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1일 맥아더는 트루먼 대통령이 비준한 38선 북진군사행동에 관한 지령에 의해 한국군이 우선 38선을 넘을 것을 명령했다.
(이점은 이승만대통령이 독단으로 38선을 돌파했다는 내용과 조금 차이가 있다.)
미군은 10월 7일 38선을 넘어 국경선을 향해 진격했다.
10월 15일 트루먼은 한국전쟁 최종단계의 전략문제와 중국의 출병문제를 검토하기 위해 태평양 중부의 ‘웨이크’섬에서 맥아더와 회담을 했다.
맥아더는 중국의 참전 가능성이 적으며 전쟁을 추수감사절 이전에 끝낼 수 있다고 주장했다.
중국은 그 이후 미공군이 동북변경지역의 도시와 농촌을 지속적으로 폭격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점에 대해서는 확인이 필요하다고 하겠다(9)
당시 중국의 상황은 매우 어려웠다. 혁명에서 승리한지 1년밖에 지나지 않아 오랜 기간 전쟁으로 인한 참상이 회복되지 않았다.
도시는 3-4백만의 직공및 지식인들이 실업중이었고 농촌에서는 3-4천만명의 농민이 수해와 가뭄의 피해를 입었다. 신해방구의 토지개혁은 진행중이었고 각지역에 산재해 있는 국민군의 토벌작전도 진행중이었다.
육군은 약 5백만명에 달했으나 장비는 낙후되었고 해군과 공군은 초기단계였다.
중국은 이런 상황에서 미국과 전쟁을 수행하는 문제는 정치적, 군사적으로 중대한 전략선택상 난제라고 평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