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는 그 학교에 가지 못했다. 재학생 대부분이 서울 소재 대학에 진학한다던 지역의 신흥 명문이라 불리는 학교. 서울 소재의 쟁쟁한 입시 명문고들에 비할 바는 아닐지라도, 아이가 거주하는 지역에서는 내로라하는 수재들이 몰린다는 학교에 아이는 지원서를 내게 되었다.
아이가 처음부터 그 학교를 목표로 공부를 해왔던 것은 아니다. 아이는 어떤 학교도 목표로 삼지 않았다. 비록 아이가 거주하는 지역의 고교입시가 비평준화여서 경쟁 아닌 경쟁, 도전 아닌 지원을 해야 했지만, 아이에게 고교입시는 남의 이야기 같은 일뿐이었다. 왜냐하면 아이의 관심사는 오로지 푹 빠져사는 오버워치뿐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공부를 정도껏 했다. 아이는 누가 뭐라고 하지 않지만, 적어도 학생으로서의 최소한의 자기 본분 정도로 공부와 입시를 여기고, 빠지지 않을 만큼 집중해서 내신을 관리해 왔다. 그것은 아마도 게임중독자 취급을 받지 않기 위한 최소한의 자기 증명이었을 것이다. 할 건 다하고 자신이 원하는 시간을 사용하고 있다고 부모에게, 자신에게 설득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래서 아이는 성적을 유지했다. 하루에 12시간씩 게임에 집중하면서도 같은 집중력으로 시험과 내신을 관리해 온 것이다. 그래서 아이러니하게도 그 학교에 지원할 수 있는 성적을 유지할 수 있었다.
차라리 게임에만 집중했더라면, 그래서 시험이나 내신 따위 나 몰라라 했다면, 아이는 신동 프로게이머가 되었을까? 아이는 그렇게 하지는 않았다. 덕분에 게임중독자 수준의 시간 사용에 비하면 이해하기 힘든 내신을 유지하며 그 학교에 지원할 수 있는 자격을 얻게 된 것이다. 그것은 어쩌면 불필요한 것이었을지 모른다. 게임 라이프를 삶의 중심에 놓고 있는 아이로서는, 낮은 내신성적이었다면 하지 않아도 될 도전, 불필요한 기대를 걸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 학교는 인근의 다른 학교에 비해 비자발적인 자율학습을 밤 11시까지 시키는 것으로 유명하다고 한다. 이것은 게임 라이프를 지속해야 하는 아이로서는 매우 고민이 되는 지점이 아닐 수 없다. 아이의 엄마는 아이에게 어차피 대학에 가지 않아도 상관없으니 야간 자율학습쯤 안가도 그만이지 않냐고 제안하지만 아이는 엄마의 허락이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아이에게는 또래 아이들이 참여하고 있는 질서 속에서 튀어나와 드러나지게 다른 선택을 해야 하는 것이 부담스럽게 느껴지는 듯했다. 어떤 선택이든 선택에 대한 책임과 부담이 따라오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아이의 부모는 아이에게 학업 스트레스를 준 적이 없다. 오히려 공교육적 마인드를 강력하게 장착한 아이의 품성에 불만스러울 때가 더 많았다. 아이의 아빠는 아이에게 학교 가기 싫으면 언제든 때려치우고 아빠학교에 입학하라고 농을 걸곤 했다. 아이의 아빠는 마법사다. 아이가 학교에 가기 싫으면 아빠의 마법학교에 편입하면 될 일이다. 그러나 아이에게는 그런 아빠가 불안정해 보이는 듯했다. 마법사 아빠라니.. 공교육적 마인드를 장착한 바른 생활 청소년에게 그것은 매우 불안정한 일탈로 비쳐지는 듯했다. 아이는 오히려 내신관리와 공교육 라이프의 완수에 최선을 다했다.
그러나 그럼에도 이 새로운 세대의 새로운 삶의 방식인 버츄얼 라이프는 아이도 비껴가질 못했다. 그것은 어쩌면 장차 새롭게 도래할 미래교육의 표준이 될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아직까지는 모든 부모들이 싫어하는 일탈일 뿐이다. 아이는 이 두 세계의 혼란스러운 공존을 버겁고 부담스럽게 이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아이의 엄마는 이 과정에서 비롯될 아이의 건강의 문제를 들어 매우 불안한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아이는 물론 이 문제를 온몸으로 느끼고 있다. 게다가 아이의 엄마는 아이의 건강의 문제에 천착하는 듯 하나 오히려 자신과 상호작용해 주지 않는 아이의 태도가 더 불만스러운 것 같았다. 아이는 두 세계를 동시에 오가는 데 많은 부담을 느끼고 있다. 그렇지 않겠는가? 버츄얼 라이프와 리얼 라이프를 동시에 오가는 일이 어찌 피곤하지 않겠는가. 그럼에도 아이는 두 세계에 공히 구축해 가고 있는 자신의 진지를 포기할 수는 없었다. 하루 12시간을 집중할 만큼 버츄얼 라이프는 매력적이었고, 리얼 라이프가 버츄얼 라이프를 폭격하지 않도록 막아낼 수 있는 최후 방어선은 바로 내신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이의 내신은 초효율적인 성과를 내고 있었다. 집중력, 아이는 집중력을 강화해 가고 있다. 인생의 초입에 들어선 십대 소년소녀에게 장착돼야 할 가장 강력한 무기 ‘집중력’은, 리얼 라이프와 버츄얼 라이프의 경계에서 날이 바짝 선 채로 치열해져 가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아이는 그것 때문에, 어쩌면 불필요했을 도전, 지원을 하게 되었다. 그 학교 말이다. 문제의 그 학교..
집중력이 문제
그 학교의 지원 문제가 대두된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아이의 3학년 내신성적이 그 과도한(?) 버츄얼 라이프 패턴에도 떨어지지 않고 지속 유지돼 왔기 때문이다. 그 정도면 좀 떨어질 법도 한데, 그래서 엄마에게서 ‘것 봐라 게임만 하더니..’ 정도의 핀잔을 들어주어야 했을 텐데. 아이의 집중력은 두 세계의 분리 차등화를 용납하지 않았다. 버츄얼 라이프의 게임 레벨의 유지 상승만큼, 리얼 라이프의 내신 성적 또한 동격의 레벨을 유지해 온 것이다.
덕분에 아이는 선택해야 했다. 그 학교쯤, 어차피 버츄얼 라이프와 리얼 라이프의 동반성장을 유지하기 어려운 야자 생활을 강제하는 그 학교쯤, 지원할 성적이 안되어 버리면 속 편할 것을.. 아이는 딱 그 학교에 지원하지 않으면 아쉬울 만큼의 내신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합격을 보장하는 수준은 아닌..
버츄얼 라이프에서의 아이의 내신성적은 들려오는 얘기에 의하면 준프로급이라고 했다. 그래야지, 하루에 12시간을 게임에 집중하는데 그 정도 성적은 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그 소리를 들은 누구라도 아이에게 이렇게 묻기 마련이다.
‘그럴 거면 아예 프로 게이머가 되는 게 어때?’
그래, 요즘 프로게이머들 연봉이 수십억이 넘어가고, 팬덤이 수천만이라는 데.. 다가올 버츄얼 라이프의 미래상을 생각하면 부모로서도 그것은 선견지명이며 오히려 장려되어야 할 재능이 아닌가 생각이 들기 마련인 것이다. 그리고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를 일찌감치 경험한 IMF 출신 X세대 부모라면 누구라도 버츄얼 라이프에서의 내신을 과대평가하고 싶을 것이다. 그러나 프로 게이머를 권하는 부모의 진로 제안에도 아이의 답변은 냉정했다.
“아니.. 프로 게이머는 자신 없어.”
“왜? 실력이 안 될 것 같아?”
“아니, 실력이 문제가 아니라 멘탈이 문제야.”
“멘탈? 멘탈이 문제라고? 무슨 멘탈? 훈련이 어려울까봐? 레벨업을 못할 것 같아서?”
“아니 그런 게 아니라, 시합에서 졌을 때 쏟아질 팬들의 비난과 냉소를 감당해내기 어려울 것 같아.”
“멘탈.. 멘탈이라구..”
실력보다 멘탈
아이의 대답에 할 말이 없어졌다. 멘탈이라니.. 아이에게 프로 게이머로서의 자신의 진로는 가상이 아니라 현실이었다. 그리고 그 현실의 가장 치명적인 지점인 멘탈 싸움에서 아이는 먼저 손을 들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어른으로서, 부모로서, 아이에게 강제할 수 없는 일이기도 하다. 멘탈이라니.. 누구나 성공을 꿈꾸지만 누구도 성공 이후의 자신의 멘탈에 대해 생각해 보지 않는다. 그것은 그냥 뭔지도 모르고 눈 떠보니 스타가 되었다가, 눈 감으니 바닥에 추락해 있는 자신의 너덜너덜해진 영혼을 목격해야 하는 이 시대 우상들의 암묵지인 것이다. 그것을 상상하고 도전하는 이들은 없다. 아니 설사 그렇더라도 해보고 싶은 것, 도달해 보고 싶은 것이다. 그것은 그냥 아무래도 좋은 무엇일 뿐이다. 다만 어쨌든 성공하면 그뿐인.. 그러나 반드시 따라올 처절한 대가..
아이는 그 지점에서 망설이고 있었다. 그것은 리얼 라이프에서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 학교에 지원하는 일. 합격하면 좋겠지만, 자신도 어쨌든 어깨가 으쓱한 일이겠지만, 이후의 갑갑한 야자 생활과 예측이 가능한 살벌한 면학 분위기는 아이의 멘탈을 흔들어 놓을 것이었다. 그럼에도 지원이 가능한 아이의 성적을 두고 다른 선택을 하기는 쉽지 않은 일이었다. 고민이 되는 일이었다.
부모로서 아이에게 그 학교의 지원을 만류할 이유는 없었다. 아이가 어떤 레벨의 대학을 가게 될지, 대학에는 가게 될는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아이에게는 상위권 학생들과 친구가 될 수 있는 자연스러운 기회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어쨌든 세상이 조까튼 학벌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는 것은 무시할 수 없는 현실이니 말이다. (버츄얼 라이프가 리얼 라이프를 폭격하기 전에는 말이다.) 대학은 안 가도 좋으니, 고교 동창들만큼은 상위권 대학에 진학할 아이들과 자연스레 관계를 형성할 수 있다면, 성적이 된다는데 굳이 마다할 이유도 없는 것이다. 그런 왠지 속물적으로(?) 보이는 제안을 아이에게 부모의 의견으로 제시하였으나 아이는 솔깃할 뿐이었다. 우린들 언제는 부모 말이 귀에 들린 적이 있던가.
그러나 아이는 그 학교에 지원을 하고 말았다. 지원이 가능한 성적도 성적이지만, 공교롭게도 입시를 앞두고 그 학교 바로 앞으로 이사를 가게 된 것이다. 걸어서 3분 거리의 학교 위치는, 아침잠이 많은 (밤새 게임하시느라) 아이에게는 치명적이며 결정적인 지원 동기를 제공해 주었다. 그리고 아이는 그 학교에 합격하지 못했다.
줄넘기 때문에
0.3점 차이였다고.. 담임선생님이 비보를 알려 왔다. 0.3점 차이로 떨어졌다고 말이다. 0.3점.. 국영수에서 0.3점 차이가 났더라도 아쉬울 일이다. 그러나 그 0.3점이 체육 점수 때문이었다면.. 게다가 줄넘기 점수 때문이었다면.. 그것은 아쉬운 일인가, 땅을 치며 곡을 할 일인가, 다행이다 다행이다를 외쳐야 할 일인가?
다른 과목의 점수들이 모두 A등급이었던 반면 아이의 체육 점수는 76점이었다. 게다가 그것을 좌지우지한 평가가 줄넘기였다. 줄넘기.. 쌩쌩이.. 요즘 중학생들은 체육 평가를 줄넘기로 하는가? 아이의 학교는 줄넘기 지정 시범학교라도 된단 말인가? 줄넘기, 줄넘기라니.. 줄넘기 한 번을 더 넘고 못 넘고 가 아이의 진로를 결정해 버렸다. (물론 정권마다 바꿔대는 입시정책도 한몫했다. 아이의 동급생들에게 해당하는 이 정권의 새로운 입시정책은 인근 외고들을 미달로 만들어 버린 채 이 학교로 지원이 몰리게 만들었다. 운 따라가는 대학입시에 인생을 내맡겨야 한다면 버츄얼 라이프보다 나은 것이 뭔가?)
아이의 불합격이 줄넘기 때문이었다는 얘기를 듣자마자, 아이의 초등학교 시절의 장면들이 머릿속을 스쳤다. 아이는 초등학교 시절에도 유난히 줄넘기를 하지 못했다. 그래서 저녁이면 아이를 데리고 운동장에 나가 줄넘기를 시켜 보곤 했던 기억이 있다. 당시에는 좀처럼 줄넘기가 늘지 않는 아이가 답답하기도 하고, 옆에서 지켜보고 있으면 더 못할 것 같아 그냥 혼자 연습하게 놓아두고는 했다. 그러나 아이는 잘되지 않는 줄넘기에 열심을 보이진 않았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보고 있노라면 언제가 왠지 줄넘기가 아이의 인생에 발목을 잡을 듯한 느낌을 느끼고는 했다. 그런데 그것이 현실이 된 것이다. 줄넘기가 아이의 진로를 방해하다니..
부모로서는 속이 쓰릴 일이다. 다른 것도 아닌 줄넘기 때문에 그 학교에 가지 못하게 된 것 말이다. 그것은 자책할 만한 일이다. 그때 좀 붙들고 어쨌든 줄넘기를 하게 했더라면 이런 일은 없지 않았을까 하는 자책 말이다. 그걸 하게 되었다. 아이의 엄마도 아이의 아빠도 말이다. 대학쯤 안 가도 그만이라고 큰소리치던 그들도 말이다. 그런 것이다. 어쨌든 도전은 한 것이고 결과가 불합격이었으니, 아쉬운 것이 인지상정이다. 결과는 아무래도 상관없다며 쿨한 척했더라도 말이다.
그러나 진정 아쉬운 지점은 이것이다. 누구도 간절하지 않았다는 것 말이다. 아이는 그 학교에 간절하지 않았다. 아이의 부모도 그 학교에 간절하지 않았다. 아이는 버츄얼 라이프를 즐기고는 있지만 그것이 자신의 진로가 되는 일에 망설이고 있다. 그것 또한 아직 간절하지 않다. 아이의 진로와 관련된 모든 선택에 아직 누구도 간절하지 않다. 그것이 그 학교에 가지 못한 진짜 이유인 것이다.
간절함은 내가 원한다고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 간절함은 운명이고 나를 강제하는 것이다. 벗어날 수 없는 것이고 사로잡히는 것이다. 간절해야 한다고, 그래야 이룰 수 있다고 모든 가르침이 천편일률적으로 말하고 있지만, 갑자기 간절해질 수는 없는 노릇이다. 먹고 싶지도 않은 1등급 스테이크를 갑자기 간절하게 바랄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것이 나를 찾아올 수는 있어도 내가 스스로 찾아갈 수는 없는 것이다. 간절함을 가지라고 하지만 간절함이 나를 가질 수 있을 뿐이다.
아이는 버츄얼 라이프에 간절하다. 아이는 모든 시간을 확보해서 버츄얼 라이프에 접속되려고 한다. 여행조차 버츄얼 라이프에 방해를 받을까 숙박을 주저하는 지경에 이르러 있다. 그것을 누가 뭐라 하겠는가? 그곳에 성장이 있고 함께 하는 전우들이 있다. 그들과의 약속이 있고 자신의 등급 레벨업의 과제들이 남아 있다. 자신이 잠든 시간에도 버츄얼 라이프는 현존하며 진격하고 있고, 자신의 삶에 크게 자리해 버린 이 공간은 무시한다고 사라지지도 않는 것이다.
그 간절함이 아이에게 준프로급의 레벨을 선사해 주었다. 그 간절함이 아이의 12시간을 지배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이는 그 지점에서 앞으로 나아가길 주저하고 있다. 그것은 대가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너의 영혼, 너의 멘탈.. 프로 게이머로 나아가는 선택에는 그것을 교환해야 하는 거래가 놓여 있다. 아이는 그 지점에서 망설이고 있는 것이다. 리얼 라이프의 그것 또한 마찬가지이다. 아이가 그 학교의 합격에 간절했더라면 줄넘기 따위로 합격을 놓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하루에 12시간쯤 줄넘기를 해댔을지도 모른다. 아니 아이는 그렇게 했을 것이다. 간절했다면 말이다.
하지만 아이는 자신을 추동해 온 버츄얼 라이프와 리얼 라이프의 간절함에서 한 걸음 뒤로 물러나 있다. 멘탈, 멘탈 때문이다. 영혼을 팔만큼 간절한지… 프로 게이머로서의 자신의 미래상을 그려 볼 만큼 간절한지.. 명문 대학 입시에 영혼을 팔만큼 대학에 간절한지.. 무엇에도 아직 확신이 없기 때문이다.
SKY 캐슬에는 누가 사는가?
아이의 입시 과정과 오버랩되며 <SKY 캐슬>이라는 드라마가 장안의 화제가 되었다. 현실을 얼마나 반영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이 드라마가 탁월한 지점은 등장인물의 대부분이 시청자를 설득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들은 괴물처럼 그려지고 악의 화신 내지는 욕망의 노예처럼 보이나 모두 간절하다. 그리고 그 간절함을 외면하고 있지 않다. 그래서 시청자들을 한 명 한 명 모두 설득하려고 하고 있다. 그 지점에서 이 드라마는 매우 지독하다. 누구도 그냥 나쁜 놈하고 내칠 수 없는 사연들을 한아름 가지고 자신의 간절함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설득되지 않더라도 간절함 만큼은 혀를 내두를 만하다. 그래서 그들은 그 간절함으로 SKY 캐슬을 짓고 달려가고 있었다. 누군가는 실패하고 누군가는 인생을 망친 것처럼 그려졌지만, 극한까지 다다른 그들은 구원을 얻었고 모두 현실이 아닌 자신의 진짜 삶에 한 걸음 다가서고 있었다.
간절함은 우리를 언제든 찾아온다. 그것은 모든 태어난 이들의 운명이고 거부할 수 없는 삶의 국면이다. 그것이 발동되는 지점에서 자신의 꿈과 연결시킬 수 있다면 강력한 추동력을 얻게 될 것이다. 그러나 치열하지 않은 채로 방관하는 자들에게는 다른 이의 간절함이 그들의 인생을 덮치게 마련인 것이다. 드라마에서 SKY 캐슬에 입성했으면서도 방관자처럼 한 발 빼고 있던 우주와 그의 아버지 황교수는 그러다 타인의 간절함의 습격을 당하고 말았다. 덕분에 우주는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감옥생활을 해야 했고, 황교수는 그런 아들을 구하려고 비웃으며 바라보던 SKY 캐슬의 난장판에 뛰어들어 읍소를 해야 했다.
간절함은 선악과 윤리와 비도덕의 경계 따위를 아랑곳하지 않는다. 그것은 언제든, 어느 때든, 우리의 성정을 가리지 않고 습격하고 들어와 우리의 모든 것을 점령한다. 그러나 그것을 다루는 사람은 어느 때든 그것을 타고 올라 자신이 원하는 삶을 경주해 낼 수 있다. 그것에 점령당하지 않고, 기다리고 기다리다 그것의 등에 올라탄 이는 반드시 그것을 정복해 내고 마는 것이다. 그래서 한없이 간절했던 예서는 결국 검정고시를 봐서라도 서울대에 가고 말 것이다.
여기 한없이 간절했던 한 청춘이 있다. 4할대 타자, 전국대회 2관왕의 주역이었던 이 청춘은 촉망받던 고교 야구선수였다. 그러나 실력 만큼 정의로웠던 그는 아마야구계 입시비리를 폭로한 덕분에 업계에 미움을 사, 모든 대학 야구부로부터 보이콧을 당하고 말았다. 그는 야구를 계속해야 했다. 야구를 그만 둘 수는 없었다. 이 청춘이 할 수 있는 선택은 자신을 받아 주는 야구부를 가진 유일한 대학에 입학하는 것이었다. 입시비리에서 벗어나 있는, 야구부로서는 아마 수준에 불과한 서울대 야구부에 들어가는 것이 그의 유일한 선택지였다. 그리고 그는 삼수 끝에, 아니 삼수 만에 서울대에 합격하고 말았다.
“용기라기보다는 내가 다시 야구를 하는 방법이 서울대 입학뿐이었다. 지난해에도 서울대에 원서를 넣고, 다른 사립대를 지원했는데 모두 떨어졌다. 특기자로 선수를 선발하는 대학에는 내가 정상적인 방법으로 갈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올해는 서울대만 지원했다. 작년에 재수를 마음먹게 됐을 때는 ‘나를 무너뜨린 사람들에게 공부로도 대학을 갈 수 있다’는 점을 보여주고 싶었다. 그게 목표가 됐고, 절박했기 때문에 더욱 집중할 수 있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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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긴장을 해서 시험지가 땀에 젖을 정도였다던 청춘은, 공부하는 게 익숙지 않아 1시간마다 자리에서 일어나야 했다고 말했다. 간절함에 사로잡힌 이 청춘은 유출한 시험문제지로 공부하지 않았어도 그들이 원하는 S대에 합격할 수 있었다. 그러나 시험문제를 유출해서라도 S대에 합격하려고 했던 드라마 속 그들의 간절함 또한, 파멸의 과정을 거쳐야 했을지언정 결국 자신과 자신의 가족들을 구원하게 하는 것이다. 간절함은 결국 극단에서 모두 만나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SKY 캐슬은 무엇에든 간절한 이들이 사는 성이다. 그들의 성에는 간절한 자들만이 들어올 수 있다. 그래서 부모 자식이 재산을 놓고 고소고발을 하며, 아이의 입시에 부정과 비리를 가리지 않고 온 인생을 걸고, 그런 부모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옥상에서 떨어져 내리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간절한 아이들이 그곳에서 치열하게 하루하루를 살아내고 있다. 그리고 그런 이들이 세상의 주도권을 쥐고 우리의 삶을 매일 좌지우지하고 있다. 그러나 간절하지 않은 이들은 그들의 뒤에서 노예의 도덕으로 자신을 세뇌한 채 비현실적인 선악 논리로 자신을 합리화하며, 도전하는 이들의 발목을 잡아채는 일에만 혈안이 되어있다. 그들의 자리는 리얼 라이프에도, 버츄얼 라이프에도, 그 어느 곳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저 하루하루를 자기 안위와 무력한 냉소 속에 방치하고 있는 것이다. 자신이 잘 되기 보다 남이 잘 못되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말이다.
아이는 줄넘기 때문에 그 학교에 가지 못했다. 그러나 아이는 줄넘기 덕분에 그 학교에 다니지 않을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이 아이의 인생에 어떤 영향을 줄지는 아직 알 수 없다. 그것은 장차 아이의 삶을 점령하게 될 간절함의 방향이 평가해 줄 것이다. 하지만 아버지가 아닌 마법사로서, 아이는 SKY 캐슬에 입성할 자질을 갖추었다고 평가하고 싶다. 간절하지 않은 사람이 무엇에 12시간씩 집중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아이는 아직 버츄얼 라이프와 리얼 라이프, 그 어느 곳의 SKY 캐슬에도 발을 들여놓지 않았다. 성인이 되기에는 아직 시간이 남았고, 선택을 위한 준비는 공히 밸런스를 맞추며 끌어오고 있다. 그러니 언젠가 아이의 삶을 사로잡을 꿈이 아이에게 밀려오게 되거든, 아이는 간절함을 집중력으로 전환시켜 가뿐하게 SKY 캐슬을 뛰어넘게 될 것이다. 삼수 만에 S대에 합격한 그 야구선수처럼 말이다. 승리와 패배의 일희일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멘탈을 지켜내는 프로 게이머들처럼 말이다. 그리고 부모가 뭐라거나 말거나 하루에 12시간씩 저 좋아하는 일을 해내는 아이 자신으로서 말이다.
[INTRO]
마법사입니다. 그렇다구요.
마법의 열차는 불시 도착, 정시 발차
I like this dram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