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플릿 : Activating Evolution] 02. 감각의 제국

in #stimcity5 years ago (edi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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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이 몸을 얻었을 때



인간 경험은 매우 독특합니다. 영혼이 몸을 입게 되었을 때, 당신이 처음으로 울음을 터뜨리던 날 말입니다. 영혼이 열망하던 몸을 얻었을 때 우리는 드디어 감각의 제국에 입성하게 된 것입니다. 만지고 보고 듣고 냄새를 맡고 촉각을 경험하게 되는 일. 감각의 제국의 신민(身民)이 되는 일을 기꺼이 그대의 영혼이 허락하였습니다. 아니 열망하였습니다.



걷고 기고 뛰고 달리는 일. 넘어지고 부러지고 다치고 상처를 입는 일. 아물고 회복되고 낫고 새살이 돋아나는 일. 육체 경험의 매우 특별한 순간들입니다. 그것은 기적입니다. 베인 상처가 아물고 키가 저절로 자라나는 일 말입니다. 빠진 손톱에서 새로운 손톱이 자라나고 부러진 뼈가 다시 붙는 일. 당연한 듯 여기는 모든 치유의 순간들이 실은 육체 경험이 없이는 상상해 볼 뿐인 경이로운 일인 것입니다. 심지어 어떤 피조물들은 마침내 하늘을 날 수도 있게 되었으니 말이죠.



모든 생명체가 자신들만의 고유한 육체 경험을 가지고 있습니다. 나무가 열매를 맺고, 물이 빗방울이었다가 강물이 되어 바다가 되는 경험. 그러면 인간 경험의 유니크한 면들은 무엇일까요?



사랑하는 사람이 서로의 몸을 어루만지는 일. 손을 잡고 입을 맞추는 일. 그것이 인간 경험의 독특한 육체 경험이라면 죽은 사람과는 할 수 없는 일인 것입니다. 몸을 잃은 영혼은 당신을 만질 수 없습니다. 영혼이 몸을 얻었을 때 주어졌던 치유의 능력을, 몸을 잃은 영혼은 경험할 수 없습니다. 다치는 일이 없으니까요. 다칠 육체를 가지고 있지 못하니까요.



오래된 영화 ‘사랑과 영혼’을 기억하실 겁니다. 사랑하는 연인의 몸을 만지기 위해 영혼이 해야 했던 고군분투 말이죠. 그것은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만질 수 없는 일. 감각할 수 없는 일 말이죠.



또다른 영화 ‘감각의 제국’의 모티브가 된 실제 사건의 주인공 아베 사다는, 가질 수 없었던 연인의 사랑을 영원히 가지기 위해 그의 성기를 절단하기도 하였습니다. 육체를 입은 영혼은 감각의 제국에서 이러한 인간 경험의 극단까지 자신을 몰아붙이기도 합니다. 물론 미친듯한 카페인과 넘치는 알코올로 자신의 육체를 극단까지 활성화시켜, 마침내 몸속에 사리(암 덩어리)를 맺는 우리들도 이 감각의 제국의 당당한 일원입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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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으면 우리는 영혼이 되어 다시 만날 겁니다. 그런데 다시 만난 우리는 서로를 어루만질 수 있을까요? 육체를 잃은 영혼은 무엇으로 서로를 감각할까요? 아무도 모릅니다. 살아있는 이는 이에 대해 아무런 답을 가지고 있지 못합니다. 다만 우리가 사는 세계가 감각의 제국이라는 사실만을 알 뿐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감각에서 벗어나려 매우 노력합니다. 자신과 싸우고 욕정과 분투합니다. 그러나 우주의 법칙은 싸우면 싸울수록, 부정하면 부정할수록, 그 상대가 더욱 강력해지고 거대해지게 만들어져 있습니다. 그대가 거부하는 그림자는 맞설수록 더욱 강력해집니다. 빛 가운데로 나아갈수록 그대에게서 드리운 그림자는 더더욱 선명해집니다. 우리는 육체를 소유하고 있으니 말이죠. 그것은 거부할 수 없는 물리법칙입니다.



그러나 실은 그대가 그토록 열망했다는 걸 인정해야 합니다. 육체를 입는 일 말이죠. 그것을 열망하지 않았다면 감각의 제국에 태어났을 리가 없습니다. 3차원 세계에 진입한 순간, 그대는 감각의 노예가 되어 살아갈지언정 사랑을 멈출 수가 없습니다. 아니 그 사랑을 경험하고 만지려고 이 세계에 진입한 겁니다. 이미 수많은 생을 기다리고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 사랑과 조우할 수 있게 된 겁니다. 어느 종교에서 말하듯 인간 경험을 하기 위해 수많은 생을 거치며 공덕을 쌓았는지도 모릅니다.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고 하니 이 감각의 제국의 경험은 얼마나 놀라운 것입니까? 얼마나 열망했던 것입니까? 게다가 분리된 자신의 짝을 찾아 나서는 이 놀라운 여정, 그대의 조각들과 재회하기 위한 이 거대한 열정은 얼마나 아름다운 것입니까?



그러나 누군가에겐 그 육체의 경험이 지독히 고통스럽고 진절머리가 나는 일인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죽을 수 있는 권리가 주어져 있습니다. 자살 말입니다. 공평하게, 단 한 사람도 예외가 없이, 모두에게 주어져 있습니다. 태어나는 일은 선택할 수 없었습니다. 물론 우리의 영혼이 선택한 일이죠. 하지만 한 번 태어난 자가 다시 태어나는 일을 선택할 수 없습니다. 부러진 뼈도 다시 붙는 데, 멈춘 숨을 다시 쉬게 하는 능력은 왜 주어지지 않았을까요? 키는 저절로 자라나는 데 왜 다시 젊어지지는 않는 걸까요? 그것은 분명 우주의 법칙에서 제외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죽을 수 있는 권리는 왜 주어졌을까요? 그것은 인간에게 왜 허락되어 있을까요? 다시 태어나는 일, 죽었다 다시 살아나는 능력은 인간에게 주어져 있지 않은 데, 죽을 권리는, 단 한 번 죽을 능력은, 인간에게 허락되어 있습니다. 이상한 일입니다. 하지만 그대에게는 그 권리가 있습니다.



감각할 권리와 죽을 권리, 감각할 능력과 죽을 능력. 모두 우리에게 있습니다. 게임을 종료할 권리와 피투성이가 되도록 즐길 권리. 모두 그대에게 있습니다.



콘텐츠가 몸을 잃었을 때



3차원 세계에서 영혼이 몸과 분리되지 않듯이 3차원 세계의 콘텐츠는 몸과 분리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온라인, 가상의 세계가 등장하기 전까지는 말이죠. 세상의 모든 콘텐츠는 도화지든 파피루스든 레코드 판이든 몸과 함께 였습니다. 그때에는 보고 듣는 감각이 만지는 감각과 분리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책을 읽는 행위는 문자를 눈으로 독해하는 행위와 책장을 넘기는 행위, 책꽂이에 넣고 빼는 행위 모든 것을 포함하는 감각의 경험이었습니다. 물론 주된 행위는 문자를 독해하는 일입니다. 그것만 쏙 빼서 캡슐에 넣어놓아도 효능에는 별 지장이 없을 겁니다. 지지직대는 LP판의 잡음과 기스가 날까 소중하게 케이스에서 분리해내는 일련의 과정은 번잡스럽거나 불편할 수도 있습니다. 소리만 쏙 빼서 공중에 띄워 놓을 수 있습니다. 소리만 들어도 그것은 음악일 테니까요.



가상의 세계가 열리며 콘텐츠는 빠르게 몸을 잃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LP, CD, 디스켓 등으로 몸을 변화하는 듯했으나 종국에는 0과 1로만 표현되는 클라우드 바다의 스트림 속을 흘러 다니는 데이터로 존재를 제한당했습니다. 아, 물론 인간이 세포 덩어리이듯 그 모든 콘텐츠의 속성 역시 데이터 덩어리인 것입니다. 그것을 몸에서 떼어서 가상의 세계에 가두어 버려도 우리의 감각에는 그것이 몸과 결합되어 있던 때와 다르지 않게 보고 들립니다. 어차피 감각이란 모두 뇌 작용일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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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그렇게 3차원 감각의 제국에 종속되었던 인간이 몸으로부터 해방을 얻게 되나 봅니다. 인간의 의식이란 것도 모두 데이터로 분리하여 클라우드의 세계에 업로드 하면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다니 더욱 그렇습니다. 그러면 그것은 진화일까요? 퇴보일까요?



3차원 인간 경험의 진화는 무엇일까요? 만일 우리가 육체를 부정하고 모든 것을 데이터화한다면 그것은 그냥 죽어서 영혼의 세계로 돌아가는 것과 무엇이 다를까요? 죽으면 어차피 시공간을 초월한 존재로 돌아가게 될 텐데(아니면 無로 돌아가던지) 인간 경험을 해체하는 일을 이 염원했던 감각의 제국에서 굳이 미리 경험할 필요가 있을까요? 뇌에 전기신호를 보내 마치 연인의 손을 잡고 있는 것과 같은 느낌을 재현하는 것과 매일 먹고 재워줘야 하는 귀찮은 몸일지언정, 내 손으로 직접 연인의 손을 잡는 것을 같은 경험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꼭 그래야 할까요?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시고



연인을 만지고픈 영혼에게 영매는 자신의 몸을 대신하여 연인을 만지게 해줍니다. 매체란 그렇게 두 개의 다른 존재를 이어주는 물리적 경험입니다. 또한 그것 자체로 독특한 실재입니다. 매체를 통해 독자는 창작자를 만나고 매체 자체를 또 경험합니다. 매체는 단지 두 존재를 이어주는 것을 넘어 독자적인 생명력을 갖습니다. 모든 물리적 존재는 분리된 우리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물리적 존재의 탄생, 매체의 생성은 새로운 창조입니다. 영혼이 몸이 없이 창조 세계에 존재할 수 없듯, 몸이 없는 영혼은 생명이 아닌 겁니다. 창조물의 생명이란 영혼과 몸의 결합이니까요.



나는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 걸까요?



영혼이 몸을 잃었을 때
콘텐츠가 몸을 잃었을 때
감각의 제국에서 우리는 길을 잃었습니다.





[리플릿 : Activating Evolution]

01. Genes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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