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상심리의 밤
비워낸 것이 마음이었다면, 채운 것도 마음이었다.
3박 4일의 여행의 말미에 예견된 태풍은 온화한 휴양지 같은 오키나와의 자연을 느끼고 감상할 기대를 비워내게 했다. 그래도 왔으니, 그 대신 무엇이라고 채우고 싶은 것이 사람의 마음. 여행길에 채울 것으로 쇼핑만한 것이 없으며, 해도해도 끝없이 채워지지 않는 듯한 마음때문에 멈출 수 없는 것 역시 소비이다.
시간도 미리 땡겨서 썼다. 원래 계회대로라면 첫 날은 저녁 도착인 관계로 근처에서 간단히 저녁을 먹는 것이었지만, 마지막 날엔 호텔에 꼼짝없이 갇힐지도 모르기 때문에 상점이 끝날 때 까지 시간을 불태워보기로 했다.
호텔에 짐만 풀고 바로 국제거리로 나섰다. 관광객이 가장 몰리는 거리, 대로변에서 호객 행위가 끊이지 않는 거리, 밤 늦게 까지 북적이는 거리가 바로 국제거리다. 한국인과 중국인은 참 어딜가도 많은데, 이곳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처음 찾아간 곳은 국제거리에서 걸어가다 오른쪽으로 꺾어 들어서면 갑자기 인적이 드물어지는 골목에 위치하고 있는 빈티지 샵이었다. 나무로 된 창틀과 문 앞에 옷과 천가방 같은 것들이 늘어져있는 곳. 안에도 캐주얼 의류들이 한가득이었는데, 그야말로 수수하고 허름해보이는 가게였다. 파는 건지 팔리는 건지 의심스러운 오래되고 낡은 동화책들도 한 켠을 차지하고 있었다. 길에서 우연히 마주쳤다면 정말 그냥 지나칠 법한 곳이었다.
인스타그램에서 괜찮은 빈티지 샵들을 몇 군데 찾아놨었는데, '파이어 킹'이란 잔을 판다는 사실 하나로 이곳을 찾아갔다. 파이어 킹이란 1940년대에서 70년대 사이에 생산된 유리로 된 특정 식기류를 지칭하는데, 한마디로 오직 빈티지로만 존재한다는 뜻이다. (불소소 Episode20. 잔 편을 들으신 분이라면 알고 계실 듯 하다.) 팟캐스트를 준비하면서 찾아보고, 내가 들러본 을지로 카페의 빈티지 잔과 그릇, 연남동에서 발견해서 선물로 받은 빈티지 유리잔 등으로 인해 나의 빈티지 잔에 대한 환상은 한껏 부풀어 있었다.
해양스포츠에 쓸 돈도 굳었겠다, 이래저래 돈을 쓸 모든 마음과 환경의 준비가 갖춰져 있는 나를 발견했다. 내가 알고 있던 파이어 킹은 옥색 뿐이었는데, 반투명한 흰 머그잔들이 전부 파이어킹이었다. 생각보다 둔탁하고 무거운 편이었다. 사진 속 저 초록색 개구리가 가장 맘에 드는 아이템이었는데, 가격을 확인하고 벽에 부딪혔다. 발견하는 순간 레트로 그 자체야!하고 말했지만, 개구리를 20만원대에 산다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을까를 생각하며 나 자신을 회유하기 시작했다.
결국 10분의 1의 가격인 PYREX라는 또 다른 빈티지 커피잔과 연대 모를 반투명 접시를 샀다. (사진엔 없다.) 그것들도 마음에 드는 것들이었으니, 후회는 없다. 돈 쓰는 것은 이제 시작일 뿐이니까. 괜찮은 시작이었다.
첫 맛
매력적인 빈티지 샵 골목은 시간이 늦어 상점이 대부분 문을 닫은 상태였다. 이제 오키나와의 '맛'을 처음으로 경험할 차례. 음식점이 넘쳐나는 곳이기에 선택이 더 어려웠다. 여행을 오면 꼭 비싼 건 먹지 않아도 소박하면서 그 도시를 느낄 수 있는 감성적인 음식점이나 카페를 열심히 찾게 된다. 사실 그런 곳을 찾는 것은 비싼 곳 찾는 것 보다 더 어렵다.
사람들로 북적이는 맛집 거리도 발견했지만, 걷고 또 걸었다. 태풍으로 인한 '일정 차질'에 대한 손해를 맛으로 채워줄 음식이 어디에 있을까. 뭐 속으로는 그런 심리였을지도 모르겠다. 이래저래 어찌저찌해서 작은 이자카야에 들어왔다. 일본식 냉면, 맥주, 꼬치구이를 먹었다. 꼬치구이는 곱창꼬치가 인상적이었던 기억.
냉면의 고명 조합은 엄마의 냉면을 떠오르게 했다. 북에서 피난내려 오셨던 할머니에게 전수받은 엄마의 냉면은 직접 반죽한 면을 밀어 칼국수면처럼 굵게 썰고, 소고기 볶음과 오이무침이 고명으로 올라간다. 맛이 꽤 좋은 오키나와 냉면이었지만, 엄마 냉면은 그 어떤 평양+함흥도 못이긴다. 물론, 엄마가 실컷 해주던 어린 날엔 깨닫지 못했던 소중함이다.
무념무상과 혼비백산
남들 다 간다는 돈키호테에 나도 좀 가보자. 나도 동전파스 좀 사고 폼클렌징 좀 사보자. 하는 마음에 마지막 날에 가려던 돈키호테 역시 첫 날에 바로 들렀다. 지하1층부터 4층까지 24시간 내내 불이 켜진 곳. 설레는 마음 안고 4층에서 부터 찬찬히 구경하기 시작했다. 정말 없는 게 없는 곳이었다. 전자제품에서 부터 운동기구, 화장품, 식료품 등등. 카니예 웨스트마저 일본에 가면 돈키호테에 들린다는데 그럴만 했다.
모든게 너무 많아서 고르기가 어지러울 정도로 물건이라는 것이 산더미로 존재하는 곳이 바로 돈키호테였다. N블로그에는 친절하게 '돈키호테 쇼핑리스트'를 이렇게 저렇게 나열해주고 있었다. 꼭 사야할 것!이 존재했는데, 동전파스와 센카 폼클렌징, 수액패치.. 여기까지 보고 두통이 올 것 같아서 그 다음부턴 그냥 구경하면서 조금씩 담았다. 사실 첫 날에 저렇게 사고 마지막 날에 가서 두 배로 더 샀다...
모순적이게도 내가 공항에서 읽은 책은 잡지 '뉴 필로소퍼'였는데, 하필 공감가는 내용이 있어서 페이지를 사진으로 찍어 두었었다. 돈 문제는 돈으로 해결할 수 있지만 돈 문제가 아닌 일을 돈으로 해결하려고 하면, 돈만 쓰게 되고 허기짐이 채워지지 않는 다는 내용이었다. 돈키호테에 도착한 순간 그 책의 구절을 떠올렸는데, 이 많은 물건들은 다 얼마나 빠르게 많이 생산되고 선택되어지며 버려지는 것일까 생각해 보았다. 가장 모순적인 건 '지금 내 모습'이라고 생각했지만, 원래 인간을 모순적이라며 내가 나를 달랬다.
물건에 둘러쌓여 허겁지겁 물건을 담아내며 정신을 잃긴 했지만, 혼비백산하게 한 또 다른 일이 있었다. 지하1층 식품 코너에서 장을 보다가 간질환자가 쓰러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일본어도 영어도 못하는 순간에 당황하니 어떤 단어도 떠오르지 않았다. 오직 할 수 있는 건 바디랭귀지 뿐이라서, 카운터에 달려가 손으로 환자가 쓰러진 방향을 가리켰다. 누군가가 전화를 했고, 누군가가 환자의 몸을 옆으로 돌려 진정할 수 있게 해주었다. 상태가 걱정되기도 하고 얼떨결에 최초발견자가 되어 쉽게 발을 돌리지 못하고 있다가 들것과 함께 사람들이 도착한 것을 보고 계산대로 발을 돌렸다.
오키나와에서의 첫 밤을 그렇게 흘러갔다.
꿈을 꾸었다면 태풍 걱정과 소비로 달래보는 보상심리, 걱정과 놀람, 내일에 대한 생각 등으로 인해 끔찍한 혼종이 등장했을 법한 감정과 경험의 조합이었다.
감정의 여정, 오키나와에서
이 글은 스팀 기반 여행정보 서비스
trips.teem 으로 작성된 글 입니다.
개구리는 샀어야 하는 게 아닌가...싶은데요.. 넘 이쁘다... -.-;;
예쁘긴 예뻤어요 정말.....언젠가 다시..가서..ㅎㅎㅎ
안녕하세요. @trips.teem입니다. 항상 여행지가면 유명한 맛집보다는 로컬식당에서 밥을 먹고 싶은데 찾기가 쉽지 않네요~(결국 햄버거 먹으러 가는 경우가 제일 많은 듯합니다.) @emotionalp님 여행 첫날 너무 많은 일이 있으셔서 당황하셨겠어요~ㅜㅠ 다음 여행기도 기대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오키나와!! 완전 좋죠..^^
오키나와는 오리온 맥주가 정말 맛있는데 말이에요~
오리온 맥주 맛있었어요! 사실.. 맥주맛 구분을 크게 잘하는 편은 아니지만요 ㅎ
다채로운 경험을 하셨군요. 돌아올 때 가방이 더 늘어났겠어요.
네 아주 빵빵해서 돌아왔죠. :)
저는 돈키호테 포함 일본 드럭스토어 들어가면 상품 '가짓수'에 압도당해서 대충 보다가 도망치듯 나와버려요... 진짜 많아도 너무 많아요!
맞아요. 많아도 좀 적당히 많아야되는데 너무 많죠!ㅎㅎ 그래도 평소 올리브영에서 사는 것들을 더 저렴하게 구매한 건 좋았어요. :)
오 태풍 덕분에 일정을 빡빡하게 소화하셨네요.ㅎㅎ 잘 된건지도.ㅋ
오키나와도 참 언제 가보고 싶은데...언제가 될 지 모르겠네요.ㅋ
제주도가 있어서 더 그런지도.ㅎ
오키나와도 그 만의 매력이 있더라고요. 제주도랑 비슷하면서도 다른 부분을 찾는 재미도 있을 것 같아요. 중요한건 날씨와 타이밍인거같아요 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