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결하고 차분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러나 기억 속의 나는 늘 수식이 많은 사람이다. 습관적으로 스스로 그리고 타인을 대함에 있어, 감정적 벽을 쌓는다. 동시에 그 보호막, 방어기제를 설명한다. 내가 한 행동과 말에 대해 누구도 오해하지 않기를 바란다. 그렇게 늘 쉼이 없이 해석해주고 말한다. 행동거지가 오해를 불러일으킬까, 누군가가 나를 곡해할까 봐 두세 번 변명을 붙인다.
초조한 마음의 빈곤이 드러나 초라해지는 것을 뒤로해도, 마멸되는 자의식에 대한 애처로움에 비할 것은 아니다. 변명은 중독적이다. 스스로 닳아지고 있음을 실감해도 재차 두세 번은 그 국면을 더 파고든다. 더 들어갈 곳이 없어 애먼 구석을 두어 번 더 치고 나서야 멈추는 것이 가능하다.
그렇게 늘 치열하게 존재를 증명한다. 상대 없는 레이스, 승자 없는 경쟁이다. 맹렬하게 존재의 정당성을 증명하고 싶었을 수도 있겠다. 혹은, 쓸모없는 사람이 바로 ‘나’이지 않을까 두려웠을 수도 있겠다. ‘오해받고 있다. 누구도 나를 모른다.’ 한껏 자기연민의 시류 속에 잠시 처연함을 즐긴다.
목적이 무엇이 되었든 행위의 의도를 파악하는 것은 실제의 삶에 악영향을 끼친다. 자기검열의 연속이다. 문제의 해답은 간단하다.
나는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 아니며, 주변 사람들에게 그것을 증명하며 살 필요가 없다는 것을 내재화하면 된다. 언제나 말로는 쉽게 이해가 된다. 그러나 말로만 이해되는 해결책은 쓸모가 없다. 변화는 쉽게 오지 않는다.
사실 누구도 타자의 발목을 붙잡고 있지 않다. 모두 자신의 얼굴에 직접 낙인을 찍고 있다. 상황을 완전히 타계해 줄 계기만을 기다리고 있음을 시인하자.
나를 변화시켜 상황을 타개할 수 없어, 마음속에서 인간 전체를 끌어내린다. 약간의 위로를 쥐여주는 것으로 단기적 타협을 타결한다. 어떤 이도 이상을 실현할 수 없다. 모두 스스로 그리고 타인에게 낙인 받은 인간이다.
우리는 항상 누군가에게 오해 받고 있다.
모두 실존적인 상을 찾지 않고 비추어진 상으로만 살아간다면 위로가 되지 않은가. 애써 생각해본다.
누구도 실제를 만날 수 없다. 내가 보는 현상은 진실하지 않는다. 그 누구도 나를 볼 수 없다. 당신의 나는 영원히 내가 아니다. 나는 당신의 세상 속에서 존재할 수 없다.
'누구도 실제를 만날 수 없다. 내가 보는 현상은 진실하지 않는다. 그 누구도 나를 볼 수 없다. 당신의 나는 영원히 내가 아니다. 나는 당신의 세상 속에서 존재할 수 없다.' 완전 공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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