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층엔 경비실
1층에 산다. 아홉 살 때부터 일층에 살았다. 한 반에 삼분의 이 이상이 아파트에 살고 있었는데 일층에 사는 아이들은 많지 않았다. 아파트는 대게 15층 이상이니까 당연했다. 그 희소성을 이유로 나는 일층에 사는 걸 자랑처럼 말하고 다녔다. “나 일층 산다.” 라고 하면 아이들은 고맙게도 “우와, 그럼 집에서 줄넘기도 할 수 있겠네.” 등의 말로 나를 북돋아주었다. 그런 날은 어떤 특권을 보유한 사람처럼 기세등등하게 거실 한 가운데에서 줄넘기를 했다. 줄 없이 뛰는 가짜 줄넘기이긴 했어도 나는 있는 힘껏 뛰어올랐다. 온 집안이 쿵쿵 울렸지만 누구도 쫓아오지 않았다.
아침부터 밤까지 집을 지켰다. 엄마는 자랑스러운 워킹맘이었지만 그 당시 엄마에게 있어 워킹과 맘을 병행한다는 것이 선택이 아닌 필수였음을 이제는 안다. 스스로를 자랑스러워하지 못한 엄마였다는 것도. 도어락 같은 것이 없던 시절이라 열쇠를 우유주머니에 넣어두고 다녔다. 우유주머니에서 열쇠를 뺄 때면 몸을 대문에 바짝 붙이곤 했다. 일 층에는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사람들과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바람이라도 휙 불어 우유주머니가 흔들리면 그 안에 열쇠가 들어 있는 게 들킬까 늘 불안했다. 하교 길에는 언제나 대문이 열려있는 생각, 낯선 아저씨가 열쇠를 꺼내 집에 들어와 있는 생각, 그런 불길한 생각들을 했다. 열쇠를 내가 먼저 사수해야해, 하고 발바닥이 뜨끈해지도록 뛰어 아파트 앞에 도착해보면 얼굴이 검붉은 경비아저씨가, 아저씨의 몸뚱이만한 경비실에 꼭 끼여 있는 것 같은 모습으로 나를 물끄러미 지켜봤다.
외출할 일이 있을 때 역시 열쇠가 없는 가족 누군가의 방황을 대비해 열쇠를 우유주머니에 넣어두어야 했는데, 그러면 또다시 낯선 아저씨가 우유주머니에 몰래 손을 넣어 우리 집 문을 딴 다음 우리 집을 자기 집 마냥 활보하고 있을 것만 같아서, 아저씨가 무서운 얼굴로 나를 화장실에 가둬두고 그 광경을 본 엄마가 뒤로 쓰러져버리는 따위의 상상들이 줄줄이 쫓아다녀서, 외출할 일 자체를 만들지 않았다. 원 없이 줄넘기를 해도 문제없는 거실에 우두커니 앉아 베란다 너머 해가 점점 작아지는 모습을 지켜봤다. 해가 멀어졌을 뿐인데 집은 금세 차가워졌다. 작아진 해는 힘을 잃었고, 1층까지 빛을 실어다주지 못했다. 2층에서 이따금 발자국 소리가 들렸고 근원지를 가늠할 수 없는 어딘가에서 라디오소리가 쉼 없이 울려 퍼졌다. 해가 닿지 않는 일층 집은 금세 동굴처럼 변해버려서 나는 더욱 더 라디오 속 말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라디오가 켜져 있는 내내, 누군가 있겠지, 하고 생각했다. 누군가 듣겠지, 하고 생각하다보면 누군가 오겠지, 싶어졌다. 많은 날 동안 줄넘기를 하지 않았다. 바닥이 부서져라 뛰고 나면 어김없이 사위가 한층 더 고요해지는 탓에, 나는 부러 동굴 속에 나만 남은 것이 틀림없다고 믿어버렸다.
라디오소리가 경비아저씨의 것이었다는 건 그로부터 얼마 후에 알았다. 누가 대문을 두드리기에 열어보니 경비아저씨가 우리 집 호수가 적힌 택배를 들고 서 있었다. 경비아저씨의 얼굴을 가까이 본 게 처음이라 나도 모르게 굳어버렸는데, 그보다 문을 열자마자 라디오 소리가 가까워진 것에 더 놀라서 그만 버르장머리 없이 경비아저씨를 위아래로 훑어보는 꼴이 되고 말았다. 경비아저씨의 주머니에 꽂힌 손바닥 만 한 라디오에서 나긋나긋한 목소리가 잡음에 섞여 흘러나왔다. 경비아저씨의 주머니에 매달린 라디오는, 야밤의 주차장이나 눈 내린 도로 위 그리고 택배 주인을 찾아나서는 불 꺼진 계단에서도 똑같이 울렸을 거였다. 나는 말없이 택배를 날름 받아들고 문을 닫았다. 잡음 섞인 목소리가 다시 멀어졌다.
동굴 속에서 지내는 긴 세월 동안 경비아저씨는 여러 차례 바뀌었고 희미하게 들리던 목소리는 완전히 끊겼다. 그런데도 여전히 엄마는 선택일 수 없는 워킹맘이고 나는 멀어지고 작아지는 해나 바라보며 집을 지키고 있다. 대문을 사이에 두고 분주한 사람들과 움직일 줄 모르는 내가 나란히 지면 위에 있다. 발자국 소리, 웃는 소리, 부르고 답하는 소리가 들릴 때마다 나는 어떻게 하면 이 모든 소리를 차단할 수 있을지 생각했다. 내가 쌓은 동굴은 더욱 견고해져서 더 이상 라디오소리 같은 게 들어올 틈이 없었다. 나는 어느 새 집이 아닌 나를 지키고 있었다.
그랬던 어느 날, 대문 벨과 함께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빼꼼 연 문틈 사이로 모자를 눌러 쓴 경비아저씨가 무언가를 내밀었다.
“아, 저… 죄송합니다. 실례지만, 그… 괜찮으시면, 경비 해고 관련해서 한번만 읽어봐 주시고 서명 좀 해주실 수 있으신지…… 동의 비동의에 선택만 해주시면 되는 건데……. 아이고, 죄송합니다, 갑자기.”
주름진 얼굴에 미소를 띠우고는 여러 번 저기, 죄송합니다, 이런 말들을 붙여가면서 경비아저씨는 우리 집 호수가 적힌 란에 서명을 부탁했다. 쓱 보니 아직 서명을 하지 않은 칸들이 수두룩했다. 내가 ‘비동의’에 체크를 하고 서명을 하는 동안 경비아저씨는 멋쩍게 웃으며,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하고 연거푸 인사했다. 아저씨의 코끝에서 뜨끈한 열기가 흘러나왔다. 나는 어쩐지 마음이 불편하여 과장된 목소리로 괜찮습니다, 하고 말했다. 억지로 목소리를 냈을 뿐인데 시야가 번뜩 트이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잊고 있던 사실 하나가 머릿속에 되살아났다. 1층에는 나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경비아저씨가 한 팔에 파일을 끼고 주춤주춤 2층으로 올라갔다. 아저씨의 구부러진 목덜미가 위태롭게 보였다. 대문을 닫고, 도어락이 잠기는 걸 확인하고, 앉아있던 거실 바닥으로 되돌아왔다. 베란다 너머 작은 해가, 작기는 해도 강렬한 빛줄기가 쏟아져 내리는 것을 보았다. 문득, 천장에 머리가 닿도록 힘껏 뛰어오르고 싶어졌다.
Cheer Up!
감사합니다! Cheer up!
보팅 팔로우 리스팀 모두 누르고 갑니다..
글쓰시는 솜씨가 대단하세요..!
와 패피우기님 감사합니다! 저도 팔로우했어요^^ 칭찬감사합니다! 종종 방문 하겠습니다~~
와 이번 글도 몰입해서 쭈욱 읽어갔습니다..
표현이 정말 좋습니다..
@홍보해
헝 ㅠㅠㅠ 감사합니다.. 몸둘바를 모르겠군요..
감사합니다!!!
너무 잘 읽었습니다. :)
좋을 글 앞으로도 많이 써주세요! 팔로우 하고 가겠습니다. :D
감사합니다!!! 첫날이라 아직 아무것도 모르지만 저도 팔로우하고 관심있게 읽어보겠습니다!
와~~~ 글을 정말 잘 쓰시네요. 부럽부럽.
나하님 글도 너무 좋아요^^ 칭찬 감사합니다!
저는 글을 (읽기)쉽게 쓰는 편이라 사람들이 그다지 좋아하지 않아요. 좋게 봐주셔서 고마워요. ^^
비타밍크님의 글은 몰입도가 있네요. ㅎㅎ
다음 포스팅도 기다리겠습니다.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팔로우했습니다~!!
저도 비타밍크님처럼 글 쓰고 싶습니다. 정말 대단한 능력을 갖고 계십니다 팔로우 합니당
오.. 아닙니다..ㅠㅠ 과분한 칭찬 감사합니다.. 팔로우했습니다!
좋은글 감사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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