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무엇을 위한 납치인가
18년 동안 감금생활을 당해야 했던 나타샤 캄푸쉬의 실종사건을 영화화한 작품입니다.
영화를 통해서 나타샤가 3096일 동안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되짚어 볼 수 있습니다.
나타샤는 10살의 평범한 여자아이였습니다. 납치 전날 나타샤는 술집에서 카드놀이를 하며 시간을 보내는 아버지 옆에서 시간을 보내다가 늦잠을 잡니다. 아침에 일어나지 못하는 나타샤를 본 엄마는 아빠를 탓합니다. 아빠가 딸을 데리고 술집에 간 것에 대해서 비난하는 엄마에게 나타샤는 술집에 가지 않았다고 신경질을 냅니다. 화가 난 엄마는 뺨을 때려버리고 곧바로 사과하지만 나타샤는 인상 쓴 채로 학교로 가버립니다.
학교가던 길목에, 하얀색 밴을 탄 어떤 남자가 나타샤를 때려서 기절 시킨 후, 어디론가로 데려가 버립니다. 나타샤는 평범하고 통통한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여자아이였습니다. 경찰이 조사를 하지만 납치가 이루어진 전후 맥락이 없었습니다.
그가 길목에서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에서 한 가지를 생각해볼 수 있게 해줍니다. 이전부터 나타샤를 관찰해오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나타샤가 주로 다니는 길에 대해서 알고 있었기 때문에 미리 잠복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스토커처럼 사전 관찰을 하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이러한 관음 충동은 은밀하게 이루어집니다. 다른 사람에게 들켜서는 안된다는 조건이 들러붙어 있지요.
그는 복잡한 구조를 가지고 있는 지하 밀실에 나타샤를 감금한 후, 먹을 것을 주고 잠자리를 마련해줍니다. 우리가 상상하는 납치범의 모습과는 다릅니다. 납치가 실시되게 되면 빠른 시간 안에 인질을 찾아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상황이 더 나빠질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납치의 경우, 대부분 몸값이나 특정한 조건을 요구하게 됩니다. 그런데 나타샤의 납치에서는 범인의 접근조차 없습니다. 납치 이후에 그는 먹을 것을 주고 잠을 잘 수 있는 자리를 마련 해주며 심지어 책까지 읽어줍니다. 어떻게 보면 양육하는 것을 작정한 것 같습니다. 흔히 생각할 수 있는 납치범의 태도는 아닙니다. 도무지 그의 납치 의도를 알 수가 없습니다. 납치범에게 나타샤가 성적 대상으로서의 어린아이가 아니라고 한다면 그의 납치 의도는 과연 무엇일까요?
볼프강은 나타샤의 머리도 감겨줍니다. 나타샤는 집에 가고 싶다고 떼를 쓰지만 볼프강은 부모가 몸값도 지불하지 않는다고 둘러댑니다. 그는 위층에서도 나타샤와 이야기할 수 있도록 통화장치를 설치합니다. 통화장치로 '복종해'라는 말을 반복적으로 나타샤에게 들려줍니다. 그는 무엇 때문에 나타샤에게 그렇게 하는 것일까요?
볼프강과 나타샤의 대화를 들어보면 나타샤 또래의 아이들이 하는 이야기가 비슷하게 들립니다. 그들의 대화가 정신세계를 나타낸다면 볼프강의 정신적 성숙에 대해서 의문을 가져볼 수가 있습니다. 그가 어머니의 과잉보호 아래 자랐다고 한다면 그가 마마보이일 가능성에 대해서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마마보이라는 말이 가진 의미는 주체적으로 행동하지 못하고 어머니에게 의존하는 남잡니다. 아이가 잘 하지 못하니까 엄마가 그 모든 것을 대신해주고자 하는 양육태도에서 비롯됩니다 비슷한 말로 헬리콥터 엄마라는 말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양육 태도는 건강하지 않습니다. 어린아이들이 성장과정에서 주변의 일을 하면서 동시에 발달이 이루어집니다. 그런데 부모가 먼저 그 일을 해주게 되면 아이의 자아가 할 일이 없어져 결국은 발달의 기회를 놓쳐버리게 되는 버립니다.
안나 프로이트는 아동이 사회에 적응하는 교육방식에 대해서 3가지를 지적합니다. 첫째는 아동의 자아에 따르는 것, 두 번째는 아동의 자아를 변화시키는 것, 세 번째는 아동의 자아에 따라 환경을 바꾸어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중 최악의 방식은 바로 세 번 째입니다. 이유는 아동이 자신의 역할을 할 수 없게 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몸은 성장하지만 정신은 아동의 수준에 머물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양육태도는 병리적인 결과를 초래할 수 있습니다.
그는 나타샤에게 복종하라는 메시지를 자꾸만 전달합니다. 무엇을 위해서 복종시키고자 하는 것일까요? 볼프강의 태도는 나타샤를 인격체로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물건을 대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나타샤의 납치와 비슷한 어떤 사건을 하나 떠올려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이 듭니다. 1911년 8월 21일 프랑스 파리 루브르 박물관에서 일어난 '모나리자 도난사건'입니다. 모나리자 도난 사건은 나타샤의 납치 사건과 묘하게 일치하는 구석들이 있습니다. 모나리자가 도난 되고 나서 기자회견도 열리기도 했습니다. 뉴스도 방송되고 심지어 생필품에도 모나리자가 프린트되어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국내의 실종사건에서도 이와 같은 경우가 적용된 적이 있습니다. 모나리자는 결국 2년 후에 이탈리아의 미술상 알프레도 콜리에게 사라진 모나리자를 팔기 원한다는 전화가 와서야 실마리를 잡아서 범인을 잡을 수 있었습니다. 범인은 루브르 박물관의 페인트 공 빈첸초 페루지아 였었습니다. 페루지아는 2년간 모나리자를 자신의 집 지하실에 숨겨놓고 가만히 감상한 것뿐입니다.
볼프강에게 나타샤가 보통 여자아이가 아닌 미학적인 대상으로서의 가치를 가지고 있다고 가정할 수 있다면 페루지아가 모나리자를 2년간 감상했던 일과 동등하게 볼 수 있습니다. 둘 다 '사람'을 대상으로 한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2] 미학적 대상에서 노예로
납치된 지 1695일째, 나타샤는 첫 생리를 하게 됩니다. 볼프강은 나타샤에게 수선해야 할 옷을 맡기려고 밀실에 방문했다가 생리가 나왔다는 사실에 "벌써?"라면서 당황하며 더럽다는 말을 내뱉습니다.
생리에 대한 심리학적 접근을 어떤 식으로 해야 할까요? 생리가 일어났다는 것은 2차 성징의 본격적인 시작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소녀의 신체에서 여성의 신체로 변화가 시작되었다는 점은 어떤 담보된 변화가 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어린아이의 논리에서 성인의 논리로 발달하게 되는 전환점이기도 합니다. 사춘기는 자연스러운 생물학적 변화 이외의 정신적인 변화가 더불어서 일어납니다.
볼프강은 무엇 때문에 나타샤에게 더럽다는 말을 하는 것일까요? 성적인 것들과 관련된 것들을 '더럽다'고 여기는 경우들에 대해서 생각을 해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성에 대한 혐오스러운 느낌들을 그리 어렵지 않게 접할 수 있습니다. 구토감으로 나타나는 경우도 있습니다. 오래전 어린이 만화에서도 여성의 나체를 보거나 유혹하는 모습을 보였을 때, 상대방이 구토를 하는 묘사를 익히 볼 수 있었던 적이 있습니다. 아이들의 입장에서는 성적인 것이 '더러운 것'과 관련이 되어 있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나타샤는 위층에 올라가서 샤워를 해야 한다고 요구합니다. 그런데 샤워를 하는 곳에도 볼프강은 함께 있으려 합니다. 물론 나타샤에 대한 감시의 차원도 있습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볼프강의 보고자 하는 욕망입니다. 신기한 것에 대해서 어린아이처럼 확인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어린아이에서 여성의 신체를 가지게 된 나타샤가 신기한 것입니다.
볼프강의 어머니는 여자에 관심이 없는 아들이 동성애자가 아닌가 의심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옷에 묻어있는 나타샤의 금발을 통해 여자를 만나고 있음을 섣불리 추측하고 기뻐합니다. 어머니의 반응에 당황한 볼프강은 나타샤의 머리카락이 자신에게 붙지 않도록 머리를 삭발시켜 버립니다.
나타샤가 볼프강의 이름을 알게 된 것은 납치된 지 1837일 째입니다. 몇 년간 나타샤는 볼프강에게 미학적 가치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나타냐는 ‘감상’이 주 목적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생리 이후에는 가치가 점점 떨어졌습니다.
크리스마스가 되어 나타샤는 볼프강에게 크리스마스 선물을 줍니다. 문 밖에 나갈 수 없는 나타샤는 어떻게 선물을 줄 수 있는 것일까요? 볼프강이 사전에 계획해 놓은 시나리오였습니다. 볼프강은 나타샤에게 가족은 자신밖에 없으며 예전 가족들은 다 죽었다고 강조합니다. 볼프강은 나타샤의 이름을 바꾸고자 합니다. 이전의 이름을 부르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둘은 '비비아나'라는 이름을 결정하게 됩니다. 그제야 볼프강은 자신의 이름을 알려줍니다.
모나리자는 아무도 모르게 도난당함으로 인해 화제가 되었습니다. 나타샤 역시도 마찬가집니다. 어느 날 홀연히 사라진 소녀. 모나리자의 이미지가 겹칠 수 있습니다. 공통점은 ‘사라짐’으로 인해서 오히려 부각되는 효과가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사회에서 나타샤 캄푸쉬라는 이름은 ‘실종’의 대명사가 되었습니다. 볼프강의 이름 붙이기 작업은 나타샤에게 비비아나라는 인격을 부여한 것입니다. 볼프강은 나타샤를 자기 뜻대로 개조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인격이 부여되자 현실에서 일을 하는 입장으로 바뀌어 새로운 방을 꾸미는 공사를 동원됩니다. 방을 꾸며서 여자친구라도 데리고 올 것이냐는 나타샤의 질문에 그는 분노합니다. 그날 밤 새로 꾸민 방에서 두 사람은 팔을 묶은 채 같이 잠을 잡니다.
나타샤의 질문은 볼프강의 어떤 부분을 건드렸던 것일까요? 더욱이 여자를 데리고 온다는 말에 분노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 점을 탐구하기 위해 이후에 일어나는 볼프강의 스키장 사건을 들여다보아야 합니다.
그는 스키장에 여행을 가려고 합니다. 나타샤도 함께 가고 싶다고 하지만 '말을 잘 들으면' 그렇게 해준다고 말하고 혼자서 떠나 버립니다. 그날밤, 나이트클럽에서 춤을 추는데 어떤 아가씨가 볼프강을 적극적으로 유혹합니다. 그런데 볼프강의 상태가 이상합니다. 그는 두려워합니다. 그리고 도망치듯 집으로 돌아와서 잠든 나타샤를 깨워 위층에 데리고 올라가서 강간합니다.
그는 유혹을 두려워하는 것일까요? 앞서 볼프강의 정신세계가 성숙하지 않았다는 가설을 세웠었습니다. 세워둔 가설에 따른다면 그는 어머니에게서 아직 분리되지 않은 것입니다. 성인 여성의 유혹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이라고 보아야 할까요? 장기적으로 보았을 때 볼프강이 어머니로부터 분리되는 '결혼'을 전제할 수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 볼프강은 그런 독립에 아직 심리적 준비가 되지 않은 것입니다. 어머니에게 고착되어 있는 그의 정신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을까요? 현실에서 유혹당한 사건으로 인해서 발생한 강렬한 흥분으로 인해 두려움을 느껴야 했습니다.
그는 도망치듯 집으로 돌아와야 했습니다. 그러나 강렬했던 유혹의 여파는 볼프강의 정신에 해소되지 않은 잔여 흥분을 남겼습니다. 따라서 그는 나타샤를 통해 남은 흥분을 해소하고자 한 것입니다. 새로운 이름을 결정했던 순간부터 나타샤의 미학적 가치가 점점 떨어졌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미학적 가치를 가진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영양상태를 최소화시켜서 신체 발육을 늦춰야만 했었습니다. 따라서 그는 나타샤를 굶겼습니다. 그러나 생각보다 빨리 찾아온 이차성징은 미학적 가치를 떨어뜨렸습니다. 그가 이름을 다시 붙였을 때부터는 노동력을 가진 ‘노예’가 된 것입니다. 강간 사건은 나타샤의 지위를 완전히 격하시키는 사건이었습니다. 그때부터는 노예로서의 가치만을 가지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3] 무엇을 위한 승리인가?
2029일째, 이제 나타샤는 요리도 하고 가사도 합니다. 볼프강은 자신의 어머니와 비교하면서 일일이 간섭을 합니다. 그는 쉬지 않고 지시합니다. 나타샤에게 집안에서는 팬티도 입지 말라는 지시를 합니다. 식사시간에도 방석 대신 전단지를 깔고 앉으라고 합니다. 자기 지시대로 하지 않으면 음식도 먹지 못하게 합니다. 억지로 먹으려고 하면 폭력적인 방식으로 음식을 삼키지 못하게 만듭니다.
나타샤를 현실적인 노예처럼 부립니다. 본격적으로 집안일을 해야 하고 그의 말에 억지로 순종해야 하는 상황이 된 것입니다. 그의 지시는 '본다'는 관음증적인 즐김과 연관되기도 합니다. 이미 나타샤의 첫 생리 이후의 목욕탕 사건에서도 나타났던 것입니다. 그의 음식 섭취 방해는 초반에는 나타샤의 신체발달을 억제할 목적을 가지고 있었지만 후반부에 들어서는 노예에게 벌을 내리는 의미를 가지게 됩니다. 식사를 하지 못하는 고통을 감당하게 만들어 자신의 지시를 따르게 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일종의 고문입니다. 그러나 그의 기대와는 다르게 나타샤에게서는 볼프강에 대한 저항의 움직임이 시작됩니다.
어느 날, 수도가 고장 나는 일이 발생합니다. 그는 수도관 수리를 지시합니다. 나타샤가 있기 때문에 집에 아무도 부를 수가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 그 이유입니다. 나타샤가 수도관으로 내려가자 볼프강이 장난삼아 수도관 뚜껑을 덮어버립니다. 볼프강의 행동에 나타샤는 경악하게 됩니다. 겁에 질린 나타샤는 수도관에서 올라옵니다. 그리고 재밌다는 듯 웃는 볼프강의 뺨을 때립니다. 이후, 볼프강에 대한 저항의 움직임이 시작됩니다.
볼프강과 나타샤는 옷을 사기 위해서 함께 외출을 합니다. 그때, 볼프강은 누구나 총으로 죽일 수 있다고 그녀를 위협합니다. 그러나 나타샤는 그 말에 대해서 아랑곳하지 않고 바깥 풍경을 보면서 생각에 잠깁니다. 그리고 볼프강과 페인트를 구입하러 가는데 도망칠 기회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기회를 놓쳐버리고 맙니다. 돌아와서 그녀는 스스로를 자책합니다.
이 상황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실제 나타샤 캄푸쉬의 기자회견에서 '스톡홀름 증후군'이 아니었냐고 질문한 기자가 있었습니다. 나타샤가 볼프강을 사랑하게 된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그녀는 이 의견에 대해서 부인했습니다. 스톡홀름 증후군이라고 한다면 상호성의 흔적들이 나타나야 합니다. 서로 주고받는 것이 나타나야 합니다. 그런데 볼프강과 나타샤 사이에는 그런 상호성이 없습니다. 볼프강은 일방적으로 나타샤를 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나타샤와 볼프강의 관계에서는 상호성이 배제됩니다. .
충동과 욕망의 성향에 대해서 알아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충동과 욕망은 일방적입니다. 상호성을 가지지 않습니다. 짝사랑하는 아가씨에게 일방적으로 선물을 보내는 것을 생각해봅시다. 이때는 충동적입니다. 거절하게 되면 좌절이 일어납니다. 그런데 욕망의 경우에는 좀 다릅니다. 안 할 수 없습니다. 거절한다고 하더라도 끝까지 보냅니다. 이 ‘욕망’과 관련해서 우리는 흔히 이야기하는 ‘이별살인’이라는 단어를 한번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어떤 커플이 헤어지게 될 때, 그 이별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상대방을 살해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여기에는 욕망의 이기적인 특성이 관계됩니다.
2175일째, 볼프강은 나타샤를 비비라고 부릅니다. 나타샤가 일해서 꾸며놓은 방을 어머니에게 보여줍니다. 그리고 어머니에게 애교도 부립니다. 볼프강에게도 어떤 변화가 일어난 것 같습니다. 짝을 찾아야 한다는 어머니에 말에 볼프강이 긍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볼프강은 '아프로디테'라는 가구 세트가 왔다고 나타샤를 부릅니다. 볼프강은 멋지게 꾸민 방에 대해서 구구절절 설명을 합니다. 나타샤는 호응해주지만 뒤돌아서서 "모를 리가 있나. 내가 깔았는데."라고 볼프강의 태도를 비아냥 거립니다.
그런데 그날 밤은 볼프강이 정한 나타샤와의 결혼 첫날밤입니다. 한껏 분위기를 잡으려는 볼프강에게 나타샤는 거부 반응을 보입니다. 그러나 볼프강은 "넌 내꺼니까 내 맘대로 할거야!"라고 나타샤를 강간합니다. 강압적으로 꾸며진 첫날밤이 끝나고, 나타샤는 왜 하필 자신이었는지에 대해서 물어봅니다. 그의 답변은 의외로 단순했습니다. "웃는 게 예뻐서"라는 것이 그 이유입니다. 그리고 그가 얼마나 철저하게 준비를 했는지 말해줍니다.
웃는 게 예쁘다는 말에서 우리는 모나리자의 도난 사건과 연관성을 다시 떠 올려볼 수 있는 것입니다. 페루지아는 예술품을 대상으로 저지른 ‘절도’였으나 볼프강은 아동을 대상으로 저지른 ‘납치’라는 점이 다를 뿐입니다.
볼프강은 아프로디테라는 가구를 들이기로 결정합니다. 여기서 아프로디테라는 여신의 이미지에 대해 생각해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아프로디테는 사랑과 미의 여신으로 알려져 있지만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는 생명과 애욕만을 주관하는 신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아름다운 여성의 상징으로 받아들여지기도 하는 내용입니다. 가구의 이름이 방의 분위기에 영향력을 미친다면, 볼프강이 정신분석적 의미에서 기표에 끌리는 것이라면 아프로디테라는 가구의 이름은 그가 방을 꾸민 목적을 의미할 수 있습니다. 자신이 안전하게 사랑할 수 있는 ‘여자’를 의미하는 것입니다.(베르나르 베르베르는 그의 소설에서 아프로디테를 '창녀'로 그렸음.) 안전하게 사랑할 수 있는 여자를 다르게 표현한다면 ‘최후의 여자’라는 말입니다. 볼프강의 시나리오에서는 첫 관계를 가진 여성이 끝까지 자신의 곁에 남게 되는 시나리오를 가지고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나타샤를 최후의 여자로 ‘개조’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나타샤의 입장에서 볼프강과 강제로 부부관계를 맺어야 한다는 것은 괴로운 일입니다. 그날 이후 자살을 시도하지만 실패로 끝나고 맙니다. 자살시도를 알아차린 볼프강은 그녀를 심하게 폭행합니다. 그녀는 그의 폭행을 일일이 기록해둡니다.
여기서 특이한 부분이 있습니다. 그녀는 어떻게 폭행을 당한 것을 일일이 기록할 수 있었을까요? 보통 얻어맞게 되면 정신이 없습니다. 몇 대 맞았는지도 잘 모릅니다. 심한 폭행의 경우는 더 그렇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자아는 익숙해지게 되면 당황스러운 상황에서도 익숙한 반응을 내비칠 수 있습니다. 나타샤는 그의 폭력에 굴복하지 않은 것입니다.
나타샤가 볼프강의 폭행을 기록해 두는 것은 어쩌면 나중에 생길 책임을 묻기 위한 내용이 될 수 있습니다. 바로 ‘복수’와도 관련이 지어질 수 있을 것입니다.
2908일째 나타샤의 18세 생일에 볼프강에게서 생일케잌과 함께 드레스를 선물로 받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볼프강이 미리 꾸며놓은 시나리오에 의해 좋아하는 것조차도 나타샤는 연기를 해야만 했습니다.
이 시기에 볼프강은 생활비가 부족해집니다. 가지고 있던 흰색 밴을 팔려고 합니다. 그 밴은 나타샤를 납치하는데 사용되었던 것이기도 합니다. 그는 나타샤에게 밴을 꼼꼼하게 청소하라고 지시합니다. 볼프강에게 있어 나타샤는 이제 '부인'과 같은 입장입니다. 때마침, 볼프강에게 밴을 구입하겠다는 전화가 옵니다. 그는 전화를 받기 위해 잠시 자리를 비웁니다. 나타샤는 그때를 놓치지 않고 열린 문틈으로 탈출에 성공합니다. 여기서 다시 떠올릴 수 있는 것은 페루지아가 어떻게 검거되었는지에 관한 것입니다. 모나리자를 절도한지 2년 후, 페루지아는 알프레도 콜리라는 고 미술상에게 모나리자를 팔고자 했었습니다. 그러나 콜리는 그림이 모나리자라는 것을 알아챕니다. 페루지아에게 감정할 시간이 필요하다고 그를 숙박하던 호텔에서 기다리게 한 뒤 경찰에 신고합니다. 희대의 모나리자 절도범은 그렇게 검거가 되었습니다. 모나리자를 욕망하던 시선을 거둬들임으로 일어난 일입니다.
볼프강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생활비를 위해서 나타샤를 납치할 때 썼던 밴을 팔고자 할 때, 구매의사를 가진 사람에게 전화가 옵니다. 볼프강이 시선을 거둬들였을 때, 나타샤는 그의 욕망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욕망이 묻어있는 시선이 끈끈이주걱과 같은 역할을 했던 것입니다.
3096일째, 나타샤는 경찰을 통해서 부모님과 재회하게 됩니다. 나타샤의 탈출로 인해 볼프강은 자살을 선택합니다. 나타샤가 탈출한 것을 알게 된 볼프강은 달려오는 기차에 몸을 던집니다. 무엇 때문에 자살하게 된 것일까요? 처벌을 피하기 위해서였을까요? 볼프강이 법을 위반하는 전형적인 범죄자는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법의 언저리에서 법을 교묘하게 피하고자 했었습니다. 나타샤의 탈출은 그에게 법을 회피할 수 있을 가능성을 사라지게 만들었습니다. 따라서 그가 법을 피할 수 있었던 유일한 방식으로 선택할 수 있었던 것은 ‘자살’이었습니다.
페루지아와의 차이는 여기서 발생합니다. 이탈리아 인이었던 페루지아는 모나리자를 훔친 것이 애국심에서 비롯되었다고 주장합니다. 이탈리아는 프랑스에 모나리자를 돌려주는 대신 페루지아의 재판권을 넘겨받습니다. 그리고 페루지아는 모나리자 절도로 7개월의 실형을 살고 이탈리아의 고향에서 머물다가 다시 프랑스로 돌아와서 새로 각색한 자신의 이야기를 프랑스의 타블로이드 판 신문들에 팔았습니다. 그에게 적용된 법이 이중이기 때문에 타협점이 발생하게 되는 것입니다.
나타샤와 볼프강의 입장이 바뀌는 지점이 바로 여깁니다. 현재의 나타샤는 자신의 이야기를 책으로, 영화로 그려내고 있는 것입니다. 볼프강의 납치를 다른 관점으로 바라본다면 아버지가 되기를 거부하는 아들의 모습으로도 읽힐 수 있습니다. 그 의미에서 아름다운 미소를 지닌 나타샤는 미학적인 대상과 동시에 딸로서의 가치도 함께 만족시킬 수 있습니다. 나타샤의 생리가 딸이라는 심리적 가치를 떨어뜨린 것입니다.
그렇다면 볼프강이 딸을 키운 것이지만 동시에 아내를 삼은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여자는 남자에게 있어서 알 수 없는 미지의 존재입니다. 여자와 남자는 그 존재가 다르다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정신의 발달 역시도 남자와 차이가 있습니다. 알래야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볼프강은 미지의 존재인 여자를 좋아했습니다. 그런데 그 정도가 지나쳤습니다. 따라서 그의 정신에서 ‘두려움’을 구성하게 만들었습니다. 따라서 그는 두려움을 진정시키기 위해서 자신이 '장악'할 수 있는 여자를 만들고자 했던 것입니다.
모나리자가 도난당했을 때 루브르 박물관의 빈자리는 세간의 조명을 받았습니다. 나타샤 캄푸쉬도 그렇습니다. 3096일 동안의 감금당했던 그녀의 일상의 빈자리는 여전히 세간의 조명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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