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백능선 수풀 사이로 이어진 목책길 트레킹
대피소의 새벽은 늘 부스럭거리는 소리로 열린다. 여기저기서 휴대폰 불빛에 의지해 침상을 정리하느라 꼼지락대는 바람에 이미 잠은 달아났다. 누운 채 뒤척이다 취사도구를 챙겨 밖으로 나왔다. 폐부 깊숙히 새벽공기를 들이킨다. 상쾌함이란 이런 느낌을 두고 하는 말일게다. 불금의 밤을 동숙한 산객은 열댓명이 고작이다. 설악산과 지리산대피소의 정신사나움은 어디에도 없다. 여유만만이다. 주말 저녁이면 상황이 다를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연화봉대피소의 이른 아침은 서늘한 바람과 운무로 시작됐다. 강우측량탑의 거대 둥근기둥(圓柱)은 아침햇살을 받아 금빛으로 물들고 운무와 숨바꼭질 중인 주변 산군은 시시각각 변화무쌍한 모습을 펼쳐보이느라 용을 쓴다. 일행 셋의 조식은 라면에 김치, 햇반에 김이 전부다. 성찬이 뭐 별겐가! 여기에 사위 풍광을 더하면 십이첩반상인데.
다시 배낭을 챙겨 소백산 천문대 방향으로 길을 나섰다. 운무에 갇혔던 소백 능선이 살포시 속살을 드러내자, 길섶에 핀 야생화들도 수줍게 객을 반긴다. 산모롱이를 돌아들자 돔지붕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별 볼일 있는 곳' 소백산 천문대다. 천체관측 연구가 이뤄지는 우리나라 최초 국립 천문대이기도 하다.
연화봉(1,394m)은 천문대와 300미터 거리를 두고 이웃해 있다. 연화봉 데크 사방으로 야생화가 지천이다. 겨울 소백은 천상설원이나, 여름 소백은 산상화원이다.
연분홍 철쭉이 만개했을 6월초엔 밀려든 산객들로 몸살을 앓았을 연화봉이지만 오늘만큼은 적막강산이다.
일행 셋은 정상표시석 기단에 걸터앉아 한껏 여유를 부려 보기도 했다. 산객들이 몰리는 시간대에는 어림없는 일이다. 정상석 앞은 늘 인증샷을 날리기 위해 줄을 서야 하기 때문이다.
운무의 향연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제1연화봉에 이르는 동안 초록 산자락은 온전히 모습을 드러내다가도 이내 코 앞에서 증발해 버리길 거듭했다.
연화봉에서 비로봉에서 이르는 일대는 수목한계선의 바로 아래 부분인 아고산(亞高山) 지대로, 키작은 나무와 초지로 이루진 육산이어서 산세가 완만하다.
초록초록한 수풀 사이로 아득하게 이어진 목책길은 여름 소백능선 트레킹의 '핵잼'이다. 바람에 일렁이는 수풀은 파도를 연상케 한다. '小白草波'라 표현하고 싶다. 수풀파도에 실린 싱그런 풀내음이 사방으로 번진다. 비로봉에 이르는 동안, 잠시 나를 잊었다. 무아지경이다. 소백의 품은 이렇듯 미혹한 중생도 기꺼이 품어 준다. 그렇게 무념무상으로 비로봉(1,439m)에 섰다.
바람이 스치고 지난 능선에 들꽃 향기가 번진다. 지그시 실눈을 뜨고 초원을 응시한다. 어디선가 도레미송이 들려오는 듯 하다. 초원 저편에서 마리아의 손을 잡은 일곱 남매의 모습도~ 여름 소백 능선에 서면 추억의 명화, '사운드오브뮤직'의 아름다운 영상이 오버랩 된다.
소백산의 주봉, 비로봉(1,439m).
한겨울 이곳은 눈보라와 독한 칼바람 때문에 잠시 머물기 조차 힘들다. 그러나 여름의 비로봉은 비록 그늘은 없어도 바람이 더없이 서늘해 내려서기가 싫은 곳이다.
애초 계획은 국망봉 찍고 초암사 방면으로 하산하는 거였다. 그런데 산우 C가 슬슬 바람을 잡았다. "여기서 비로사 방면으로 하산해 달밭골에서 시원한 탁배기로 마무리 하는 걸로~" 그러자 후배 S가 "국망봉이 코 앞인데 그냥 계획대로 쭈욱 걷지요"라고 진지 모드로 쐐기를 박는 통에...
내심은 '달밭골 탁배기'에 관심이 쏠렸지만 후배의 청을 따르기로 했다. 그나저나 초보산꾼인 후배 S의 체력이 슬슬 방전되어 갈텐데...조금 걱정은 되나 다시 국망봉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비로봉에서 국망봉 방향으로 400m를 진행하면 갈림길이 나온다. 갈림길에서 백두대간길을 버리면 충북 단양 어의곡리로 내려선다. 어의곡리는 여러 '산악회'가 들머리로 즐겨 찾는 곳이다.
이제 소백의 너른 초원을 뒤로하고 오롯한 숲길로 들어섰다. 초원을 벗어난 아쉬움은 새소리와 숲내음이 달래준다. 숲그늘이 주는 안온함은 초원을 걸을 때와는 또다른 느낌이다. 연화봉에서 비로봉 구간이 잘 닦여진 포장도로라면 비로봉에서 국망봉 구간은 요철이 심한 비포장 소로다. 그만큼 체력 소모도 감안해야 한다.
앞서 걸어가 이미 시야에서 벗어난 산우 C를 따라잡을 요량으로 걸음을 서둘렀다. 그럴수록 뒤따르는 후배 S와의 거리는 벌어졌다.
다시 숲길이 열리면서 사방이 탁 트였다. 국망봉이 코 앞에 바짝 다가섰다. 이곳 갈림길에서 우측으로 내려서면 오늘 산행의 날머리인 초암사 주차장이다. 앞서 걷던 산우 C도 걸음을 멈춰 땀을 훔치고 있다. 배낭을 내려놓고서 뒤따르는 후배 S를 기다렸다. 10분정도 지났을까, 한쪽 바짓가랑이를 걷어 올린 채 기진맥진한 모습으로 나타났다.
무릎 부위에 찰과상을 입어 수건으로 동여맸다고 했다. 때마침 길목에 비상구급함이 있어 사용안내에 따라 국립공원관리사무소로 전화해 자물쇠 비밀번호를 받았다. 그러나 알려준 번호로 열리지 않았다. 뭐가 문제인지,, 정말 응급조치가 필요할 경우를 대비해 관리사무소 측의 수시 점검이 필요해 보인다.
아무튼 가벼운 찰과상으로 입산 신고식을 치룬 셈이다.
곧장 300m를 더 진행하여 국망봉에 닿았다. 거뭇거뭇한 바윗덩이 아래, 얌전히 놓인 정상표시석에는 '小白山 國望峰 1,420m'란 글씨가 음각되어 있다.
신라 마지막 왕인 경순왕이 왕건에게 나라를 빼앗겨 명산 대찰을 떠돌자, 왕자인 마의태자가 신라를 회복하려 나섰지만 실패했다. 결국 왕자는 엄동설한에 베옷 한벌 걸치고서 망국의 한을 달래며 금강산으로 향하는 길에 이곳 봉우리에 올라 옛도읍인 경주쪽을 하염없이 바라보며 눈물지었다 하여 '國望峰'이라 부르게 되었단다. 물론 다른 '說'도 있다.
국망봉을 뒤로하고 삼거리로 유턴해 능선을 내려섰다. 국망봉 삼거리에서 초암사까진 3.8km. 가파른 목계단은 국망봉 아래 '돼지바위'가 있는 곳까지 급격히 고도를 떨구었다. 돼지바위의 미소는 언제봐도 넉넉하다. 산아래 읍내 웬만한 식당에는 이 그림이 다 걸려 있을 정도로 복을 안겨준다는 돼지미소바위다.
돼지바위에서 초암사까지는 3.5km다. 너덜너덜해진 삭신을 추스려 다시 걸음을 뗐다. 그렇게 파김치가 된 일행 셋의 픽업을 위해 고향친구에게 연락했다. 흔쾌히 차를 몰고 초암사 뜰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어제, 죽령 고갯마루에 두고 온 애마와 접선은 그렇게 이루어졌고, 죽령주막에 들어 수다를 떨다가 늦은 오후의 따가운 햇살을 정면으로 맞받으며 분당으로~ 서울로~.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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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무가 너무 아름다워요 ~ 절의 정취도 끝내주네요
등산을 좋아하시나보네요.. 멋집니다.~~
예~ 많이요. ㅎ
엄청 멋잇네요! 산에 한번 가보고싶습니다.
사방이 산인 우리나라, 참 좋죠.
야생화가 가득 피었네요~
실제로 보면 더 예쁘겠죠?
와 목책길 진짜 예뻐요. 새벽공기를 맡으며 거닐고 싶네요. 초보자도 올라갈만한가요? 가보고싶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