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상 난 고래집 문턱
"그건 좀 충격적이었어요. 소위 고래라고 하는 계정들에 댓글이 무한루프를 타고 있더라구요. 스크롤을 계속 내려도 끝도 없이 반복되는 '잘 읽었습니다', '잘 봤습니다' 음.. 처음에는 '이건 뭐지?' 하다가 어느새 나도 댓글을 달고 있는 거예요. 뭐 어쩔 수 없는 일이죠. 고래의 보팅과 뉴비의 보팅은 골드바와 모래 속 사금만큼 보상이 달라지니까요. "
기왕이면 고래랑 친분을 맺어야 합니다. 어차피 하루에 올라오는 글을 다 읽을 수도 없는 마당에 서로 팔로잉한 계정들끼리 보팅을 주고받게 되는데, 기왕이면 보팅 한방에 엄청난 금액이 찍히는 고래랑 친분을 맺는 게 이득인 것입니다. 그러면 그 고래와 안면을 터야 하는데 어떻게 안면을 트겠습니까? 일단 인사라도 하고 보는 거죠. 뉴비들의 계정이 서로서로 안면을 트고 팔로잉을 하느라 댓글이 상호적이고 양방향적이었다면, 고래들의 계정은 뉴비들과 비고래 계정들의 댓글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초상 난 정승집 문턱 마냥..
"댓글이 달리기가 무섭게 대댓글을 다는 뉴비들과는 달리, 고래들은 댓글도 별로 없고 포스팅도 드문드문 이었어요. 어쩌겠어요. 그 수많은 댓글에 어떻게 일일이 응답을 하겠어요.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죠. 그러다 보니 고래의 보팅과 댓글은 더 위상이 강화되었죠. 어쩌다 하나 달린 고래의 댓글이 마치 대통령 표창장 같은 느낌이었다고 할까. 성은을 입는 분위기였다니까요. 그런데 그러다 보니 하나둘 알게 되는 거죠. 아.. 이게, 이게 아닌데."
스팀잇에서 포스팅을 하고 보팅을 하는 행위는 그것 자체가 코인을 채굴하는 행위입니다. 전기를 돌려서 채굴을 하든, 글을 써서 채굴을 하든, 어차피 코인을 채굴하는 행위의 목표는 본질적으로 같은 것이죠. 남보다 먼저 더 많은 코인을 채굴하겠다는. 그러면 그렇다고 스팀잇에 글을 많이 쓴다고 해서 채굴을 많이 할 수 있느냐? 그건 아니란 말입니다. 누군가 내 포스팅에 보팅을 해주어야 하고, 기왕이면 코인을 많이 가지고 있는 고래가 보팅을 해 주어야 코인을 더 많이 획득할 수 있는 시스템이란 말이죠. 심지어 내 작은 보팅도 예상 보상액이 크겠다 싶은, 그러니까 고래가 보팅을 해주어서 보상액이 커질 포스팅에 보팅을 해야 보팅수익을 높일 수 있습니다. 그러면 좋은 글, 인기 있는 글을 많이 써서 보팅을 많이 받으면 고래가 될 수 있는 걸까요?
135년, 살 수는 있을까?
"모두들 처음에는 무작정 글 쓰고 보팅하고 댓글 달고 열심히 활동했는데 하면 할수록 뭔가 요원해 보이는 거죠. 내 포스팅에 돌아오는 보상 액수와 고래 또는 고래가 보팅한 포스팅에 돌아오는 보상액의 차이가 너무 큰 거에요. 고래는 자기가 직접 돈을 투자해서 코인을 샀으니 그러려니 하는데, 글을 써서 코인을 채굴하는 것으로 과연 고래가 될 수 있는가 하면 그렇지가 않다는 말이죠. 이걸 하나둘 의아해하다가 누군가 그걸 계산했어요. 글만 써서 고래가 되려면 당시 시세로 적어도 135년이 걸린다는.."
135년, 매일 글을 쓰고 포스팅을 올려서 충분한 보상을 받는다 해도 고래가 되려면 135년이 걸린다는 얘기입니다. 고래가 아니고서는 말이죠. 135년을 글을 쓸 순 있겠지만 135년을 살 수가 있을까요? 그것은 스팀잇의 시스템이 창작자를 위한 시스템이 아니란 것을 분명히 하고 있는 것입니다. 포스팅은 채굴의 행위일 뿐, 비트코인이 수학자를 위한 플랫폼이 아니듯 스팀잇이 창작자를 위한 플랫폼이 아니라는 것이죠. 암호화폐 채굴을 위해 채굴의 행위를 글로 선택했을 뿐이지, 보상에 굶주린 작가들을 위하여 만들어진 공간이 아니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누가 글을 쓸까요? 누가 자본 투자 없이 글을 쓰고 댓글을 달고 보팅을 해서 고래가 될 수 있을까요? 고래가 아닌 작가들에게 스팀잇은 아무 쓸모가 없는 플랫폼일까요?
"그러나 그럼에도 스팀잇은 매력적인 공간이에요. 채굴의 방식을 글쓰기로 채택했다는 것만으로도, 그간 중앙화된 자본에 휘둘려 충분히 기회를 얻지 못한 창작자들에게 새로운 기회가 되어 줄 수 있으니까요. 게다가 전 세계 100만의 회원을 확보한 글로벌 플랫폼이 아니겠어요. 가능성은 무궁무진해 보였어요. 그러러면 창작자와 자본, 그러니까 비고래 작가들과 고래들이 투명하게 소통하고 효율적으로 연대할 수 있어야 하죠. 이미 판이 다 짜여져 어디 비집고 들어갈 틈도 없는 사회의 중앙화된 시스템 말고, 새로운 판을 짜보자고 시작된 이 블록체인/암호화폐 시스템이, 한계에 다다른 인류의 경제시스템에 새로운 돌파구를 마련해 줄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요."
나는 고래가 되지 않겠습니다
저는 자본주의의 힘은 투자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화폐경제가 그 내막을 까보면 허상에 불과하지만, 우리는 그 허상의 미래가치를 믿고 자신의 재능을 투자하고 문명을 건설해 왔습니다. 인류는 급속한 문명의 진화를 이루어왔고 그렇게 인류는 미래로 나아왔습니다. 현재가치만을 교환하는 물물교환 시대에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당장 교환할 수 있는 현재가치를 현물이든 뭐든 보여 줄 수 있어야 하니까요. 그러나 자본주의는 투자라는 신기술을 선보이며 '좋아 너의 미래를 믿어 줄 테니까 그것을 증명해 보이렴' 하고 사람들의 꿈과 야망에 날개를 달아 주었습니다. 이것이 자본주의의 힘입니다.
우리는 자본주의 사회에 살면서도 자본주의를 몹쓸 것으로 여기지만, 자본주의가 아니었다면 우리 대부분은 60을 넘기지 못하고 죽었을 겁니다. 투자는 사람의 미래가치를 잠재력에서 현실로 끌어올렸습니다. 그것으로 우리는 달나라에도 가고 수명을 100살 너머로 연장시켜 온 것입니다. (심지어 얼굴도 바꿔줍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의 투자와 그 결과물의 배분은 세금, 복지뿐만 아니라 재투자를 통해 이루어져야 합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람들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누구나 자본의 도움으로 자신의 가능성에 도전할 수 있고, 결과를 실현시킬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게 60살 커넬 샌더스 같은 할아버지도 투자를 받아 갑부가 될 수 있는 자본주의 사회의 동력입니다. 누구나 자신의 가능성에 도전해 볼 수 있는 사회. 그리고 실패를 몇 번 하더라도 언제든지, 몇 살이든지 재도전할 수 있는 사회. 그게 자본주의 시스템의 근간입니다. 그리고 미국식 자본주의 사회가 끝없이 성장해 온 원인입니다. 투자만 하고 끝이 아닙니다. 실리콘밸리의 투자문화는 정말 파트너가 되어서 인맥도 연결해 주고, 필요한 기술도 확보해 주고, 실질적인 결과를 맺기 위한 과정들에 적극적으로 참여합니다. 몇 번 실패했는가는 오히려 좋은 경험이고 이력입니다. 이것이 아메리칸드림의 실체입니다. 그리고 미국 자본주의의 위기는 자본이 투자가 아니라 돈놀이로 변질되었기 때문입니다.
"자본주의 사회에 살면서 자본을 적으로 돌리면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게 됩니다. 자본 없이 생산할 수 있는 것이 없으니까요. 글을 쓰기 위해 하다못해 볼펜 한 자루라도 돈을 주고 사야 하니 말이죠. 그러나 자본 역시 자본만으로는 할 수 있는 게 없습니다. 돈을 지져 먹고 볶아 먹을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요. 뭘 사려면 누가 팔아야 하고 누군가 생산을 해야 하는 거니까요. 그러므로 자본과 기술, 재화는 떨어질 수 없는 동전의 앞뒷면 같은 것인데, 새로운 경제 시스템이 되어줄지도 모른다며 기대를 끌어모은 암호화폐 시스템은, 돈만 모았지 아무런 기술도 재화도 생산해 내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었어요. 유통조차도. 언젠가는 쓰일 거라는 막연한 기대 심리로 돈만 끌어 모았죠. 그런데 스팀잇은 자본과 그 자본을 바탕으로 생산된 결과물을 바로 보여 줄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시스템이었어요. 그래서 이건 다르다 느꼈고 스팀잇에 참여하게 되었죠."
스팀잇에서 고래들은 자본가이고 창작자들은 혁신가가 될 수 있을 겁니다. 그리고 고래의 자본과 창작자의 재능이 만나면 정말 탈중앙화의 이념을 실현해 볼 수도 있을 겁니다. 다른 코인들이 오로지 신흥부자를 꿈꾸는 자본가들의 돈 놓고 돈 먹기 이상이 아니었다면, 스팀잇은 글쓰기라는 명확한 의사교환의 장이자 창작이라는 새로운 가치를 생산해 낼 수 있는 혁신성을 가지고 있었으니까요.
"그런데 그러려면 창작자들한테 희망이 있어야 해요. 나도 글 써서 고래가 될 수 있다는 희망. 그런데 135년이 걸린다니. 그러면 그냥 포기할까요? 그래도 우리는 이제 대화를 시작했잖아요. 상호작용을 시작했잖아요. 이미 견고히 쌓아 올린 바깥세상의 자본의 장벽을 어떻게 무너뜨리겠어요. 첫 단추를 잘못 끼웠거나 변질되어 그렇다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이 새로운 시스템에서 다시 도전해 봐야 하지 않겠어요? 그래서 이 마법사는 아예 고래가 되지 않겠다고 선언해 버렸어요. ([선언] 저는 고래가 되지 않겠습니다) 그러니까 글만으로 고래가 될 수 없다면 이 플랫폼이 창작자들에게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 투자자들에게만 유의미한 시스템이라면 다른 코인들과 다를 게 무엇이냐? 그렇다고 투자자를 다 내쫓아 버리면 보팅은 누가 해주냐? 코인을 잔뜩 채굴한들 아무도 사주지 않으면 무슨 소용이냐? 그러니 고래는 고래의 입장에서, 창작자는 창작자의 입장에서, 서로 협력하여 함께 발전해 갈 수 있는 방안을 연구해 보자. 이 빈털털이 마법사는 열심히 글을 쓰겠다. 그러니 이 마법사가 글 써서 고래가 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어 보자."
그럼에도 저는 기대를 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파도의 시작이니까요. 지금의 초기 스티미언들이 계속 소통하며 창발적으로 진화해 간다면 스티밋은 역사를 바꾸어 놓을 수도 있습니다. 어쩌면 후대에 우리의 논의가 애덤 스미스와 마르크스의 반열에 오를지도 모를 일입니다.
스티밋 생태계를 활용하면 현실에서 하지 못한 새로운 분배 방식을 실현 시킬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스티밋 생태계 자체로 기본소득제를 실현시킬 수도 있을 겁니다. 젊은 창작자들에게 보팅으로 월급을 주고 그들의 포텐셜을 쉐어할 수도 있을 겁니다. 오프라인과 연결하여 다양한 스타트업들을 일으킬 수도 있을 겁니다.
선언과 시도
그래서 저는 저부터 시도해 볼 생각입니다. 자본과 창작의 효과적인 연대를 위한, 자본과 창작의 분리 말이죠. 그러려면 먼저 고래 눈치 보며 포스팅하지 않아야 합니다. 보기 좋은 글을 쓰다 보면 다양성이 훼손되고 스스로도 금방 지칠 테니까요. 제 포스팅의 색깔을 놓지 않을 생각입니다. 그러다 보면 보상은 줄어들거나 늘어나지 않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무엇보다 창작자로서 고래가 될 수 있는지 없는지를 먼저 시도해 볼 생각입니다. 그게 아니면 코인 투자자들 외에는 스티밋에 참여할 이유가 없어질 테니 말이죠.
어찌 보면 처음부터 결과가 나와 있는 도전이자 시도였는지도 모릅니다. 자본가와 노동자, 자본가와 창작자의 연대와 발전적 상호작용. 수백년간 인류가 온갖 시행착오를 겪으며 발전 시켜 온 이 시스템이 한계에 다다랐다고, 새로운 대안이 필요하다고 등장한 이 블록체인/암호화폐 시스템 그중 스팀잇은, 그 시작부터 본질적이자 결정적인 문제에 대한 답을 내놓아야 했습니다.
고래전쟁이 연달아 터져 나왔기 때문이죠.
창작자가 투자자들의 노예가 되지 않는 시스템이 되어야 겠네요. 여러가지를 생각해주는 글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