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 크루즈 투어] 도박사에게는 철칙이 있다.

in #kr5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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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쩍거리는 불빛을 쏟아내며 빙글빙글 돌아가는 슬롯머신, 머리를 깔끔하게 넘기고 흰셔츠에 번들거리는 조끼를 입고 능숙하게 게임을 리드하는 딜러, 게임을 하는 사람들의 판단력을 흐리게 만드는 각종 칵테일, 크루즈 내부의 카지노는 영화 속에 나오는 화려함을 그대로 가지고 있지만 사이즈는 작으며 퇴폐적인 느낌은 없다. 말하자면 카지노 체험판이라고 할 수 있겠다. 크루즈가 바다 위에서 움직일 때만 운영되는 선상 카지노에는 한몫을 잡아보려고 혈안이 된 사람보다는 대부분 심심할 때 가볍게 게임을 즐기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다. 나는 도박으로 돈을 벌어보겠다는 생각도 없고 결정적인 순간에 승부수를 띄우는 성격이 아니기에 호기심으로 10달러 정도의 작은 판돈으로 2~3번 정도 게임을 해봤을 뿐이다. 그 몇번의 베팅으로 깨달은 건 돈을 따고 잃는 것이 오르락 내리락하며 물결을 치지만 결국은 잃어야 끝이 난다는 사실 하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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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돈을 잃어야 이득을 보는 선상 카지노는 더 많은 고객을 유치하기 위해 무료 게임이나 연습 게임 등을 종종 제공하곤 한다. 간단한 룰을 알려주고 연습용 칩을 나눠주면 정해진 시간 동안 게임을 즐길 수 있는 프로그램이다. 나는 게임의 쫄깃쫄깃한 긴장감은 느끼고 싶지만 허투루 돈을 쓰고 싶지 않았기에 이런 기회를 놓치지 않고 참여하곤 했다. 룰렛, 포커, 블랙잭 등 다양한 게임을 배웠는데, 선무당이 사람 잡는다고 12명이서 두테이블로 나눠한 포커게임에서 준우승을 하기도 했었다.

"이제 그만하고 싶어요. 올인."

게임이 너무 늘어져 그만 두고 싶어 올인을 외치면 이기고 또 이기길 반복한 결과였다.

"네 옆에 행운의 여신이 있나봐."

딜러들은 내 운을 높이 샀지만 연습 게임 속 행운의 여신은 그렇게 달갑지는 않았다. 모든 카지노 게임에 흥미를 잃었을 때 난 도박사 노만을 만났다. 두바이에서 그리스로 가던 크루즈 안에서 같은 정찬 테이블에 앉았던 노만은 스코틀랜드 출신이지만 캐나다에 사는 할아버지로 딸과 함께 여행 중이었다. 노만은 내가 크루즈에서 만난 사람 중에 도박을 가장 즐겨 하는 사람이기도 했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 공연을 보러 가기 전까지 우리는 바에서 도란도란 이야기를 하며 술 한잔을 마시고 공연을 늘 함께 보러 가곤 했다. 하지만 노만만은 늘 예외였다. 그는 저녁 식사를 마치면 바로 대극장으로 달려갔는데 공연이 시작 하기 전 그 곳에서는 빙고 게임이 열리기 때문이다. 빙고가 끝나면 사람들은 공연을 보러 극장에 물결처럼 우루루 밀려 들어오고 노만은 연어처럼 그들을 거슬러가 혼자 카지노로 향했다.

“나 며칠 전에 빙고에 이겨서 돈 땄어.”
“우와??? 얼만데?”
“많지는 않아 25유로?”
“너무 적은 거 아냐? 가격은 어떻게 책정돼?”
“더 많은 사람들이 게임에 참여할 수록 우승자가 가져갈 돈이 커져.”

매일 저녁 식사에서는 다양한 화두 중 가장 핫한 이슈는 단연 노만의 도박이야기였다. 그는 빙고로 돈을 얼마를 땄고 슬롯머신으로 얼마를 벌었고 하는 이야기를 늘 자랑하듯 이야기했다. 그는 꽤나 높은 확률로 많은 돈을 카지노와 빙고로 벌어들이고 있었다. 그가 부러웠던 나는 어느 날 간절하게 물었다.

“노만, 넌 정말 도박 전문가같아. 나에게도 비법을 좀 알려주면 안돼?”
“비법은 비싼데,,, 그래 내가 도와줄게.”

의기양양한 도박사 노만은 정말 믿음직스러워 보였고 나는 그의 비법으로 돈을 벌 수 있을 것이라는 무모한 확신에 가득 차 있었다. 가장 먼저 노만과 향한 곳은 빙고게임이 벌어지는 대극장! 25개의 숫자가 적힌 종이를 돈을 주고 사고 그 숫자를 가장 먼저 지우는 사람이 이기는 게임인 빙고는 사실 비법이랄 것도 없다. 종이를 받아든 순간부터 마지막 숫자가 불리기 까지 모든 것은 '운'에 달려있다. 빙고게임 한 장에 2유로. 나는 2장을 샀고, 노만은 5+1, 10유로짜리 세트를 샀다. 부르는 번호를 놓치지 않고 지워야하기에 우리는 맨 앞자리에 앉아 숨을 죽이고 게임에 임했다. 숫자 하나 하나에 탄식과 기쁨이 교차했다. 냉탕과 온탕, 지옥과 천국을 오가는 숨막히는 10분이 지나고 나의 빙고판에는 단 두개의 숫자만 남아있었다. 와 이게 뭐라고. 두 개의 숫자를 확인하는 순간 진짜 무슨 수능 발표나 취업 발표를 기다리는 것 처럼 심장이 콩쾅콩쾅 뛰며 곤두질 치기 시작했다.

'14, 35'

나는 속으로 기도하며 나의 숫자를 간절히 외쳤다. 그후로 계속 14와 35와 닮지도 비슷하지도 않은 숫자가 몇번 더 불렸고 흥분된 목소리로 누군가 소리쳤다.

"빙고"

바로 내 옆에 앉아있는 노만이었다. 흥분되어 팔딱 뛰던 심장은 믿기지 않을 정도로 일순간 잠잠해졌고 신나서 무대로 달려가는 노만을 바라보는 내 얼굴은 경직되고 말았다. 박수를 치며 축하해 주긴 했지만 나는 내 운을 노만에 뺏긴 것같은 일종의 배신감까지 느꼈다. 그렇다한들 어쩌겠는가? 노만 덕에 우승 직전의 쫄깃쫄깃 숨막히는 긴장감을 제대로 맛본 나는 그 이후로 노만의 빙고 메이트가 되었다.

“다음에는 다른 색깔 펜을 가져와봐.”
“아무래도 5+1 세트를 사는 것이 가능성이 높아.”
“숫자를 x로 지우지 말고 동그렇게 지워봐.”

노만은 여러가지 자신의 철칙을 내게 전수해 주었고 나는 그의 가르침에 충실히 따랐지만 두개의 숫자만을 남긴 첫 날의 빙고 성적보다 좋은 적은 없었다. 빙고 운이 없다는 것을 깨달은 나는 슬롯머신으로 눈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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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롯머신에서는 진짜 돈을 따고 싶어.”
“우선 10달러를 바꿔와봐.”

10달러를 판돈으로 노만이 하라는 베팅 비율로 게임을 했다. 한 번, 두 번, 슬롯머신 손잡이를 스윙하는 횟수는 쌓여가는데 터질 기미가 없다. 777 똑같은 숫자가 나란히 멈추기를 바라며 기계를 만지며 내가 소리쳤다.

“고! 고! 고! 고!”
“안돼!! 기계를 만져도 소리를 쳐서도!”

도박사 노만에게는 철직이 있다. 슬롯머신에서 그의 철칙은 기계를 만지지 말 것, 소리를 치지 말 것, 누군가가 자신의 게임을 보지 않을 것. 이렇게 3가지의 였다. 결국 그의 철직에 따르지 못했기 때문인지 나는 10달러를 고스란히 잃었다. 그 역시 내가 뒤에서 바라보았기 때문인지 돈을 따지 못했다.

“이게 뭐야. 맨날 잃기만 하고, 나 이제 도박 안할래.”

한껏 빈정이 상한 나는 혼자 게임을 하는 노먼을 두고 정찬 테이블 멤버들과 함께 공연을 보러갔다. 노만을 제외한 우리는 길게 주르륵 앉아서 판토마임 공연을 보고 있었다. 공연이 중반쯤 흘렀을 때 누군가 내 옆에 쓰윽 앉아서 고개를 돌려보니 노만이었다. 늘 게임만 하던 노만이 공연을 보러 온 건 처음이었다.

"아하하하하, 아이고 웃겨."

무대 속 배우는 과장된 연기를 하고 있었지만 소리를 내어 웃을 정도로 웃기지는 않았다. 30분 정도의 공연에서 치아를 드러내고 깔깔거리며 웃던 노만은 공연장을 나오자 마자 우리에게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나, 오늘 100유로 땄어~."

해맑게 웃으며 자랑하는 노만의 아이 같은 모습을 보고 그제야 상황 파악이 됐다. 그러니까 노만은 슬롯머신에 돈을 딴 것을 조금이라도 빨리 자랑을 하려고 공연에 온 거였다. 또 배꼽 빠지게 웃으며 공연을 본 것도 돈을 딴 즐거움에 기분이 업 된 거였다. 인간이란 어리나 늙으나 예상치 않은 행운 앞에서는 신나진다는 자명한 진리가 눈 앞에 재생되고 있었다. 어이가 없으면서도 해맑은 노만의 웃음에 전염되어 나는 나도 모르게 함박 웃음을 짓고 말았다. 어차피 그동안 투자한 돈을 생각하면 번 것은 사실 거의 없을 것이다. 노만은 일확천금을 얻겠다는 욕망에 사로잡혔다기 보다는 순간 순간의 작은 성취와 행운에 진심으로 기뻐하기 위해 도박을 하는 사람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고작 100유로에 저런 웃음이 나올 수는 없다. 다음 번에 이어서 크루즈를 탄다면 나도 나만의 철칙을 세워서 도박을 더 해봐야겠다. 도박사가 되기는 글렀지만 노만이 보여준 그 티없이 맑고 순수함 100%의 행복한 웃음을 한번쯤 내 내면으로부터 끌어내어 웃고 싶어서 랄까? 그렇다 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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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박해서 돈 따면 정말 짜릿하겠네요ㅎ

저는 한번도 못따봤지만,,, 그 순간의 짜릿함 때문에 노만이 계속 도박을 하는거겠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