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어 28: 예의라는 한계

in #kr7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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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어 28: 예의라는 한계

어쩔수 없을때 나타나는 예의

유가의 대표적 인물 하면.. 공자, 맹자, 순자입니다..시대순으로 따지자면 춘추시대의 공자> 전국시대 초기의 맹자> 전국시대 말기의 순자라고 할수 있습니다. 이들의 주장이 달라지게 된 동기는 춘추 전국시대의 혼란의 정도와 관련있다고 말씀드릴수 있습니다.

우선 춘추시대에 중엽에 살았던 공자의 경우 물론 상하 계급의 논리는 흐트러져 있기는 했으나 제환공, 진문공 같은 패권 군주들이 명목상으로나마 주나라를 받들어 모셨습니다.

초나라, 오나라가 왕을 칭하고 설쳐데기는 했지만 남방에 치우쳐져 있어 중화의 주류로 인정하지 않았고 중화권 내부에서는 계절존망의 원칙이 조금이나마 지켜지고 있었습니다.

때문에 단순히 인간성 인(仁)의 회복만으로도. 질서를 존속해 나갈수 있었다는 믿음이 있었죠.

그러나 공자의 정치는 반영되지 않았을 뿐만아니라. 정세도 호락호락하게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중화의 진의 세도 가문이였던 조, 위, 한씨에 의해서 진나라가 멸망합니다. 또한 제나라에서도 세도가 전씨에 의해서 제나라의 권좌를 빼앗는 하극상이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또한 춘추시대 때 남아 있던 타국에 대한 배려는 저 멀리 멀리 사라졌습니다.

타국이 약하면 멸망시키는 것이고 타국이 혼란하면 틈을 노려 영토를 확장할 궁리만 합니다. 한나라는 약소국인 정나라를 주저 없이 병합해 버리고 제나라 민왕은 이웃 연나라 장수 자지가 반란을 일으키자 국가를 안정시킨다는 명분으로 침공하여 연나라를 초토화 시킵니다. 때문에 당시의 맹자는 단순한 인간성의 회복만으로는 이 혼란을 종식 시킬수 없다고 판단합니다.

따라서 예(禮)를 가르쳐야 한다는 거죠. 물론 이점에서 인간의 본성은 선하다는 가정하에 주장될수 있었던거죠. 다시 말하자면 본래 선한 인간이 살면서 퇴락해 지는 것이고. 이점을 예를 가르침으로써 도덕성 (仁)을 회복할수 있다는 주장이 맹자의 생각입니다.

그러나 맹자의 이런 생각 즉 왕도 정치는 당시 패도정치에 혈안이 되었던 주변국에게는 씨알도 안먹히는 소리였고 혼란은 더욱 심해지게 되게 됩니다

순자의 경우 전국시대 말기 전쟁이 최고조에 달한 혼란의 최 정점의 시기에 살았던 인물입니다. 이미 전국 7국의 국가 군주들에게는 상대방의 영토에 혈안이 되어 있었습니다.

진나라 소왕, 제나라 민왕은 제왕을 참칭하기로 계획하는등. 동,서주군에 시달리던 주나라 천자는 있으나 마나한 존재가 되고 말았습니다. 또한 진,조 두나라에서 벌어진 장평대전의 경우. 조나라가 패전하자. 진나라는 다수의 조나라 포로를 무참히 살해합니다. 조나라 국력을 아예 끊어버릴 계획이였죠.

또 이틈을 타서. 주변국인 연나라는 조나라를 침공하는 등 전쟁은 더욱 치열해 졌고 잔인해 졌습니다. 이것으로 순자는 맹자가 품었던 마지막 희망까지 버려 버립니다.

인간은 애당초 악인이고. 도덕적 감화, 예를 교육하는 것으로는. 도덕적 인성을 이룰수 없다고. 판단한것 입니다. 때문에. 강제적인 처벌을 통해서. 예법을 익히게 해야한다는 것이죠..

공자, 맹자, 순자. 방향은 달라도 모두다 도덕적 인성을 이룩하자는 견해입니다. 다만 각각 살았던 시대는 달랐고 때문에 의견의 차이가 생겼다고 할수 있죠.

재미있는 것은 순자의 제자인 한비자와 이사는 진시황제를 도와 처음으로 중국을 통일합니다. 공자의 인은 진시황제의 법으로 진화했습니다. 그러나 진시황제의 법은 2대를 가지 못했습니다.

도덕경 38장 본질

德이 높으면 德을 초월한 이로, 德이라는 말조차 없으며,

그래서 오히려 '덕이 있다' 라고 말할 수 있소.

德이 부족하면 그것을 잃지 않으려고 德이라는 말만 앞에 내세우니

그래서 오히려 '덕이 없다' 라고 말할 수 있소이다.

德이 높은 이는 일부러 어떤 행위도 하지 않으므로

다른 사람에게 덕행을 하라고 강요하지도 않소.

어짐(仁)을 내세우는 이는 의도적으로 어진 행위를 하지만

다른 사람에게 어진 행위를 억지로 강요하지는 않소.

의로움(義)을 내세우는 이는 의도적으로 의로운 행위를 하면서

다른 사람에게도 억지로 의로운 행위를 하도록 강요하는 것이오.

예(禮)를 내 세우는 사람은 의도적으로 예절 행위를 하면서도

다른 사람들이 잘 따라하지 않으면,

즉시 팔을 걷어 붙히고 억지로 강요하게 되니,

이 때문에 자연스러운 道를 잃게 되는 것이오.

道를 잃은 후에는 德을 높히게 되고.

德을 잃은 후에는 仁(어짐)을 중시하게 되며

仁을 잃은 후에는 義(옳음)를 강조하게 되고,

義를 잃은 후에는 예절을 강요하게 되는 것이오.

대저 禮라고 하는 것은,

인간들 사이의 정성과 믿음이 얇아져서 생긴 것이며

인간관계가 어지러워진 시초라고 말할 수가 있소이다.

앞서 알려진 것들(仁義禮)은

道라는 것으로 겉치장한 껍데기 말일 뿐이며,

어리석음의 시작일 뿐이오.

따라서 진실로 성숙한 사람은,

드러나지 않는 도의 두터움에 머무르지,

겉으로 드러나는 얇팍한 행위에 머무르지 않으며,

내면의 본질 속에 머무르지, 겉껍질에 머물지 않는 것이오.

그러므로 참된 사람은

겉껍질은 버리고 내면의 본질만을 취하는 것이외다.

[출처] 도덕경 38장|작성자 대밭골

도덕경에서는 도, 인, 의, 예 순으로 순서를 정한 것 같습니다. 유가적인 현실 안에서도 비슷하게 발전했습니다. 예가 발전하게되면 많은 규칙을 만들어야 하고 규칙은 결국 법으로 만들어져서 우리를 구속하게 됩니다. 그래서 예의를 지나치게 지키다보면 구속이라는 한계로 발전하게 됩니다.

예를 지키는 것을 넘어 예를 강요하게 되면 피곤해집니다. 어제 예의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선배님과 저녁식사를 하는데 요구사항이 많다보니 조금 불편했습니다. 자신만 지키면 자연히 따라서 할텐데 자꾸 가르치고 강요하니 뜻을 알겠지만 불편했습니다.

예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주위사람을 불편하게 할 수 있고 자신에게는 한계를 부여합니다.
의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우리가 남이가!'를 남발할 수 있습니다. 인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측은지심이 지나쳐 마음이 혼란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도는 무위이며 천지불인입니다. 인자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옳고 좋게 보이고 꼭 지켜야 되는 것이라도 강요한다면...

예를 지켜야 서로 불편하지 않겠지만 강조하고 강요하게 되면 한계가 만들어집니다. 예를 강요하게 되면 법이 되고 법을 강요하게 되면 독재가 됩니다. 스스로에게 한계를 만들수 있는 예...

뭐든지 적당히 조절하면 좋지만 지나치면 불편하게 됩니다. 슈퍼맨이 필요한 시대는 태평성대는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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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禮 라는 글자에는 정말 많은 뜻이 함축 되어있습니다.
이 글자의 본질을 사람들이 얼마나 이해하고 얼마나 파악하고 있을까요? ? ? ? ? ? ?
공자가 사람을 상대하며 말을 할때는 그 사람의 이해정도와 수준에 맞게 대화했다고 생각되어집니다........

도덕경 38장에서 말하고 있는 禮를 보면 그 당시 사람들이 禮을 이해하는 정도와 수준이 느껴지고 도덕경38장역시 그에 맞게 쓰여진것입니다. . . . .

수천년전에도 이러했을진데 지금날에는 너무나 뜻이 왜곡 되어 졌다고 생각합니다.

소옹이 말했던 禮와 정이천이 말하는 禮는 다를수 없습니다. 다른것이 있다면 그것을 받아드리고 실행하고 구현하는 방법론이 다른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