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군이래 최고 다단계 사기꾼 조보한이
사고로 인해 전생으로 돌아갔다.
그의 전생은 조선 중기 종이었으니.....
조선 최고의 사화 기축옥사와
정여립의 난 사기 사건의 전말.
'길삼봉전'
32화
벼랑에 떨어지던 내 몸이 어딘가에 닿았다. 난 눈을 감고 있었다. 떠오른 막금이의 얼굴, 그 여운에 묻혀 있었다.
새삼 죽음에 대한 두려움 따윈 없는 것이다. 난 조보한의 삶에서 갑자기 이곳에 온 것이니까. 그런데 갑자기 가슴에서 무언가가 훅하고 올라왔다.
조보한의 삶은 그렇다 하더라도 봉삼의 삶은?
노비로 태어나 노비 친구를 위해 삶을 바치고 그 놈의 배신으로 죽는 봉삼의 삶은?
조보한은 왜 이곳에 온 건가? 그 처절한 봉삼의 삶을 겪고 개과천선이라도 하라고 보낸 건가?
안 된다.
이렇게 죽으면 안 되는 거다. 조보한은 괜찮아도 봉삼은 아닌 것이다. 이건 아니다.
의연이 한 말이 떠올랐다. ‘죽으면 살 것이다.’라고 했다. 뭔가 있을 것이다.
맞다. 절묘하게도 여느 이야기처럼 이 벼랑에 떨어지는 순간에 나에게 살길이 생겼다. 내 몸을 무언가 감기 시작했다. 칡넝쿨 같은 것이었다. 내 몸이 직각에 가까운 벼랑에서 떨어지다가 벼랑의 아랫부분 비탈진 부분에서 두 어 번을 튀고 빠르게 구르기 시작했을 때였다.
벼랑 아래 산비탈엔 높이가 건물 삼층은 되는 은행나무가 있었다. 누군가 그 나무에 올라가 맨 위에 질긴 넝쿨 같은 줄 한 쪽을 묶고 나머지를 위로 던져 구르는 내 몸에 감기도록 만들었다. 엄청난 속도로 구르는 내 몸에 감긴 줄의 한 쪽을 높은 나무 맨 위에 묶어서 그대로 떨어졌다면 피떡이 되었을 나의 몸을 구해주었다. 나무 맨 위에 묶이고 반대편은 내 몸에 묶인 줄은 마지막에 나를 허공에 띄워 주었고 그대로 바닥에 처박혀 피떡이 되는 것을 막아 주었다.
겨우 살았을 뿐이다.
그리고 겨우 나무에 묶인 줄 때문에 허공에서 그네를 타던 몸이 그 사람에 의해 땅에 닿았을 때 기절했다.
토굴이었다. 처음 내가 들어갔던 순종의 집 뒤에 있는 그 토굴과 다르지 않았다. 다만 약초 냄새가 난다는 것만 다를 뿐.
정신이 들었지만 나는 눈을 뜨지 못하고 있었다. 분명 온 몸 여기저기서 느껴지는 고통으로 본다면 나는 또 살았다. 그 와중에 살아났다.
하지만 눈을 뜨기 두려웠다.
눈을 떠서 내 몸을 봤는데 또 봉삼이라면?
이젠 어떻게 해야 하나.
이곳 조선에 와서 천하의 조보한은 완전히 다른 삶을 살았다. 나름 최선을 다했다고 하지만 그 무엇 하나 해낸 게 없다. 걸인청을 살려 냈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그건 큰 의미가 없다.
만약 눈을 떴는데 또 조선이고 봉삼이라면 이젠 달라져야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선 이 갈아 마실 순종이 놈을 잡아서 누구도 겪지 못한 것을 겪게 해줄 것이다. 그리고 한 바탕 놀다 가려고 했지만 아니다 다 뒤집고 갈 것이다.
나도 모르게 어금니를 꽉 깨물었을 때, 그가 들어왔다. 나를 살려낸 사람.
눈을 뜨고 그를 보았다. 누굴까? 궁금했다.
그리고 난 세 번째 이 어처구니없는 인연에 깜짝 놀랐다. 사내는 바로 상기였다. 분명 이상기였다.
사내가 나를 살피려고 다가왔을 때 나도 모르게 입술을 움직였다.
‘이상기?’
사내가 내 입술의 움직임을 따라 해보더니 내 눈을 보며 또박 또박 말했다.
‘이상기? 이상히? 무슨 말인지 모르겠으나 나는 지함두라는 사람이오.’
‘지함두?’
‘그렇소. 내 아는 어떤 자가 당신을 구해야 한다고 구체적인 방법까지 알려주어서 기다리다가 다행히 당신을 구했소. 사실 그 방법이 과연 잘 될 지는 나도 믿지 않았었소. 하지만 이렇게 살아났으니 참 다행이오.’
분명 이상기인데, 지함두라고. 아 막금이와 같은 경우 구나. 세 번째 같은 일을 겪으니, 처음과는 다르게 이젠 바로 받아들여졌다.
그리고 당장엔 이상기가 왜 지함두가 되어서 나타났는지 보다 누가 나를 살리라고 했는지가 더 궁금해졌다.
‘누구요? 나를 살리라고 한 사람이?’
‘그가 예전에 책을 줬던 자라고만 하면 알거라 하더이다. 그리고 할 일이 있어 왔을 테니 그것을 찾아보라 하면서 걸인청은 아니라고 하더이다.’
그 선비였다. 아흔 아홉의 계단에 대한 이야기를 해줬던 선비, 내게 김순종의 위험한 서책을 건넸던 선비.
상기, 아니 지함두라는 이자가 나를 구한 것도, 그리고 내 입술을 읽어 대화가 되는 것도 아 한 번에 이해가 되었지만, 그가 왜 나를 구한 건지 궁금해졌다.
‘그는 지금 어디 있소?’
‘그리 물을 거라고도 했소. 그는 이제 이 세상에 없다고 답하라 했소. 다신 볼 일 없을 거라고.’
허탈해지는 대답인데 왠지 다시 만나질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꼭 이 세상이 아니라 다른 세상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너무 많은 말을 했소. 일단 쉬어야 하오.’
맞다. 진짜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도 힘들 만큼 몸이 엉망진창이었다.
그리고 어떤 이유에서 그가 나를 구했는지 그건 중요하지 않다. 일단 몸을 회복해야 한다. 그리고 김순종을 잡아야 하고 세상을 뒤집어야 한다.
그리고 지함두라는 이름으로 온 이상기 그와의 만남은 분명 나에게 도움이 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내가 몸을 회복하도록 도와 줄 것이고 그 뒤에도 많은 것을 해줄 것이다. 이상기가 그랬으니까.
석 달을 누워있었다.
상기는 아니 함두는 지극 정성으로 나를 돌봐주었다. 심지어는 대소변까지도 받아 주었을 정도다. 역시 이상기였다.
말 나온 김에 상기 이야기를 좀 더 하자.
조보한이 이상기를 처음 만난 건 열 살 때 즈음이었을 것이다. 보한은 서울에 신문팔이 집단에 끌려와 버스에서 ‘목마른 사슴이 물을 찾고........’하며 신문을 팔다가 대전에 내려갔고 가출한 아이들을 데려다 부모를 찾아주거나 기르는 아동보호소에 갇혔다.
아이들이 도망을 자주 가서 보호소는 현관을 잠그고 있었다. 그곳은 교도소와 다르지 않았다.
아이들의 세계라고 다르지 않다. 거긴 주먹 쎈 놈이 왕이다. 심지어 서열까지 정해져 있었다. 이상기는 넘버 쓰리였다. 두 놈을 제외하곤 오십오 명 중에 세 번째였던 것이다.
상기의 주먹은 정말 쎘다. 다만 키가 작아서 일 이 위하는 놈들에게 밀린 것이다. 그 두 놈은 심지어 나이도 다섯 살이나 더 많았다.
보한은 싸움을 잘 못했다. 그래서 서열 십 오위 하는 놈에게 자주 맞았다. 그런데 상기가 보한을 돌봐주기 시작했다. 싸움도 가르쳤다.
더 이상은 서열 4위 이하 놈들에게 당하지 않았다. 1, 2위하는 놈들은 나 같은 놈을 괴롭히지 않았다. 그러다 보한은 그곳을 탈출했고 상기와의 인연은 끝났다.
내가 몸을 일으키자 함두는 자신의 패거리를 소개해줬다. 서른 명 정도의 우락부락한 사내들이었다. 그 중에 우두머리는 한양에서 알아주는 왈짜라고 했다.
그리고 함두는 무예를 가르쳐주기 시작했다. 나중에 들었지만 모든 건 그 선비의 지시였다.
함두가 있는 이 토굴은 왈짜들의 지방 훈련소 같은 것이었다. 그들은 새로운 식구가 생기면 이곳으로 보내 몸을 만들게 했고, 수시로 모여서 훈련을 했다.
왈짜들이라고 하면 조선시대 동네 깡패들로 알고 있었는데 의외였다. 그들은 보다 더 조직적이고 체계적이었다.
한 해를 그렇게 보냈다. 함두에게 무예를 배웠고 왈짜들과 대련을 수시로 해서 실력을 쌓았다. 처음엔 맞기만 했다. 무식하게 맞았다.
그러다 처음 나도 한 대 칠 수 있게 되었고, 피할 수 있게 되었으며 나중엔 더 많이 칠 수 있게 되었다. 심지어 황해도에서 제법 놀았다는 나보다 젊은 놈을 흠씬 두들겨 패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복수를 위해 무예를 배운 것이 아니었다. 김순종은 무예를 이렇게 배워서 그걸로 복수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다.
그래 맞다 이 조직을 집어 삼키기 위해서다. 그러자면 우선 이들에 대해 알아야 한다.
지함두. 그는 내가 별도로 작업을 하지 않아도 될 거 같았다. 그 선비와 어떤 사연이 있는지 모르지만 함두는 나를 너무나도 잘 챙겼다.
왈짜패. 그들 또한 나에게 호의적이었다. 지함두가 나를 대할 때 깍듯이 대하고 세세하게 챙기는 걸 보면서 그들도 나를 경계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들이 나를 손님 이상으로 생각하는 것도 아니었다.
어떻게 해야 할까?
그들의 식구가 되는 건 어렵지 않아 보인다. 그러나 내 포지션을 어떻게 잡을 것인지 확실하게 그림이 그려지지 않았다. 이건 중요한 거다. 내가 낼름 하고 삼켜버릴 수 있는 조직은 아니다. 그렇다고 밑으로 들어갈 순 없다. 함두가 나를 지극하게 대해서 그들도 격식을 차려 대하고 있지만 막상 식구가 된다고 할 땐 경계할 것이 분명하다.
여기 오기 전 상기의 조직과도 같다. 그런데다 지금의 나는 최고의 사기꾼 조보한이 아니라 봉삼이다.
언덕에 올라 왈짜패들이 서로 대련을 하고 있는 것을 보고 있는데 내 어깨에 손을 얹은 함두가 내 눈을 보며 또박또박 말했다.
‘어떤 이유인지는 모르나 분명 갚아야 할 게 있고 그러자면 힘이 필요하겠지만 저들은 아니오. 저들 모두 아주 끈끈하게 엮여 있는 건 분명하고 서로를 위해서라면 목숨도 내놓을 자들도 있겠지만 대부분은 서로의 목적에 의해 뭉쳐진 사람들일 뿐이요. 그들의 신뢰를 얻으려면 많은 시간이 필요하오. 하지만 당신에겐 그만한 시간이 없을 테지요.’
‘당신은?’
그래 맞다. 저들을 얻는 다는 건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함두는? 과연 선비의 지시는 어디까지 일까? 함두는 다른 이야기는 다 해주면서도 선비에 대해서는 말을 끔찍하게 아꼈다. 그렇다면 이렇게 돌려서 물어볼 수밖에.
함두가 뭔가 생각하며 왈짜패들을 한 참 바라보고 있다가 입을 열었다.
‘난 심심한 사람이라 당신의 복수가 재미있으면 도울 것이오. 하지만 재미없으면 바로 돌아설 테니 그리 아시오. 알겠소?’
웃음이 나왔다. 저보다 더 멋진 대답이 있을까?
‘재미는 있을 것이나, 어쩌면 목숨을 잃을 수도 있소.’
그러다 내가 웃음을 갑자기 멈추고 진지한 얼굴로 말하자 이번엔 함두가 한 참을 웃더니 대답했다.
‘이 세상 제일 부러운 놈이 누군 줄 아시오?’
‘누구요?’
‘복상사 하듯이 자기하고 싶은 거 신명나게 하다가 죽는 놈이요. 그런 놈은 임금도 부러워하지 않는다오.’
‘허나 내 복수가 그리 신명이 날까는 모르겠소.’
‘당신이랑 지내면서 보건데 만만한 허접데기는 아니던데 그런 당신을 죽음까지 내몰았다면 그 쪽도 만만치 않은 자일 것이고. 그런 자들은 또 무리를 짓는 법이니 그 무리까지 박살내려면 참 많이도 부숴야 할 터이니. 왜 신명이 안 나겠소.’
‘지금 하는 말도 그 선비랑 관계가 있소?’
웃음기가 갑자기 사라진 함두가 대답했다.
‘단 하나요. 내가 당신에게 바라는 한 가지. 그 사람은 묻으시오. 잊어버리시오. 나도 그리 하였소.’
‘그럼 아니란 말이오?’
‘좋소. 마지막으로 말하오. 이제 그 사람과 관련된 물음에는 다시는 대답하지 않을 것이오. 그는 여기까지만 하라고 했소. 당신이 움직일 수 있게 해주고 약간의 무예를 가르치라 하였소. 그리고 보내라 하였소.’
‘헌데 왜?’
‘내 목숨을 빚진 적이 있다 했잖소. 그건 정말 수이 갚을 수 없는 빚이기도 하지만 내 가장 큰 치부이기도 하오. 감추고 싶은 과거란 말이오.’
‘그럼 그 말대로 하고 다 잊어야 하잖소?’
아무런 대답 없이 그저 바라보는 함두의 얼굴을 보다가 갑자기 뭔가 머리를 턱하고 내리치는 것이 떠올랐다.
‘그 반발이란 말이오?’
그제야 다시 미소를 짓는 함두가 대답했다.
‘그렇다고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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