폄하와 조롱의 단어로 전락했지만 정신승리가 매양 나쁘지는 않다.
특히 ‘만사가 다 꼬인 상황에서 퇴로를 확보하기 위한 정신승리’는 손실을 줄이는데 큰 도움이 된다. 더 객관적이라면 좋겠지만, 더 객관적이면 기분만 잡치고 퇴각하기 싫어지니까 정신승리를 통해 퇴각을 쉽게 하자는 식이다.
이솝 우화의 ‘여우의 신포도’는 그 전형을 보여준다. 몇 번 해보니 내 깜냥으로 포도를 딸 수가 없다. 그러면 진종일 체력을 소모하고 불가능한 과업을 하느니 퇴각하는 게 합리적이다. 근데 내가 깜냥이 못해서 퇴각해야 한다고 생각하기엔 기분이 나쁘다. 그러면 어찌하는가. ‘저 포도 별로 맛없는 거 같아. 집에 가자’. 진종일 땡볕에서 구르며 다른 먹잇감을 찾아다닐 힘도 탕진할 바에야 이러는 게 낫다.
김정은의 북한이 지금 보여주려는 전환도 이 ‘만사가 다 꼬인 상황에서 퇴로를 확보하기 위한 정신승리’다. 좀 더 간결하게 말한다면 ‘몸이 사는 방향으로의 정신승리’다.
북한이 그간 개혁개방의 길에 합류하지 못한 건 순전히 남한 때문이다. 먼저 그 길 간 중국도 이십여년 관찰하다 이 길을 따라간 베트남도 뚜렷한 성과를 내는 길이란 걸 모를 리 없다. 하지만 북한과 남한은 체제경쟁을 하던 사이다. 개혁개방하면 ‘졌다’는 뜻이 된다. 그러면 중국이나 베트남과는 달리 분단국가인 북한은 체제정당성이 무너져 붕괴하여 남한에 흡수되기 십상이다. 정신으로 지면 몸도 죽는 상황이라 나올 수 없었다.
그런 상황에선 핵무기란 것의 가치에도 ‘정신승리’의 측면이 있다. ‘남한은 못 만드는 핵무기, 우리는 만들 수 있다’는 식이다. 물론 남한이 북한보다 기술이 부족해 못 만드는 건 아니다. 국제사회와 미국의 규율 아래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이 부분에선 ‘그러니 우리가 남한보다 더 자주적이다’라고 정신승리하면 된다. 지금껏 그러고 살았다.
김정은은 작년에 도발할 때부터 지금의 ‘몸이 사는 방향으로 퇴각하는 정신승리’를 기획했다고 본다. 핵무기를 미국에 배달할 수 있는 미사일을 급속도로 시험했고 대충 완성했다. 사실 완성이라 선언한 것도 정신승리적 성격이 있었다. 완전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대충 미국에게 팔아먹을 정도의 꼴은 갖췄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재빨리 핵무력 완성했다 선언하지 않았다면 자칫하면 폭격 당할 판이었다. 그러니 엄밀성이 떨어지더라도 완성 선언해야만 했다. 트럼프는 진짜 북한을 날려버릴지도 모른다고 북한 역시 판단했기 때문일 것이다.
김정은의 북한은 중동 지역의 테러리스트처럼 진짜로 미친 놈이 아니다. 미친 놈을 연기하면서 어떻게든 먹고 살려고 노력하는 놈일 뿐이다. 그러면 이제 먹고 살려면 어찌해야 하는가.
인민들이 굶으면 안 된다. ‘고난의 행군’을 한 번 더 버틸 수는 없다. 김정은은 그걸 알았다. 그래서 집권 후 몇 년간 그의 발언들을 보면 경제문제에 대한 약속이 있다. 인민이 굶으면 자기 권력이 무너진다고 판단하고 조심스럽게 이것저것 허용하다 보니 장마당경제의 규모가 커졌고 해외시장에 대한 의존도가 50%에 육박하게 됐다.
말하자면 ‘김정은의 북한’은 이미 국제 자본시장에 편입했고, 뒤로 돌아가지는 못한다는 것이다. 돌아서면 소득이 반토막나고, 인민은 굶게 되고, 김정은의 권력은 무너진다. 북한 같은 통제사회에서 권력의 붕괴는 통치자의 죽음을 의미한다. 그의 절대권력은 남한의 1987년의 방식이 아니라, 1979년의 방식으로 붕괴할 가능성이 농후하기 때문이다. 뒤로 돌아가면 죽는다.
미국의 제재는 ‘지금처럼 계속 뭉개보자’는 북한의 마지막 선택지조차 없앴다. 북한이 이미 국제 자본시장에 편입한 상태에서, 북한으로 흘러들어가는 자금을 실질적으로 규제하게 된 제재조치들이 이미 효과를 발휘하기 시작했다. ‘뒤로 돌아가면 죽는다’는 이제 ‘버티면 죽는다’로 변했다.
김정은은 망하기 전에 결단을 내렸다. 그는 사금고에 있던 돈을 풀면서 경제위기를 지연했을 가능성이 높다. 분명히 제재가 교역을 막는 방식으로 효과를 내기 시작했음에도 불구하고, 최근 탈북자들 증언에서 경제가 어려워졌다는 얘기는 별로 없다. 그러면 김정은이 돈을 푼 것이다. 하지만 영원할 수는 없다. 엑셀로 두들겨보면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지는 답 나온다. 그래서 그는 더 자금줄이 마르기 전에 어쩔 수 없는 상황을 적극적으로 주도하기로 결심했다. 평창올림픽을 핑계로.
그래서 이건 ‘어물쩍 시간을 떼우는 길’이기 어렵다. 북한이 핵포기를 대가로 얻을 수 있는 어떠한 경제적 유인들일지라도 당연히 국제교류와 관련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북한이 어물쩍 합의를 이탈하면, 다시 제재가 작동한다. 인민들이 허리띠를 좀 풀다가 다시 허리띠를 조여야 하는 상황이 온다면? 김정은이 굳이 그걸 실험해보고 싶지는 않을 것이다.
따라서 김정은에겐 매우 호쾌한 정신승리가 필요했다. ‘자, 이건 우리가 이긴 거다. 미국에 핵무력을 배달할 수 있는 나라가 되었다. 그들이 우리와 협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니까, 내가 먼저 나가서 협상한다. 우리의 오랜 여정은 남한과 미국에 대한 승리로 완결되었다. 그러니, 이제부터는 우리 함께 많은 것을 누리고 행복하게 살자’. 밖에서 뭐라고 하는지와 별개로, 김정은은 인민들에게 이러한 사인을 보내고 있을 것이다.
이 ‘정신승리’는 올바르다. 참으로 맞는 방향이다. 김정은이 사는 방향, 북한이 사는 방향, 남북한 모두가 잘 사는 방향으로의 정신승리다. 이게 백퍼센트 사실이 아님은 김정은도 알고 북한 주민도 알지만, 모두가 사는 방향으로 가자면 그쯤은 속아주는 거다. 남한도 속아줘도 된다. ‘백두혈통’이 이러한 전환을 스스로 하는 것이 가장 비용이 적게 들 길이기 때문이다.
이 위대한 정신승리가 성공하려면 먼저 김정은의 권력이 탄탄해야 하고, 미국과 남한의 여론이 그가 전환을 결심했음을 믿어야 한다. 나는 김정은의 행동에서 그가 이 두 미션을 이해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는다. 장성택과 김정남을 죽일 때 그가 어디까지 노렸는지는 알 수 없으나 결과적으로 그러한 참극은 그가 이러한 전환을 실행하는 것이 가능하도록 했다. 김정은의 목표는 어디까지가 자신이 살기 위해 북한이 사는 것이다. 장성택과 김정남이 개혁개방을 하면 김정은은 죽는다. 하지만 그들을 죽이고 김정은이 개혁개방을 하면 그는 살 수 있다.
또한 그는 미국과 남한의 여론이 자신을 믿도록 여러 조치를 취할 것이다. 그래야 실질적인 ‘당근’이 들어올 것이고, 그래야 그의 전환이 지속가능한 것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보도를 보건대, 이미 시작됐다.
김정은은 질주하는 말에 올라탄 것이 아닐까? 굴러 떨어질 위험이 있는 것이 아닐까? 물론, 그렇다. 하지만 가만히 있는 것보단 나았다. 이 길에는 '잘하면 된다'는 가능성이 있으니 말이다. 그리고 그가 여기까지 계산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개혁개방의 길에서 실각하게 되면 그 결말이 죽음이 아닐 가능성도 높다. 그가 남한의 1979년 방식이 아니라, 1987년 방식으로 실각하게 된다면, 어디 망명이라도 가서 여생을 보낼 수 있다. 개혁개방으로 여러 국가와 외교관계를 형성한다면 망명의 선택지도 많아질 것이다.
그래서 ‘김정은의 몸이 사는 방향으로 퇴각하는 정신승리’를 이해하지 못한 보수파들의 정신승리는 앞으로도 판판이 깨져나갈 가능성이 높다. 그들은 ‘여우의 신포도’의 여우만도 못한 정신승리를, 몸을 괴롭히고 죽이는 방향으로의 정신승리를 하고 있다. 먹지도 못할 포도를 따겠다고 여름 땡볕에서 한나절을 뛰어 오르다 탈진해서 쓰러질 종류의 정신승리를 하고 있다.
지금 남한 보수파에게 시급히 필요한 정신승리는 김정은이 했던 그것과 같다. ‘몸이 사는 방향으로 퇴각하는 정신승리’다. ‘김정은 죽어라, 북한 망해라 고사지내는 것이 보수의 본령일 수 없지. 보수에겐 다른 아름다운 목표들이 있어’라면서 퇴각하는 것이다. 똥인지 된장인지 굳이 찍어 먹어 보아야 알겠다는 태도를 고수한다면 지금 빠져 있는 똥통에서 빠져나올 길이 없다.
크, 좋은 글입니다 :)
멋진 글입니다. 김정은이 지금까지 했던 행동들이 자연스럽게 연결되네요. 철봉 글도 재미있습니다. 제가 조만간 어딘가 매달려서 철봉운동 같은 자세를 취하는 순간이 온다면 @hanyhy1983님 덕분입니다. 자주 찾아오고 싶네요.
새로 덧글 달아주신 분을 넘 늦게 발견했네요! 앞으론 더 자주 들어올테니 좋은 소통되기를 기대합니다. 감사합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