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moral hazard

in #kr7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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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ral hazard라는 말은 미국발 금융위기 전후, 금융권 세태에 대해 유행하던 말이라지만, 2000년대 초반 dot com bubble 때도 널리 쓰이던 말이었다. 잘만 터지면 큰돈을 벌어다줄 수 있는 특정 산업의 활황 속에서, 투자자들은 눈먼 돈을 쏟아 부었고 피투자자들은 흥청망청 써댔다.

나의 새로운 직장, 문화 webzine을 IT 회사라고 하기는 좀 애매했다. 문화판 주변인들이 만든 회사였으니까. 20대부터 급진적인 문화 잡지를 창간했다가 망하고 자서전 대필로 생계를 잇던 남자와, 신문사의 광고부서에서 일을 시작해 여기저기 문화사업을 기웃거리던 남자, 인문학 교재 집필 등의 일을 하던 남자, 그렇게 셋이 모였다.

그 팀장 셋 밑의 팀원 세 명, 여섯 명의 staff writer(내부 필진) 중의 하나가 바로 나였다. 그리고 많은 외부 필진이 있었다. staff writer들에게 지급되는 월급은 많지 않았지만, 외부 필진에게 지급되는 원고료는 참 후했다. 그리고 staff writer들에게나 외부 필진들에게는 bonus라도 되는지, 끊임없는 술자리가 제공되었다. 대체로 토론이나 interview, event 등의 명목으로 술자리가 만들어졌지만, 백수건달이나 다름없는 외부 필진들이 아무 때고 들이닥치면 점심이고 저녁을 가리지 않고 술판이 벌어졌다.

모회사가 소유한 강남역 한복판의 거대 빌딩 꼭대기층에는, 자회사들도 다 이용할 수 있는 구내식당이 있었다. 10층 구석 사무실에서 근무하던 우리 여섯 명도, 점심시간에나마 city view를 즐기며 대기업 직원 흉내를 낼 수 있겠다고 흐뭇했는데, 상황은 당황스럽게 돌아갔다. 점심식사 때도 과한 반주를 즐기던 남자 팀장 셋은 직원 식당에도 소주를 가져가 금속 물컵에 따라 마시며 킬킬대기 시작했다. 그런 기행과 일탈을 시위하듯 즐기는 이들이었다.

기행과 일탈은 성희롱에도 이어졌다. 무슨 말이냐 하면, 어느 직장을 가나 성희롱은 기본 course다. 그런데 이 직장에서는 성희롱에도 기행과 일탈이 적용됐다. 좌파들이 모인 곳이니 언행들의 배경은 정치적으로 올바르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술에 취하거나 특정한 상황이 되면 그들은 비뚤어짐을 표출하기 시작했는데, 그건 의도적이고 위악적이면서 다분히 performance에 가까운 gesture였다. 즉 모두가 있는 곳에서 부하 직원에게 “사랑해~” 하고 backhug를 하면서도 손이나 팔을 둥글게 엉거주춤 힘을 주어, 상대방의 몸에 닿지는 않게 하는 식이었다.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반항은 욕설에도 적용됐다. 특정 지역과 성적 성향을 지칭하는 별명으로 불리는 직원 둘이 있었다. 정상적인 회사는 고사하고 그 어떤 집단에서도 상상하기 힘든 별명이었지만, 팀장들은 그런 모욕을 대놓고 입에 올릴 수 있는 위반의 thrill을 즐겼다. 할리우드 영화에서 흑인들끼리, 혹은 아주 친한 백인이 흑인에게 nigger라고 부르는 경우처럼 보일 수도 있었겠지만, 그 정도로 허물없는 사이는 아니었다.

만일 그런 위반의 행위들에 조금이라도 정당성이 부여될 수 있다면, 거기엔 행위자들의 팽팽한 긴장감이 전제되어야 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 webzine은 투자금과 함께 점차 생기도 떨어져 갔다. 그리고 회사 운영과 술자리와 반항적 기운들은 무작정 해이해지며 그냥 엉망진창이 돼갔다. 오후가 넘도록 출근하지 않는 사람들과 벌써 몇 달째 아무 글도 쓰지 않는 내부 필진들, 거기에 주변 부랑아들도 마음대로 방문해 남는 computer로 game이나 하고 있는 이상한 사무실이 돼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