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生命, 유한할 것
生命, 날 생(生)과 목숨 명(命)의 결합입니다. 태어난 것이어야 하고 목숨이 있는 것이어야 합니다. 유한한 것 말입니다. 태어난 것은 수명이 있는 것입니다. 세포의 존재는 영원할지도 모릅니다. 형태를 바꾸며 존재할 뿐 그것은 우주의 역사와 함께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개별 존재로서의 생명은 그 시작과 끝이 있습니다. 태어남이 있고 죽음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것을 소중하게 여깁니다. 생명에 가치를 부여합니다.
사람은 유한한 것에 가치를 부여합니다. 그리고 희소한 것에 가치를 부여합니다. 공기를 돈 주고 사지 않는 이유는 무한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산소가 희박해 지면 산소통을 돈 주고 살 겁니다. 무한한 듯 여겨졌던 물도 이제는 돈 주고 사 마시게 되었듯 말입니다. 생명은 유한한 것이고 유한한 것이기에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죽어도 다시 사는 사람이 있다면 그의 죽음이 가치 있게 여겨지지 않을 겁니다. 언제든 다시 볼 수 있는 존재를 그리워할 이유는 없습니다. 그러나 단 한 번 밖에 살 수 없다면, 단 한 번 밖에 만날 수 없다면.. 가치는 그것에서 발생하는 겁니다. 생명력은 유한을 통해 부여되는 것입니다.
콘텐츠에 어떻게 생명력을 불어넣을까요? 아무데서나 보고 들을 수 있는 정보에 가치를 지불할 사람은 없습니다. 게다가 경제행위는 그것이 희소할수록 가치를 배가하는 겁니다. 유한하고 희소한 것에 사람은 가치를 더욱 지불하게 되는 겁니다. 그러므로 콘텐츠는 유한하고 희소할수록 가치가 배가됩니다. 여기서만 볼 수 있는 것. 지금만 들을 수 있는 것. 그럴수록 더욱 비싸지기 마련입니다. 물론 사람들이 원하는 콘텐츠라는 전제하에 말이죠.
콘텐츠에서 몸을 제거하고, 무한복제가 가능한 0과 1의 데이터로 분해한 뒤 콘텐츠의 가치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것의 생명력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어쩌면 그것은 몸을 잃은 뒤 영원을 얻었는지도 모릅니다. 네트워크와 클라우드의 바다에서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데이터 소스가 되어 끝없이 순환하는 존재가 되어 버렸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영원을 얻은 대신 생명력을 잃었습니다. 공기처럼 사람들은 그것을 돈 주고 사려고 하지 않습니다.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아날로그 세계에서 몸과 함께 가치를 인정받던 콘텐츠가 0과 1의 디지털 데이터로 변환되자 그것의 가치는 급전직하하였습니다. 누가 돈을 주고 음악을 듣습니까? 그것이 이 디지털 네트워크 세상의 시작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음악을 사지 않고 데이터를 공짜로 다운받았습니다. 그것은 무한 복제가 가능하니 가치가 없다고 여긴 겁니다. 공기를 돈 주고 사지 않듯 언제든 어디서든 내려받을 수 있는 데이터는 돈 주고 살 필요가 없어진 겁니다. 게다가 이제는 공기 중에 음악을 띄워 놓았습니다. 내려받지도 않습니다. 구름(클라우드)에 접속하여 네트워크 바다를 흘러 다니는 음악을 주워들으면 그뿐. 가까스로 가치를 지불하게 강제해도 묶음 떨이 상품 취급 이상을 받기가 어렵게 되었습니다. 광고를 보고 듣는 대가로 끼워 파는 보너스 상품의 처량한 처지에 놓이게 되고 말았습니다. 그것, 몸을 잃은 음악이 말이죠. 몸을 잃은 콘텐츠들이 말이죠.
아날로그에서 디지털의 세계로 변화하면서 몸의 장벽을 벗어나서 무한대로 자유롭게 소통이 가능해졌다고 놀라워하지만, 몸을 잃은 콘텐츠는 도리어 가치를 상실하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고 컴퓨터를, 클라우드를, 스마트폰을, 다 부숴 버려야 할까요? 다시 아날로그의 시대로 시계를 거꾸로 돌려야 할까요?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의 변화를 비관적으로 볼 필요는 없습니다. 3차원 인류가 시공간을 초월하는 4차원적 존재로 진화하게 되는 대변혁에 들어서게 되었으니 이도 운명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생물학적 진화가 아닌 도구를 사용하는 인간이 도구적 진화를 극단으로 끌어올리고 있는 이 변화에 대해 옳고 그름을 판단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사용하고 있고 진입해 버렸습니다. 다만 고민해 보아야 할 것은 다른 방법은 없냐는 것입니다. 특히 생명력을 잃어버린 콘텐츠에 다시 가치를 복원하는 일은 불가능하냔 말입니다.
#2. 物性, 유형일 것
사람은 무엇을 삽니다. 무엇 말입니다. 손에 잡히는 무엇, 만질 수 있는 무엇을 삽니다. 경험을 사는 것조차 유형을 가진 무엇들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가상세계의 게임조차 말이죠. 단말기를 통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만질 수 없는 것에 사람들은 가치를 지불하기를 주저합니다. 곧 사라져 버릴 것 같으니 말이죠. 기껏 돈 주고 샀는데 비눗방울처럼 사라져 버린다면 얼마나 허망할까요? 그래서 우리는 비눗방울이 아닌 비눗방울 기계를 돈 주고 사는 겁니다.
사람은 무형의 것에 가치를 지불하기를 주저합니다. 공기를 돈 주고 사지 않듯이 말이죠. 그러나 같은 존재여도 공기가 응축하여 얼음이 되거나 액체가 되면, 그것에는 가치가 발생합니다. 만질 수 있고 감각할 수 있기 때문이죠. 그래서 우리는 그것을 돈 주고 사기를 주저하지 않습니다. 그것에서 가치가 발생합니다. 유한한 것에 가치를 지불하고 유형을 가진 것에 가치를 지불합니다. 만질 수 있는 그것 말이죠. 물성이 있는 그것 말이죠.
콘텐츠가 물성을 잃었을 때, 사람들은 보고 들리는 속성에 아무런 변화가 없음에도 가치를 지불하기에 주저하게 되었습니다. 무한대로 복제가 가능하니까. 언제든 들을 수 있으니까 돈 주고 살 필요를 느끼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몸을 잃고 데이터화된 콘텐츠는 공간에서 분리되어 시간에 종속되고 만 것입니다. 특정한 시간에 잠시 경험하고 사라지는 풍경처럼 되어버렸습니다. 있으면 좋겠지만 없어도 그만인..
유형을 상실한 콘텐츠는 천덕꾸러기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하드를 가득 채우고 들어차 있는 것도 못마땅하여, 어디 거대한 구름창고(클라우드)에 몰아넣고 필요할 때만 불러내어 잠시 경험하고 잊는 그런 가상의 일시적 존재가 되어버린 겁니다. 뭐 어떻습니까? 시간을 살고 있는 우리는 소유가 아닌 시간을 아름답게 해주는 것만으로도 만족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러나 그걸 돈.주.고. 살. 이유는 없는 겁니다.
#3. 사람은 무엇을 사는가?
사람은 생명을 삽니다. 유한한 것. 사람은 만질 수 있는 것을 삽니다. 유형일 것. 그것을 너무 쉽게 포기했습니다. 무방비상태에서 급속한 진화가 이루어졌습니다. 아날로그 세계에서 디지털 세계로의 진화과정에서 중요한 그것을 생략한 것입니다. 급한 마음에 물성을 포기한 채 뛰어든 네트워크의 바다는 참으로 잔인했습니다. 왜 사는지. 기껏 어렵게 3차원 세계에 탄생하고서 저 하늘에서 하던 짓과 똑같은 경험을 추구하게 되었는지. 질문해야 합니다. 우리들 자신에게 질문해야 합니다. 이것은 마치 비싼 돈 주고 자유이용권을 끊고 들어온 놀이동산에서 어트랙션은 안타고 테트리스나 하고 앉아 있는 노릇입니다. 바보 같은 짓인 것입니다.
LP와 TAPE, CD와 DVD 그리고 PAPER 등. 그간 콘텐츠를 담아왔던 몸들이 0과 1로 구성된 디지털 파일로 변화하자, 몸을 잃은 콘텐츠의 가치는 급전직하하게 되었습니다. 음악의 경우 그 가치는 이쑤시개 한 개의 값어치만도 못하게 떨어졌고, 디지털 콘텐츠는 그 특성상 무한 복제가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전파와 주파수를 따라 공기 중에, 전자기판에 흩어진 콘텐츠의 몸을 되찾아 주지 않으면, 그들은 더 이상 세상에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지 못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들을 낳아주는 창작자와 제작자들이 모두 사라져 갈 테니까요.
3차원과 4차원의 경계에서 인간은 길을 잃었습니다. 영원한 존재를 만들어 놓고 어서 빨리 사라하고, 만질 수 없는 존재를 만들어 놓고 가지라 종용합니다. 누가 가치를 지불하겠습니까? 얼마든 넘쳐나는 그것과 보이지도 않는 그것을 누가 사겠습니까? 얼마나 사겠습니까? 팔리지 않는 콘텐츠를 누가 만들까요? 노래 잘 들었다며 내미는 이쑤시개로 태산을 이룬 들 밥 한 끼 따뜻하게 먹을 수 있겠습니까?
그대는 무엇을 팔고 싶습니까?
그대는 무엇을 사고 싶습니까?
이 급진적인 진화의 과정에서 우리는
무엇을 놓쳤습니다.
리플릿. 그것 말입니다.
[리플릿 : Activating Evolu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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