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스타트업 상상기 ─ 제1화

쌍팔년도 출생 대표의 쌍팔년도 따라하기

이 글은 스타트업을 비롯한 모든 기업에서 있을 수 있는 최악의 상황을 상상해 쓴 픽션입니다.
부디 이 픽션이 현실 속의 일이 아니었고, 앞으로도 아니길 바라며...

몰카인 줄 알았다. 입사한 날 있었던 '영업회의'. 평균 나이 20대 중후반의 직원들이 회사 수첩을 들고 우르르 조그마한 회의실로 들어갔다. 10분 정도 늦게 들어와 테이블 가운데 자리잡은 88년생 대표는 펜으로 노트북과 연결된 TV를 가르키며 "시작해요"라는 짧은 한마디를 던졌다. 보고가 시작되었다. 소통 따위는 1%도 가미되지 않은 100% 보고였다. 두 번의 ~~국내 굴지의~~ 대기업 생활에서도 경험하지 못했던 전형적인 탑-다운식 회의. 신규 입사자에게 즐거움을 주려고 모두가 연극중인 것은 아닐까? 아니, 그러기엔 너무 진지했다. 만약 이게 연극이라면 모두가 ~~아주아주~~ 큰 상을 받아야 할 만큼 훌륭했다. 손을 번쩍 들고 "이거 몰래 카메라죠?"를 외치고 싶었다. 하지만 모두가 히스 레저라도 된 마냥 메소드 연기를 펼치고 있었기에 나는 그저 잠자코 있었다.

"연극이었다면 박수를 3시간 쳐도 모자랐을 텐데 아쉽게도 모두가 진심이었다"

그 작은 스타트업에는 '대표실'이 있었다. 대표와 직원, 돈 주는 사람과 돈 받는 사람을 명확하게 구분짓는 권위(바로 이 '권위'와 얽힌 에피소드도 있다)의 공간. 그 공간은 직원 네다섯의 작은 스타트업을 하나 더 꾸릴 수 있는 정도의 크기였다. 직원들은 '보고'를 위해 대표실의 문을 두드렸고 안에서 희미하게 "네~"또는 "들어와요"하는 ~~회장님, 아니,~~ 대표님의 음성을 확인하고서야 조심스레 문고리를 돌릴 수 있었다. 대부분의 경우 우리의 대표님은 시선을 모니터에 두고 있었다. 롤(League of Legends)을 하다가 창을 내렸는지, 앙증맞은 라인 프렌즈 인형을 고르다 잽싸게 장바구니 아이콘을 누르곤 창을 껐는지, 아무도 알 수 없다. 아무튼 시선은 모니터를 향해 있었고, 몇 번의 클릭 후 사무용 의자를 회전시켜 시선을 직원에게로 옮겼다.

"뭐 이런거라도 하나 사드려야 할 것 같았다"

대표는 직원이 가지고 온 종이에 자신도 알아보지 못할 수정사항들을 끄적거렸다(비아냥이 아니라 정말 그는 자신의 글을 알아보지 못했다). 자기보다 한두살 많거나 적은 대표 앞에서 잔뜩 주눅들어버린 직원은 "네"를 연발하며 고개를 끄덕이거나, 그래도 이 말은 해야겠다는 마음으로 똥꼬에서부터 끌어올린 목소리를 목구멍 즈음에서 다시 끌어내리길 반복했다. 물론 대부분의 상사들이 내린 수정사항이 그렇듯 수정해도 그만, 안해도 그만인 것들이 대부분이었고 몇몇은 지나치게 허황된 내용(이 부분은 다음 화에서 다룰 것이다)이라 수정하면 오히려 독이 되는 것들이었다.

"본인도 모르고 직원도 모른다"

여기까지가 첫 출근날의 상상기다. 퇴근 후 친구에게 입사 소감을 이야기하며 MBC 무한도전의 '무한상사' 이야기를 꺼냈다. 갖은 '꼰대질'을 패러디하던 장면들이 내 눈앞에서 실제 펼쳐지고 있음을 전했다. 그것들을 앞으로 내가 감당해야할 생각을 하니 피식 웃음이 나기도 했다. 어디서 배웠는지 이상한 회장 흉내만 내며 권위를 내세우는 쌍팔년도 출생 대표와 폭정에 시달리다 모든 입과 사고를 닫아버린 직원들. 앞으로 어떤 일들이 벌어질지, 기대보다는 약간의 걱정과 후회가 깃든 저녁이었지만 친구 앞에선 아무렇지 않은 척을 했다. "재미있을 것 같아. 무엇을 경험하던 다 내 인생에 보약이 되는거지 뭐."

다음 날부터 내 인생에서 가장 재미없고, 무익한 시간들이 펼쳐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