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 없이 춤추는 것과 같다.”
남편이 자살한 충격으로 200kg의 비만이 되어 집안에만 틀어박힌 어머니, 집안일에 치여서 무기력해진 실업자 누나, 정신연령이 어린애 수준인 지적장애 남동생, 반항적인 십대 여동생과 사는 길버트는, 희망 없는 자신의 삶을 이렇게 비유한다. 그는 식료품 가게의 점원으로 일하며 이런 괴상한 집안을 지탱하고 있다. 이 퇴락한 소도시를 떠났더라면 그는 진짜 조니 뎁처럼 할리우드 스타가 됐을지도 모르는데. 그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하나뿐인 가족’이라는 울타리가 그 자체로 사랑과 평화와 상호이해 따위를 선사하지 않는다는 걸. 그런 아름다운 말로 모든 게 해결된다면야 세상에 힘든 사람은 하나도 없다는 걸.
<길버트 그레이프>의 원제는 <What’s Eating Gilbert Grape>다. 해석하자면 ‘무엇이 길버트 그레이프의 삶을 갉아먹는가’ 정도가 되지 않을까 싶다. 그 말대로 길버트의 삶은 황량하고 메마른 풍경이 되어 조금씩 바스러지고 있었다. 적어도 베키를 만나기 전까지는. 어머니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가족들이 뿔뿔이 흩어진 다음, 남동생 어니를 데리고 베키에게 떠나는 길버트의 뒷모습은 그렇게 가벼울 수가 없다. 아마도 이 영화에서 유일하게 희망적인 장면일 것이다. 그의 말대로 “이제는 어디든 갈 수 있기” 때문에.
당신에게 가족은 무엇이냐는 질문에 기타노 다케시가 “누가 보지만 않는다면 내다버리고 싶다”고 말한 일화는 꽤 유명하다. 어떤 시인은 “집이 아니라 짐”이란다. 또 어떤 시인은 “밖에선 아름답던 꽃들이 집에만 가져가면 다 죽는다”고도 했다. 어떤 이에게 가족이 행복이며 피난처라면, 또 다른 이에게는 가족 그 자체가 불행이다. 내려놓아도 될 걸 왜 힘들게 지고 가는지 모르면서 지고 가는 무거운 짐이다.(누군가는 마지막에 어니를 데리고 떠나는 길버트를 보고 "개새끼야, 혼자 가란 말이야!" 하고 욕을 하며 울었다고 한다)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리나>는 "모든 행복한 가정은 서로 엇비슷하지만, 불행한 가정은 제각기 나름대로의 불행을 안고 산다"는 문장으로 시작한다. 그러나 '모든 행복한 가정'에는 '희생자'가 따른다는 점에서도 엇비슷하다고 덧붙여도 그다지 반박하기 힘들 거라고 생각한다. 때로는 희생자가 희생당하기 위해 다른 가족 전체를 희생시키는 아이러니가 발생하기도 한다. 어떤 의미에서 가족이란 인류가 발명한 최악의 비합리적인 공동체인지도 모른다.
그러면서도 막상 없어지면 자신이 마치 뿌리째로 뽑혀 나온 풀 한 포기처럼 여겨질 때가 있다. 어쩔 수 없이 그편으로 뻗어나가는 안테나가 있다. 자신의 생의 시작을 이루었던 곳을 향해 뻗어 있는. 이 지긋지긋하고 복잡다단한 딜레마에서 우리는 어떻게 자유로워질 수 있을까. 자유로워질 수 있긴 한 걸까. 길버트에게 물어보면 대답해줄까.
제가 좋아하는 영화이고 본지 몇십년이 지났는데 아직도 불에 타고 있는 그 것의 모습이 기억나네요.
네, 정말 좋은 영화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