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구멍 뒤 길고 둥근 살덩어리들이 우글거리는 것처럼 느껴졌다. 연결이 끝나는 그 지점에 무언가가 걸려 침을 삼키면 목울대가 덜컹거렸다. 한숨을 한번 깊이 쉬어도 보고 침을 크게 삼켜도 커다랗고 투명한 막이 1밀리의 틈만 남겨두고 막고 있는 것 같았다. 꽤 오래 불편했다.
숫자를 세기 시작하면 모든 일에 의연해져야 한다. 그렇게 시간을 헤아리는 동안 생긴 잉태되지 못한 것들이 몸집을 부풀려 쌓인 것이라 여겼다. '그것들은 한꺼번에 삼키기에 벅차구나.' 그렇게 넘어가곤했다. 그 거북함이 유달리 심해지는 날에는 ‘덩어리가 감정적인 것이 아니라 실재하면 어쩌지?’, ‘내 안의 세포가 자율성을 가지고 목적을 가지게 된 것은 아닐까?’ 하는 두렵지만은 않은 상상을 했다.
목소리가 변한 뒤에서야 그 존재에 이름을 붙일 수 있었다. 그러나 실체를 눈으로 봐도, 속이 시원하지 않았다. ‘애먼 걱정을 한 게 아니구나’ 하는 안도도 아니었다. 건강 염려증이라며 눈을 흘겨버린 이들이 야속하지도 않았다. 그 것이 감정의 결과물이 아니라는게 신경질이 났다. 나는 생각보다 세심하거나 예민한 게 아니라, 그저 남들이 불편한 정도를 불편하게 느끼는, 적당한 수준의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그 누구도 부여해주지 않은 특별함을 상실했다. 교만한 열패감이었다. 불편함은 단지 참담한 자기연민의 좋은 변명거리다.
소리는 돌아왔지만, 이물질은 없어지는 듯 잊혔다가도 간벽이 도지면 나타난다. 작게 몸을 굴리고 여기저기 떠돌고 있다가, 작은 소리에 덩치를 부풀리는 겁쟁이처럼 존재감을 과시한다. 그는 위협적인 실체가 아니라 귀찮음을 느낄 정도의 부스럼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익숙하지 않다. 이유 없이 눈동자 뒤로 혹은 신체 어딘가로 그것이 툭! 신경질을 돋운다. 익숙해지지 않는다. 커다란 사건 없이 그렇게 앞을 컴컴하게 하고, 이유 모를 감상, 생리적인 눈물을 자아낸다. 이건 모두 그 혹 때문이다. 그 익숙한 침입자에게 나는 모든 책임을 돌린다.
그이는 언제부터 있었을까?
아주 어릴 때부터 있었었으면 좋겠다. 그때부터 나와 모든 것들을 함께하고 자라온 것이라면 좋겠다. 자기연민과 우울함이 시작되었던 그 지점부터 그 작은 세포도 같이 자라온 것이었으면 한다. 사라지지는 않고 딱 거기까지 자라는 것이다. 1cm~2cm 정도로 적당히 불편하게 잘라낼 수 있지만 위협적이지 않고 가끔은 애달프게 동시에 모든 책임을 전가할 수 있게 말이다.
나는 내 덕에 외롭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