웨더스비 교수의 한국전쟁에 대한 첫번째 포스팅입니다. 한글로 번역을 했습니다.
매끄럽지 않지만 양해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원문을 받으면 먼저 올리고 다음날 번역문을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포스트 #1
한국의 분단, 1945 - 1948
Dr. Kathryn Weathersby
한국 현대사의 가장 근본적이고 비극적인 사실은 1945 년 일본 통치에서 해방직후에 2 개의 적대적인 국가로 분단되었다는 것이다. 모든 관련 당자들은 이 비극을 예측하지 못했다. 이 두개의 국가를 초래한 미국과 소련이 그러한 결과를 의도하거나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어떻게 그리고 왜 이 비극이 일어났는지를 이해하는 것은 쉽지 않은일이다. 그러므로 한국이 왜 어떻게 분단되었는가를 간단하게 서술하기는 간단치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일 왜 1950-53 년 전쟁이 발생했는지를 이해하려 한다면, 우리는 충돌의 전제 조건인 한국의 분단이 어떻게 발생했는지 검토하는데서 부터 시작해야한다.
다음의 몇 포스팅에서 필자는 1945년 한반도를 점령 한 두 세력의 목표, 인식 및 행동이 1948 년에 분단국가를 창설하게 되었는가를 설명하기 위한 시도를 할 것이다. 첫 번째 언급해야 할 상황은 전후 한국에 대한 동맹국의 결정은 미국에서 비롯되었으며 이는 일본에 대한 전쟁에서 미국이 주도적인 역할을 했기 때문이었다. 영국은 1942 년 싱가포르가 일본에 넘어간 이후 동남아시아를 떠났고, 독일과의 전쟁에서 가능한 모든 자원이 요구되었기 때문에 일본이 패배 할 때까지 동아시아로 돌아가지 않았다. 프랑스는 유사하게 태평양에있는 전쟁에 공헌할 위치에 있지 않았다. 중국 국민당의 군대뿐만 아니라 중국 공산당의 군대도 분명히 중국에서 일본군에 맞서 싸웠고, 거기에는 국민당 지휘 아래서 싸운 수 백명의 한국인과 중국 공산당과 함께 싸운 수천 명의 한국인들도 포함되어있었다. 그러나 중국 군대는 현대화 되어 있지도 기계화되어 있지도 않았다. 결과적으로 중국인과 한국인은 상당수 일본군과 교전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지만, 적을 패배시킬 수는 없었다.
1941년 12월 7일일본의 진주만 공격 이후 전쟁에 돌입하면서, 미국은 일본을 패배시키기 위한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소련군은 1941년 6월 22 일 독일의 침공이후 동맹국들과 함께 싸우고 있었으며, 워싱턴은 만주 및 한반도와 접해 있던 소련군으로부터 신속한 도움을 얻고자 했다. 그러나 소련은 영국과 마찬가지로 강력한 독일의 공격에 저항하기 위해 전력을 기울여야 했다. 따라서 모스크바는 일본에 대한 전쟁에 가담해달라는 미국의 요청을 거절하고 독일의 침공 2 개월 전에 도쿄와 체결한 중립조약을 철저히 준수했다. 소련은 독일에 대한 전쟁이 끝날 때까지 동쪽에서 전쟁을 치르지 않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모스크바는 일본이 공격할 수 있는 핑계를 줄 것을 우려하여 1943 년 11 월 카이로에서 개최 된 극동의 전후 타협에 관한 최초의 동맹국 토론에 참여하지 않았다. 그 회의에서 영국, 미국 및 중국은 일단 일본이 패배하면 한국은 “절절한 절차”에 따라 자유로운 독립국이 될 것임을 합의했다. 그러나 동맹국들은 1945년 2월 독일의 패배가 임박한 얄타의 크림 반도 리조트의 리조트인 얄타에서 다시 만날 때까지 동아시아에서의 전후 해결에 대해 더 이상 명확하게 규정하지 않았다.
프랭클린 루스벨트 (Franklin Roosevelt) 미국 대통령은 얄타 회담이 열리기 전까지, 세계 주요국가들이 제3차 세계 대전의 발발을 피할 수있는 방법을 만든다는 그의 주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아이디어를 만들어왔다. 제1차 세계 대전은 "모든 전쟁을 끝내기위한 전쟁"이라고 불렸지만, 단 21년 후에 더욱 파괴적인 세계 대전이 발발했다. 제 2 차 세계 대전이후 경제적으로나 군사적으로 압도적으로 우세하게 등장한 국가의 지도자로서, 루즈벨트는 전후 합의와 세 번째 충돌을 막을 수있는 구조를 만드는 것이 자신의 책임이라고 생각했다. 유엔의 설립은 기본적인 것으로, 이는 모든 회원국-크던 작던-들이 분쟁을 평화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협력 할 수있는 구조를 제공하기 때문이었다.
유엔과 함께, 루스벨트는 유엔 이외에 독일, 이탈리아 또는 일본 통치로부터 해방 될 수있는 세계의 특정 지역을위한 별도의 협력 구조를 만들 계획을 했다. 불행하게도 한국은 그런 곳의 하나였다. 루스벨트 (Roosevelt)는 최근 수십 년 동안 한국을 둘러싼 세력이 1884 ~ 85 년 중일 전쟁과 1904 ~ 05 년 러일 전쟁을 치룬 것을 분명하게 알고 있었다. 따라서 대통령은 일본의 패배가 이번에는 한국을 둘러싼 중국과 소련 간의 새로운 갈등을 초래할 것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이러한 결과를 피하기 위해 루스벨트는 소련 지도자 조셉 스탈린에게 중국, 영국과 함께 국제 사회의 신탁 통치를 수립으로써 전시 동맹국들이 한국을위한 새로운 정부 창설에 협력할 것을 제안했다.
물론 전쟁이 끝나면서 소련과 다른 한편으로 영국, 미국, 중국국민당간의 협력이 거의 없을 것이라는 것이 매우 신속하게 분명 해졌다. 더욱이, 신탁 통치 구상은 당연히 스스로 자국의 새로운 정부를 세울 수 있을것이라고 생각한 한국인의 의지를 무시했다. 루스벨트는 공산주의와 자본주의 동맹 간의 내재적 갈등을 과소평가했고, 한국인의 희망과 능력을 심각하게 무시했다. 신탁 통치 구상은 한국 분단의 기초를 초래했으며. 이는 강대국의 쇼비니즘과 오만의 비극적인 예로서 비판받아 마땅한 것이다. 동시에 한국에 대한 신탁 통치를 창출하려는 계획은 루스벨트가 제 3 차 세계 대전을 피하려는 욕망에서 제기 된 것이지 한반도 남부에 미국의 지배를 확립하려는 의도가 아니라는 점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와우 놀라운 게시물, 예 @wisdomandjustice 전쟁의 시작은 내란 부족으로 간주됩니다 불공정 karnakan에있는 나라에서 반역과 함께 일어난뿐만 아니라 일어난 일이 Kore 일어난 팔꿈치 menyikyt 지배자와 왕국 A와 B와 pewarih 왕좌 사이에 나타납니다 지도자로서 전쟁이 일어 났고 한 나라가 파탄되었다. 그리고 번영 속에서 그 나라의 풍습.
흥미로운 포스팅입니다. 만약 어떠한 형식과 절차로든 신탁통치가 이루어졌다면 무엇이 어떻게 달라졌을까 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 최소한 건국 초기의 시행착오와 전쟁 그리고 냉전하에서 분단의 고착화가 이루어졌을까 라는. ...
이번에는 신탁통치가 3차 세계대전을 피하기위한 루즈벨트의 생각이었다는 점이 주제인 듯 합니다
고맙습니다 ...
흥미롭고 새로운 사실을 알 아 갑니다.
한국전쟁을 알려면 2차세계대전의 역사까지 알아야되고 2차세계대전의 다양한 국가의 상황도 알고있어야됬군요.
아픈 역사를 재미있게 읽을 수 는 없기에 좋은 글 고맙습니다.
워낙 유명하신 분이기에 저도 공부하는 마음으로 번역했습니다.
앞으로 한국전쟁에 관해 어떤 말씀을 하실지 궁금합니다
신탁통치가 없었더라도 중국과 베트남처럼 사회지도층이 대립중이라 결국 내전이 일어났을거라 생각하긴 하지만 내용을 더 봐야겠네요
역사 좋아합니다. 꾸준히 읽을게요. ^^
2차세계대전의 최대피해자는 누가뭐래도 한국이라고 봅니다.
루스벨트가 저런 시각을 가지고 신탁통치를 생각했다는 내용이 처음 아는 사실이라 흥미롭네요. 그러면서 한국의 의지나 의견이 결정에 포함되지 않은 것은 슬픈 이야기고요. 물론 힘이 없었긴 하지만요 ㅠ
@sakujo hell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