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깐만요!"
검정 가방이 문에 걸렸다.
닫히는 엘리베이터의 버튼을 눌러대자
결국 문이 열렸다.
"죄송합니다!"
고개를 가볍게 숙이며 여자가 들어섰다.
밀폐된 공간에 달콤한 향기가 순간 퍼져
들었다.
"여기 타시면 안 됩니다!"
딱딱한 목소리에 세미는 고개를 돌렸다.
검정 정장을 입은 남자가 낮게 말했다.
"왜요? 엘리베이터잖아요?
저희는 지금 늦었거든요!"
세미도 지지 않으려는 말투로 대꾸했다.
옆에 선 유진이 세미의 허리를 쿡 찔렀다.
세미는 '왜?'하며 묻는 표정으로 유진을
바라보았다.
"모르셨나 보죠. 그냥 있어."
남자 옆에 또 한 남자가 조용히 말했다.
꽤나 카리스마 넘치는 자세로 서서 시선을
돌렸다.
명품의 고급스러움이 묻어나는 블랙 수트
차림이다.
당당해 보이는 어깨 라인 아래에
날선 바지는 긴 다리를 더욱 돋보이게 했다
'정말 재수 없다! 저 남자들 뭐야!
엘리베이터 전세 낸 것도 아니고!'
세미는 두 남자를 노려보며 입술을 씰룩였다.
검정 정장에 심플한 검정 넥타이를 맨 굳은
표정의 남자는 언제부터인지 세미를 쏘아
보고 있었다.
세미는 불편한 시선을 돌려 한쪽 벽면에
고정했다.
또 다른 남자는 등을 돌린 채 전면을 응시했다.
강남의 고층 빌딩 숲이 한눈에 들어온다.
고속 엘리베이터는 37 층까지 순식간에 올라가
'띵' 소리가 나며 문이 열렸다.
세미와 유진은 빠르게 튀어나갔다.
뒤이어 저벅저벅 구둣소리가 울리더니 사라졌다.
"어떻게 오셨나요?"
세미와 시선이 마주친 여직원이 조용히 물었다.
"계약 때문에 왔어요."
"네.그러세요..?"
세미가 눈을 깜빡이자 여자는 세미와 옆에
여자를 위 아래로 훑어보았다.
한 명은 화장기 없는 앳되 보이는 얼굴에 머리는
하나로 가지런히 모았다.
왠지 어색해 보이는 네이비색 정장과
흰 블라우스는 입사 면접을 보러 온 비서의
느낌이다.
바로 옆에 다른 한 사람은 네이비색 원피스에
낮은 굽의 로퍼를 신고 호기심 어린 눈으로
사무실을 보고 있었다.
여비서는 앞장 서 두 사람을 안내했다.
"이쪽으로 오세요."
문이 열렸다.
커다란 방에 회의용 ㄷ자 형 책상이 놓여 있었다.
긴장감에 마른침을 삼키며 지정해 주는 자리에
앉았다.
맞은편에 앉은 남자가 미소를 띠며 일어났다.
"다시 만나 뵈어 반갑습니다. 박기영입니다."
그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명함을 건넸다.
박기영 기획실 이사
사십대 후반으로 사람 좋아 보이는 미소를
지었다.
"안녕하세요."
세미와 유진은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세요?"
가라앉은 소리가 귀에 울렸다.
고개를 돌린 세미는 순간 눈동자가 커졌다.
엘리베이터에서 봤던 남자가 긴장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바로 옆에 서늘한 눈빛으로 자신을 응시하는
남자와 시선이 마주쳤다.
"크리스 리. 트리플 컴퍼니 대표 이사 이십니다."
남자가 조용한 소리로 소개를 했다.
"반갑습니다."
낮고 무게감 느껴지는 소리가 울렸다.
세미와 유진은 순간 긴장한 표정으로 앞에
남자를 응시했다.
"에스 씨 푸드(S. C. FOOD)에 투자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사장님을 대리하여 제가 참석했습니다."
세미는 명함을 건네며 차분한 소리로 말했다.
에스 씨 푸드 영업 실장 주세미.
영업 실장이지만 대외적으로 실질적 업무를
진행하고 있다.
'주세미' 명함의 이름을 확인한 순간, 남자가
눈앞에 여자를 놀란듯 바라보았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대표의 가라앉은 눈빛이 순간
미세하게 흔들렸다.
법무팀 변호사가 서류를 건넸다.
조용한 회의실에 사락 서류 넘어 가는 소리와
사인하는 펜끝의 소리만 들렸다.
"감사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회사 대표는 다소 딱딱한 표정으로 커다란
손을 내밀었다.
세미의 하얗고 작은 손을 가볍게 흔들었다.
세미와 박기영 이사도 악수를 했다.
세미에게 변호사가 서류를 건넸다.
유진과 세미는 가볍게 인사를 건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휴. 하필이면 아까 그 남자들이.!"
"그러니까 말이야.
내가 네 옆구리 안 찔렀으면 아까 욕 나왔을 걸?"
"어휴."
세미는 얼떨떨한 기분으로 고개를 가로저으며
엘리베이터를 향했다.
유진도 멍한 얼굴로 고개를 한번 휘 내저었다.
하마터면 업무 제휴 양해 각서(MOU)를 맺는
회사 대표와 비서에게 무개념한 행동을 할 뻔했다.
다시 생각해 보니 순간 아찔해졌다.
전망을 보며 등 돌려 서 있던 키 큰 남자는
대표였었다.
빌딩 중앙 엘리베이터에 벽면에 '임원용' 안내가
이제야 보인다.
세미와 유진은 마주보며 어색한 웃음을 웃었다.
그리고는 왼쪽 방향의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타닥타닥'
러닝머신의 속도 버튼을 7 에 맞추었다.
그러다가 10, 12, 다시 7, 6.
이찬성은 속도를 조절하며 달렸다.
민소매 트레이닝복 위로도 땀이 배어 젖어들었다.
이마에도 송글 땀이 배어 나왔다.
땀에 젖은 숨을 내뱉을 때 마다 탄탄한 가슴이
들썩였다.
찬성은 러닝머신 위에서 달리고 있지만 머릿속
에서는 양해 각서 서류를 떠올렸다.
이찬성. 크리스 리 (Chris Lee)
트리플 컴퍼니 그룹 이사진의 만장일치로
대표이사가 되었다.
29세. 대표 이사 치고는 젊다면 젊은 나이 이다.
그러나 그의 날카로운 기업 분석력과 직관은
놀랄 만큼 적중했다.
고등학교 졸업 후 떠밀리듯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찬성은 하루라도 빨리 한국에 들어오기 위해
앞만 보고 달렸다.
8년. 길다면 한없이 긴 시간이었다.
예일대 경영대학원 재학 당시에 모의 투자 대회
마다 경이로운 수익률로 우승을 차지했다.
그리고 박사 과정 당시에 남들은 거들떠보지도
않던 의료 벤처 회사에 투자했다.
회사는 안티 에이징 케어 제품을 출시했고,
시장에서 말 그대로 대박을 터뜨렸다.
회사 주가는 폭등을 했고, 찬성은 막대한 수익을
거두며 주식을 매도했다.
경영학 박사 학위를 받고 미국 굴지의 대기업들의
스카우트 제안을 검토했다.
그의 거침없는 행보를 눈여겨보던 트리플 컴퍼니
에서 스카우트 제안을 보냈다.
한국의 손꼽히는 대기업에 속하는 트리플 컴퍼니
그룹의 제안은 매력적이었다.
글로벌 그룹의 입지를 공고히 하기 위해 R&D 와
마케팅 파트를 강화한다는 계획이었다.
그리고 이찬성의 투자 관련 결정을 존중한다고
했다.
찬성은 망설임 없이 한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트리플 컴퍼니 이사 취임 후 첫 투자는 SNS에서
인기 몰이 중인 중소 반찬 배달 업체로 결정했다.
고객들의 높은 만족도와 인기, 무엇보다 맛에
감동한다는 문구에 찬성은 투자 결정을 했다.
에스 씨 푸드 회사 대표 이수혜의 맛과
품질에 대한 고객 약속을 읽으며 살며시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신선하고 건강한 반찬을 엄마의 마음으로
가정의 식탁 까지 책임집니다!
이 대표의 에스(S: safe) 씨(C: clean)
푸드(FOOD) 사명(社名)에 대한
자신감도 신뢰를 높여주었다.
'에스 씨 푸드 영업 실장 주세미'
남자는 10년 전 이지만, 바로 어제 같은,
또렷한 기억을 떠올리고 있었다.
"야!!!"
목이 터져라 소리 지르지르며 여학생이
달려왔다.
"거기 서!!"
교복 치마 자락을 펄렁이며 가까이 다가왔다.
갑자기 '퍽!' 복도 모퉁이에서 누군가와 부딪혔다.
'어..'
'앗..'
하며 놀라 동그래진 남학생과 여학생의 시선이
마주쳤다.
새까맣고 윤기 흐르는 머리카락이 나풀거렸다.
여학생은 비스듬히 옆으로 시선을 들었다.
바로 몇 발짝 앞에 주세찬이 보였다.
따돌렸다고 생각했는지 멈추어 마주 보며
혀를 날름 내밀었다.
한 손에 필통을 들고 전승 기념품처럼
흔들어 댔다.
"아. 진짜!!!"
목이 터져라 소리 지르지만, 순간 수업 시작
예비 종이 울렸다.
"세미야. 수업 시작이다. 어떻게 하지?"
헉헉대며 따라온 친구 지유진이 물었다.
엄마에게 졸라서 오늘 산 따끈따끈한 새 필통이다.
제일 좋아하는 스펀지밥 캐릭터 얼굴 모양 필통
이다.
노란색 필통에 아끼는 펜과 샤프를 가득 채웠다.
잠깐 화장실을 다녀왔는데 필통이 감쪽같이
사라졌다.
하얗게 질린 얼굴로 짝 유진에게 물었다.
'그거? 아까 세찬이가 가져가던데?'
주세찬. 주세미와 이란성 쌍둥이다.
밥 먹고 하는 생각은 뭐든 세미를 골탕 먹이려
태어난 것 같다.
어쩌다 같은 고등학교를 지원하여 나란히
다니고 있다.
세미는 부딪힌 이마를 손끝으로 비벼댔다.
금세 혹이라도 난 것 같다.
고개를 숙이며 작게 "죄송합니다."
라고 사과의 말을 했다.
"이거 찾나요?"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고개를 든 세미의 까만 눈동자가 휘둥그레졌다.
두 발짝 앞에서 세찬은 얼굴이 빨개져서
식식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파란 이름표를 단 선배 남학생이 세미
눈 앞에 스펀지밥 필통을 들이 밀었다.
세찬보다 머리 하나는 더 키 큰 남학생이 빙긋
미소 지으며 세미를 내려다보았다.
여학생은 숨을 몰아쉬면서 등 뒤에 누군가를
노려보고 있었다.
잠시 후 맑고 조그만 목소리가 들렸다.
"고..고맙습니다."
교내에서 선, 후배간의 규율이 다른 학교보다
엄했다.
선배에게는 깍듯이 존대를 해야 했다.
"몇 학년?"
남학생이 대뜸 물었다.
"네??"
노란색 이름표는 1학년, 녹색은 2학년을
나타낸다.
이름표 색깔을 보고도 학년을 묻다니?
세미는 눈만 깜빡이다가 대답 할 기회를 놓쳤다.
저승사자 같은 수학 선생님의 번쩍이는
대머리가 계단 앞에 보였다.
교실까지 한달음에 달려야 한다.
어색한 표정으로 살짝 머리를 숙여 인사를
하고 필통을 건네받았다.
받자마자 교실 쪽으로 달렸다.
남학생은 순식간에 사라진 여학생의
뒷모습을 어이없는 듯 보다가 가벼운 미소를
지었다.
학교는 복도와 계단이 연결되어 꼬불꼬불한
미로 같았다.
ㄷ자형 구조를 확인은 했지만 찾으려니
복잡했다.
3학년 교실은 4층 건물에 3층,
7반은 구석에 있었다.
교실 앞에 서자 선생님이 친절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복도까지 들리는 아이들의 소음에
미간을 찌푸렸다.
"조용!! 전학생이다. 이찬성이다."
선생님의 소개말에도 아이들은 시큰둥했다.
잠시 교탁 쪽을 보는듯하더니 다시 시끌시끌해
졌다.
"저 쪽 끝 빈자리에 앉아라."
선생님이 가리키는 자리로 걸음을 옮겼다.
큰 키에 남자다우면서 세련된 외모의 찬성이
지나가자 아이들은 탐색의 눈빛을 쏘아댔다.
찬성은 자리에 앉았다. 딱딱한 의자가 불편했다.
그러나 큰 키와 긴 다리를 제대로 뻗지도,
접지도 못하는 책상은 더더욱 불편했다.
'휴.. 이거 참.. 답답하다.'
찬성은 슬며시 짜증이 났다.
주변 친구들의 힐금거리는 곁눈질이
느껴졌다.
찬성은 굳이 맞닥뜨리기 싫어서 무관심한 척
수업에만 집중했다.
"이 문제 답 찾았나?"
딱딱한 목소리로 공식을 설명하자마자 문제를
적고 수학 선생님이 답을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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