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읽고, 감상을 글로 쓰는 것이 취미입니다.
부족한 솜씨이지만 책을 좋아하는 분들과
감상을 통해 소통할 수 있다면 참 즐거울 것 같습니다^^
호모 데우스(미래의 역사) / 유발 하라리
감상
지금 우리는 수많은 미래에 대한 예측을 마주하고 있다. 이처럼 미래를 향한 강한 열망이 표출 되는 이유는 인류가 전례 없는 기술의 힘에 접근하고 있음에도 그것으로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는 것에 대한 두려움과 호기심의 에너지일 것이다. 이제 인류는 긴 역사동안 마주하고 싶지 않았던 질문을 더 이상 피해갈 수 없게 된 것만 같다. ‘이제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
이 행성을 정복한 사피엔스에게는 지금까지 너무도 많은 할 일들이 있었다. 오히려 무엇을 해야 하는지 고민하는 것은 사치스러운 생각이었을지도 모른다. 인류는 당장 눈앞에 수천 년 동안 최악의 적이었던 기아, 역병, 전쟁과 같은 문제들을 해결해야 했다. 인류는 이러한 강한 적들 앞에 무기력했고, 수많은 죽음이 역사의 공백을 채울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경이로운 경제성장은 이러한 문제들은 통제할 수 있는 비극이 되도록 하였다. 긴 시간동안 인류가 싸워온 적들과 전쟁에서의 승리가 눈앞에 있음에도 지은이와 같이 미래에 더욱 신중해지는 것은 어쩌면 진정한 비극은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잉태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우려 때문일 것이다. 지금까지의 인류 역사 속에는 성공은 야망을 낳게 한다는 분명한 교훈이 있다. 인류는 현재까지 이룩한 성취를 딛고 인간이 스스로의 삶을 통제 가능한 성공을 맞이하면서 인간은 불멸, 행복, 신성이라는 야망을 갖기 시작하였다. 이것은 분명 인간이 21세기에 그토록 갈구하던 해야 할 ‘무엇’이 되기에 충분했고, 긴 시간의 역사를 이것을 위해 노력할 대상이 되기에 적합했다. 하지만 이러한 갈망이 우리의 미래에 어떠한 변화를 가져올지 감히 짐작조차 할 수 없는 것이 사실이기에 지은이는 이 책을 통한 진지한 논의를 시도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이처럼 짐작조차 할 수 없는 미래를 걱정해야 하는 중요한 이유는 우리가 탑승하고 있는 미지의 세계로 향하는 열차가 결코 멈출 수 없을 것이라는 이유 때문이다. 자본주의는 인간의 욕망을 먹고 살아가는 존재이다. 인간의 갈증이 불멸, 신성과 같은 오아시스를 찾기 위해 더욱 커질수록 자본주의는 살아남기 위해 이것을 더욱 자극할 것이며, 인간은 이러한 유혹으로부터 절대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더욱이 인본주의 문명이 인간의 생명, 감정, 욕망을 신성시한지 오래 되었음을 고려하면, 인본주의 문명이 앞으로 인간의 수명, 행복, 힘을 극대화 할 것이라는 예측은 사실 그리 독창적인 것도 대단한 선견지명도 아닐 수 있다. 하지만 그 누구도 이러한 과정에서 발생하는 문제들 때문에 기차를 멈추려 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브레이크가 존재하지 않는 이 기차가 영원히 무사하게 달리지는 못할 것이다. 이 행성에 살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이 분명 분노, 소외감, 두려움과 같은 감정들을 느끼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도 극심한 양극화와 불평등이 미래에 시대에 이르러 신과 같은 힘에 접근한 엘리트층이 등장하게 된다면 어떠한 상황으로 나아갈지 감히 상상조차 하고 싶지 않다. 그렇다면 과연 현재에도 해결되지 않고 더욱 심각해지는 문제들을 그대로 방치하고 우리가 감히 불멸, 신성과 같은 것들을 추구해도 되는 것인지 매우 의심스러운 생각만이 가득하다. 하지만 나의 의심이 가진 자들의 욕망을 억누르지는 못할 것이라는 믿음과 더불어 이러한 과업들을 채택하는 것이 실수일지도 모르지만 역사는 큰 실수들로 가득하다는 지은이의 말을 바라보며 인류의 이러한 시도가 실패하기를 바라는 역사를 희망하는 인간이 될 수밖에 없음이 씁쓸했다. 과거의 운명에서 해방되어 다른 운명을 상상하기 위해 알아야 하는 것이 역사라면 지금의 우리가 알아가고 있는 역사가 과연 우리를 새로운 운명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할 수 있을지 의문일 뿐이다.
이처럼 인본주의를 실현하려는 인간의 시도는 오히려 그 이념의 몰락을 초래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 사실이다. 벌써 인본주의 논리적 결론과 결함은 인류 중에 한 명인 본인에게 깊은 우려와 의심 그리고 회의감을 갖도록 만들었다. 이러한 의식이 확산될 것임이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인본주의의 꿈을 이루려는 기술들은 결코 멈추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인본주의는 이러한 기술들에 의해 그것의 근간이 흔들릴 가능성 또한 매우 큰 것이 사실이다. 이처럼 인본주의가 봉착한 딜레마 속에서 지은이는 우리의 욕망과 경험을 대신할 수 있는 존재가 있을 수 있다고 하였는데 바로 ‘정보’이다.
정보, 그것이 의미의 원천이 되는 시대가 올 수 있다. 지은이가 그렇게 주장하는 이유는 우리가 이미 정보라는 흐름 속에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의 삶은 현재 정보와 연결되는 것으로부터 의미를 발견하는 시대 속에 있다. 나의 생각이나 경험이 데이터의 교류 속에서 아무 기여도 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뭔가를 하고 있다는 의미를 찾을 수 없게 되었다. 인본주의는 자기 자신 스스로 의미를 채우면 되었지만 지금의 인류가 발견하는 의미의 원천은 공유되는 경험에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어쩌면 기술의 발전으로 인한 추세의 경향으로 생각될 수 있지만 우리의 경험을 데이터로 전환하는 것은 지금의 시대에서는 생존의 문제이다. 우리는 지속적으로 그리고 영원히 자신이 가치 있다는 것을 증명하며 살아가야 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의미의 원천이 전환 되는 시대를 우리가 저항하는 것은 매우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인본주의가 바로 폐기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인본주의는 우리가 불멸, 신성과 같은 능력을 얻기 위해 막대한 량의 데이터의 처리를 필요로 하게 될 것이다. 결국 인간의 능력을 벗어난 거대한 정보의 처리는 알고리즘이 하게 될 것이고, 모든 것은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의 권한이 인간에서 알고리즘으로 옮겨가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 단계까지 이르게 된다면 알고리즘에게 인간의 건강과 행복은 보잘 것 없는 문제처럼 보일 것이다. 최종적으로 인간의 인본주의가 불필요한 데이터로 전락하는 순간 또한 인간이 네트워크에서 수행하는 기능이 중요하지 않은 것이 될 때, 우리는 우리가 창조의 정점이 아님을 알게 될 것이다. 인류는 그저 우주적 규모의 데이터 흐름 속에 잔물결과 같은 존재가 된다는 사실이다.
인간은 그동안 네트워크의 중심에서 다른 생명체의 가치를 평가하고, 동물들과 같이 훨씬 덜 중요한 기능을 수행한다고 생각되는 그들의 삶을 철창에 가두어 놓고 바라보았다. 우리가 앞으로 우리의 욕망을 제대로 제어하지 못한다면 인류는 알고리즘이 인간을 바라보는 철창 속에 들어가게 될 지도 모른다. 지능이 높은 알고리즘들이 우리보다 우리를 더 잘 알게 되는 순간 더 이상 호모 사피엔스는 역사의 경로에서 사라지게 될 것이다.
나에게 불멸의 젊음과 생명을 준다면 과연 거부할 수 있을까? 나에게 다가올 미래가 악몽과도 같은 끔직한 것일지라도 결코 이러한 유혹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다. 이처럼 지은이가 말하는 인류의 삶과 미래는 모든 인간들의 이야기이며 선택이다. 영원한 것과 사라지는 것, 인류에게 혹은 나 자신에게 놓여있는 딜레마가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이러한 딜레마를 고민하는 사이 분명 미래를 상상할 수 있는 스펙트럼이 훨씬 넓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아무도 모르는 미래 하지만 알아야만 하는 미래 그리고 반드시 찾아올 미래를 위해 지금의 나의 고민과 상상이 현명한 인류의 삶을 위한 작은 희망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미흡하지만 열심히 창작한 글이오니
혹시 필요하신 분께서는 꼬옥 말씀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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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 시대 4차산업혁명이라는 미래의 키워드를 가지고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장 큰 착각을 하는 점이 '이미 다가온 미래'와 '앞으로 다가 올 미래'를 혼동 한다는 점이죠.
두 가지가 명확해지려면 앞으로 조금 더 시간이 필요하겠지요^^ㅎㅎ
글 잘쓰시네요
감사합니다^^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