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1년에 태어난 존 르 카레는 올해로 87세다. 충분히 살아있을 만한 나이. 그런데 나는 왜 그가 죽었다고 생각했을까? 아마도 냉전의 종식이 문제였던 것 같다. 소련이 사라지고 동독이 무너지고 동유럽에 불어온 자유의 바람과 함께 스파이들은 모두 사라진 것처럼 느껴졌다. 그들을 그렸던 존 르 카레도 함께.
그래서 <모스트 원티드 맨>을 영화로 봤을 때 나는 존 르 카레의 원작을 현대식으로 재구성한 거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이 소설은 2001년에 벌어진 9.11 테러 이후의 세계를 그리고 있기 때문이다. 냉전의 소멸과 함께 사라졌을 거라 생각했던 폭력과 전쟁은 21세기의 벽두부터 화려한 시작을 알렸다. 그와 함께 이 늙은 첩보 소설의 왕도 잠에서 깨어났다.
이 책을 읽으며 나는 존 르 카레의 소설에서 줄거리가 차지하는 몫이 얼마나 큰지를 알 수 있었다. 경고하건대 이걸 영화로 먼저 본 사람이 있다면 절대 책을 읽지 말 것을 권고한다. 물론 모든 이야기들이 끝을 알고 있다고 해서 다 흥미가 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분명 떨어지는 종류가 있다. 이 책이 바로 그렇다. 존 르 카레의 첩보 소설은 007이나 본 시리즈처럼 쉴 새 없이 액션이 몰아치는 스펙터클이 아니다. 마치 방망이를 깍는 노인처럼 천천히 산더미 같은 서류를 뒤지고, 담담한 심문을 이어가고, 그렇게 거미줄에 거미줄을 엮어 마구잡이로 얽힌 실타래에 붙여 놓은 것 같은 이야기를 스르륵 풀어내는데서 나오는 쾌감과 전율이 매력인 것이다. 이 답답하고 느린 전개는 마지막 순간 엄청난 보상을 선물한다. 그런데 처음부터 상자 안에 뭐가 들어 있는지 알고 있다면 돼지같은 인내심이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언제나 그렇듯 존 르 카레의 스파이 세계는 비윤리적이고 참담하다. 스파이들이 갖춰야 할 최고의 덕목은 가장 신뢰받는 자를 포섭해 배신자로 만드는 것이다. 그들은 이 목적을 위해 처음부터 가장된 신뢰를 만들어내기도 한다. 이 신뢰를 오랫동안 관리하고 육성해 나가는 과정은 최상급 소고기를 얻기 위해 애지중지 소를 키우는 사육을 연상케 한다. 과정이 얼마나 아름답건 그 끝은 언제나 피비린내 나는 도살장이다.
9.11 이후 독일의 함부르크는 새로운 첩보전의 무대로 떠오른다. 월드 트레이드 센터로 직진한 이슬람 과격주의자들이 이방인에게 관대한 이 항구 도시에서 출발했기 때문이다. 주인공은 독일의 첩보부. 여기에 영국의 MI6, 미국의 CIA가 가담한다. 미-영 연합군은 조심성 넘치고 철저하고 옛 스파이의 정석을 토라처럼 숭앙하는 독일 첩보부와는 여러모로 대척점에 서 있다. 바흐만(독일)은 우아하고 마사(미국)는 천박하다. 바흐만은 잡은 물고기들을 살은 채로 운반하기 위해 어창에 상어를 풀어놓기를 원하고 마사는 자기 물고기를 잡아 먹는 상어의 씨를 모조리 말리려한다. 나는 이 책의 마지막 장면을 작가가 어떤 의도로 그렸는지는 알 수 없지만 거기서 취하는 미국의 태도가 오히려 바흐만 보다 인간적이라고 생각한다. 무지와 천박함, 복수심은 별수 없이 인간의 핵심이다. 미국의 행동은 근시안적이고 무지하며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초보적이지만 그것이 바로 그들의 인간성을 증명하는 것들이다. 철저히 계산된 작전, 계산된 음모가 첩보원의 미덕이 될 수는 있어도 인간성의 증거가 될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모스트 원티드 맨>이 암시하는 미국의 도덕적 타락에 의문을 제기한다. 미국은 지극히 인간적이다. 그들은 충동적이며 동시에 무분별하다. 인간이 되지 않길 원하는 건 오히려 철저한 독일인, 바흐만이다.
인간을 도덕적, 윤리적 존재로 여기는 관점은 애초에 한참이나 빗나간 생각이다. 그런 생각이야말로 오히려 상황을 악화시킨다. 위대한 인간이 윤리와 도덕을 통해 세계의 질서를 유지하리라는 생각은 사자와 톰슨가젤이 위원회를 구성해 고기 대체제를 개발하겠다는 것만큼 터무니 없다. 미국은 우리를 향해 아마 이렇게 말할 것이다.
내가 망할 거 같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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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립 셰이모어 호프만이 출연한 영화의 원작이군요... ㅎㅎ 좋아하던 배우인데
영화로라도 기회가 되면 보고싶네요!
필립 셰이모어 호프만 연기 죽입니다. 조용한 스릴러에요. 강추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