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탈(解脫)
그해 겨울, 18번의 계절의 반복 속에 언제나 그랬듯이 평범하게만 보내면 안 될 것 같은 느낌, 아니 다르게만 보내야만 했던 겨울이었다.
가정의 불화와 계속된 안 좋은 일, 우연이라 하기에는 점철되어 있고, 필연이라 하기에는 너무나도 잔인한 시간의 연속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이 지긋한 굴레를 깨고 나가야만 했다.
숙명이다. 뭔가에 이끌리듯 나는 마치 계획된 것인 마냥 행동하였다.
당시에는 지금의 포털 사이트와 같은 검색엔진이 크게 발전하지 않은 터라 막무가내로 114에 전화를 걸었다.
“부산 근처에 있는 공부 가능한 절과 암자 전화번호좀 다 불러주세요‘”
114 안내원도 놀랬는지 “너무 많아서 다 불러드리긴 힘들고, 대표적인 사찰 두 군데만 번호 알려 드릴게요.”
안내원의 음성에서 나온 두 군데의 사찰에 전화를 걸었다. 큰 사찰에서는 그 사찰에 속해있는 암자 전화번호를 수십 군데 다시 가르쳐 주었다. 공중전화가 나의 ‘100’ 이라 쓰인 쇳조각을 열 개쯤 삼켰을까? 점심시간은 어느덧 5분여 남짓 남게 되었을 때 결국 운명과도 같이,
그해 겨울 나를 받아줄 암자를 찾았다.
“그래 한번 와 보슈, 우리 암자에서 사법고시 공부한 사람들 다 합격하였다네.”
조금은 어눌한 그러나 넉넉함이 느껴지는 목소리셨다.
그렇게 나의 한 달간 통도사 백운암 암자에서의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담임선생님과 부모님께 말씀드리고 그해 겨울 보충수업과 자율학습을 나는 빠질 수 있었다. 웬일로 독사 같은 담임이 흔쾌히 한 번에 허락하다니, 아마도 나의 개인사를 다른 친구를 통해 들었나 보다 싶었지만 어디까지나 추측에 불과하다.
백운암은 양산 통도사가 위치한 영축산의 제일 꼭대기에 자리잡고 있었다.
밤 산행은 처음이었다. 어두운 산길 속에서 드문드문 비치는 등불과 달빛이 내 앞길을 유일하게 반겨주는 듯 보였다.
낯선 염불과 목탁소리, 그리고 보살과 처사님들의 끝도 없는 앉았다 일어 섰다의 반복. 몸만 커 버린 어린 내 눈에 비친 그들의 모습은 간절하다 못해 처절하게까지 느껴졌다.
그렇게 그들의 한바탕 살풀이가 끝나고, 나는 ‘성현’ 이라는 법명을 가진 분과 잠깐의 대화를 나누었다.
짐을 풀고 내가 머물 곳에 몸을 뉘였다. 연탄보일러가 아닌 장작에 불을 붙여 직접 방을 데우는 곳이었다. 처음 해보는 불쏘시개 질이었지만 타들어가는 나무들을 보니, 왠지 모르게 마음이 포근해 졌다. 날리는 재 또한 그리 싫치많은 않았다.
백운암에서 지샌 밤의 수도 정확히 18일이 지났다.
하루를 1년이라 한다면 내 나이만큼 보낸 것이다.
그날의 일은 아마 잊지 못할 것이다. 아직도 이렇게 그때의 기억이 선명한걸 보면 아마 관뚜껑이 닫히는 그 순간까지 가지고 가야할 기억인지도 모른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책을 펴고 읽고 있었다.
그날은... 그래 기억난다. 미분과 극한에 관련된 문제를 풀었었다.
문제가 정말이지 풀리지 않았기에 전전 긍긍하고 있었던 찰나, 방은 정전이 되었다.
산중의 정전은 그리 생소한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영축산 제일 꼭대기인 여기에는 심야에는 전기 공급이 원활하지 못한 날이 많았다.
오죽하면 암자에 늘 구름이 걸려 있다고 이름이 白雲庵(흰 구름이 있는 암자) 이었겠는가?
익숙한 손길로 초를 찾아 아무렇지 않은 듯 초의 심지에 불을 붙였다.
그리고 언제 그랬냐는 듯이 책을 펼치고 다시 막혀 있었던 문제를 찬찬히 들여다보았다.
갑자기 이상한 냄새가 났다.
이것은 뭔가 단백질이 타는 듯한 냄새였다.
후각이 지시하는 곳으로 시각을 곤두세우자 모든 오감이 공감각화되어 버렸다.
그 냄새의 근원은 초가 있는 곳이었고, 나의 시선은 반쪽이 타 들어간 촛농위에 떠다니는 나방의 날갯죽지에 고정되어 있었다.
나방이 불빛을 보고 달려들다가 피하지 못하고 촛불에 타들어 간 것이었다.
충격이었다.
어떠한 생명체도 스스로의 생명에 대한 보호본능이 있기 마련이다.
해서 매우 뜨겁거나 차가우면 자율신경이 뇌의 지시와 무관하게 반응하여 그것을 피하게 만들어 주고, 해를 입힐 것 같은 뱀이나 독거미등을 보면 배우지 않았어도 우리는 그것으로부터 멀리 떨어지려고 한다.
그러나 그 이론은 정말 이론에 불과하였다.
나방은 그 뜨거운 불길을 피하지 않고 자신의 몸뚱아리를 그 속으로 던진 것이다.
생명이 다한 것이다. 적어도 인간이 정한 ‘생명’ 이라는 범주 내에서는 말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말로 형용할 수 없는 무엇인가가 그 시간과 공간속에 머물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내가 저 나방보다 나은 게 무엇인가?’
‘살아오면서 저 나방과 같이 생존본능을 망각할 정도로 몰입해 본적이 있는가?’
인간이 정의한 그 나방의 생명은 비록 소멸하였을지라도,
내 3평 남짓한 공간에서의 그 나방의 생명은 아직 살아서 숨 쉬고 있었다.
스스로의 의지를 관철시키고 날갯죽지 한쪽을 촛농위에 띄운 채 장렬히 산화한 나방은 마치 싯다르타가 보리수나무 아래에서 깨달음을 얻는 장면을 오마쥬 시켰다.
나방은 내가 모르는 그 무엇인가를 분명 깨달았을 것이다.
나방은 내가 보지 못한 또 다른 세상을 보았을 것이다.
잠이 오지 않았다.
이 세상에서 나의 존재는 과연 어떠한 의미를 가지는지...
그날 아침 초 위에는 나방의 날갯죽지가 촛농과 함께 굳어 박제가 되었다.
그리고 그 초는 서랍 깊은 구석에 넣어두고 다시는 사용하지 않았다.
http://www.freshfactory.kr/diary/3297
고 2 겨울방학때를 추억하며 이야기를 써 내려 가 보았습니다.
옛 기억을 추억할 기회를 주신 @marginshort @sochul 님께 감사 드립니다.
읽어 주시어 감사드립니다.
자신의 생존본능을 망각 할 만큼 불에 대한 열망을 가진 나방
그 나방이 본것이 자기의 죽음도 잊을 만큼
더 갚진것을 위해 자신을 몸을 던졌겠지요..
오늘 나에게 커다란 반성의 시간을 가져야겠습니다.
좋은 글 잘읽고 갑니다
비루한 글 좋게 봐 주시어 감사드립니다. 저 또한 백일장이라는 이벤트가 있어서 무얼 쓸까 고민하다 보니 그 때 그 기억이 떠올라 한자 한자 써 내려가 보았습니다. 무뎌진 저도 다시금 돌아 볼 수 있는 좋은 시간이었습니다.
단백질 타는 얘기라고해서 잠깐.. 죄송합니다
좋은 깨달음을 얻으셨군요
늘 관심 가져 주시고 찾아 주시어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