큼 힘든 것이 또 있다. 바로 무례함이다. 상대의 상황과 처지, 감정을 고려하지 않고 자신의 상황과 감정만을 앞세우는 무례함은 연인뿐만 아니라 연애 자체를 회의적으로 만들곤 한다. 서로 애틋한 마음으로 연애를 시작했지만 어느 순간 서로에게 무례하게 구는 경우가 있다. 이런 무례함은 연애의 가장 큰 적이다.

누군가 자신을 함부로 대하는 것이 기분 좋을 리 없다. 이것이 우리가 연애를 하려는 이유인지도 모르겠다. 주위에 무례하게 구는 사람이 너무나 많기에 연애를 하고 싶은 것은 아닐까. 적어도 연인만은 무례함이 아니라 깊은 애정과 관심으로 섬세하고 따뜻한 배려를 해줄 것이라고 믿고 있으니까. 그런데 그렇게 누군가에게 간절히 사랑받고 싶어 시작한 연애 끝에 다시 무례함을 만난다면, 그 연애에서 오는 절망감은 이루 말할 수 없다. 그래서 무례함은 연애의 독이다.

무례함은 유아론적 정서다.

무례함이란 기본적으로 유아론적 정서다. 유아론적 정서란 타자(상대)를 어떻게 반응할지 모르는 ‘변수’로 고려하지 않고 자신의 뜻대로 고정시킬 수 있는 ‘상수’로 여기는 것이다. 다섯 살짜리 아이를 생각해보라. 엄마가 아픈지, 아빠가 피곤한지 따위는 안중에 없고 자신이 갖고 싶은 장난감이 있으면 울고불고 난리를 치지 않던가. 그게 바로 유아론적 정서고, 그 정서가 성인이 될 때까지 이어지는 것이 무례함이다. 타자를 ‘상수’로 보는 유아론적 정서가 바로 무례함이다.

흥미로운 사실은 이런 무례함은 친구 사이보다 연인 사이에서 더 잘 발견된다는 점이다. 왜 그럴까? 아이가 장난감을 사달라고 아픈 엄마에게 조를 수 있는 이유가 무엇인지 생각해보면 된다. 아이는 알고 있다. 엄마가 자신을 누구보다 사랑한다는 걸. 엄마의 사랑은 ‘변수’가 아니라 ‘상수’라는 사실을 안다. 그 사실을 알기에 엄마가 아프건 말건 떼를 쓸 수 있는 것이다. 아무리 철없는 아이라도 옆집 아줌마에게 장난감을 사달라고 떼를 쓰지는 않는다.

친구는 타자지만, 옆집 아줌마 같은 타자다. 엄마처럼 언제나 헌신적인 사랑을 주는 타자가 아니다. 친구라는 타자는 ‘변수’다. 친구가 수업 중에 전화를 안 받는다고 느닷없이 화를 내면 어찌 될까? “내가 네 전화를 대기하고 있다가 받아야 되냐?”라며 면박을 줄게다. 그래서 아무리 유아론적 정서를 가진 사람이라도 친구에게는 쉽사리 무례하게 굴지 못하는 것이다. 친구라는 타자는 언제나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상수’가 아니라 언제 어디로 튈지 모르는 ‘변수’라는 사실을 알고 있기에.

그런데 연인이라는 타자는 다르다. 엄마 같은 타자다. 헌신적인 사랑을 줄 것이라 믿는 타자. 그래서 때로 연인이라는 타자를 고정된 ‘상수’라고 믿는다. 그 믿음 때문에 “저번에 말했지? 나 혼자 있는 거 싫어한다고!”라며 다시 유아론적인 무례함으로 돌아갈 수 있는 것이다. 이런 무례함은 연인과 연애를 질리게 만든다. 연애를 파국으로 몰고 가는 무례함의 원인은 유아론적 정서 때문이다. 자신의 무례함이 미성숙한 태도 때문이라는 걸 알게 되면 그 무례함은 어느 정도 극복가능하다. 심각한 문제는, 무례함을 정직함으로 혼동하게 될 때 발생한다.

무례함과 정직함 사이에서

“수업 중에는 전화 받기 곤란할 때가 있어.”
“그게 그렇게 어려워? 나는 정직하게 내 모습을 보여줬는데, 넌 그걸 못 받아들이는구나!”

정직함과 무례함은 아무 관련이 없는 것 같다. 하지만 상대를 함부로 대하는 것(무례함)과 있는 그대로 자신을 내보이는 것(정직함)은 종이 한 장 차이다. 이 둘은 너무 미묘해서 종종 헷갈리곤 있다.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무례함을 정직함으로 혼동하곤 한다. ‘나는 외동이었고, 어렸을 때 부모님이 맞벌이를 해서 외로움을 많이 탄다’고 말하는 것, 어찌 보면 정직하게 있는 그대로 자신을 내보이는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지 않을까? 있는 그대로 자신을 내보인다는 미명하에 상대를 함부로 대하는 경우는 연애에서 너무나 흔한 일이다.

그렇다면 정직함과 무례함은 어떻게 구분할 수 있을까?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드러낸다’는 측면으로 접근하면 이 둘은 점점 더 구분하기 힘들어진다. 무례함은 종종 ‘나는 원래 이런 사람이야!’로 시작해서 ‘그러니까 네가 나에게 맞춰!’라는 논리로 진행되기 때문이다.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드러냄’이 무례함인지 정직함인지를 구분하기 위해서는 타자라는 논의에 집중해야 한다. 정확히는 타자의 존재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느냐의 문제로 접근해야 한다.

무례함과 정직함을 구분하는 방법

친구에게는 불평불만을 못하지만, 연인과 엄마에게 그리도 쉽게 짜증을 내고 화를 내는 이유는 무엇일까? 연인·엄마를 언제나 나를 사랑해주는 자리에 있는 ‘상수’로 믿기 때문이다. 무례한 사람은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드러내지만 그 방식이 폭력적이다. 연인이라는 타자를 ‘상수’로 여기기 때문이다.

정직함은 다르다. 정직함 역시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드러내지만 그 방식이 폭력적이지 않다. 정직함은 타자를 내가 어찌할 수 없는 ‘변수’로 여기기 때문이다. 정직함이 힘든 이유가 뭘까? 그건 타자가 어떻게 반응할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남자 친구에게 아버지가 술주정뱅이라는 이야기를 왜 그리 하기 힘들까? 여자 친구에게 작은 기업에 다닌다고 말하기가 왜 그리 힘들까? 상대가 그 이야기를 어떻게 반응할지 알 수 없는 불가항력적인 ‘변수’라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보아도 좋다. 있는 그대로 자신을 드러내면서 자신의 감정을 상대에게 강요하고 있다면, 그건 무례함이다. 하지만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드러내면서 불편하고 힘들고 이런저런 걱정이 된다면, 그건 정직함이다. 사랑하고 있다면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드러내자. 하지만 그 드러냄의 이유를 섬세하게 살펴보자. 그저 아이처럼 내 감정만 앞세우느라 그런 것인지, 아니면 상대의 오해를 감당하는 용기를 내고 있는 것인지 말이다. 그 고민 사이에 무례함과 정직함을 구별할 수 있는 안목이 생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