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텃벌의 애가
오늘날 백제 고분군이 있는 석촌동에는 달리 전해지는 옛 이름이 있다. ‘진텃벌’이라는 것이다. 한자로 진허평(陳墟平)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진(陳)이란 장사진(長蛇陣)이니 팔괘진(八卦陳)이니 하는 그 진을 말한다. 즉 군대가 진을 친 곳이라는 뜻이다. 이 석촌동에 진을 칠 만한 대군이 들어왔던 건 병자호란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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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군의 산성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수도 한양만 보고 내달린 선발대에 이어 청 태종 홍타이치가 거느린 10만 대군이 남한산성이 올려다보이는 진텃벌에 들어찼던 것이다. 그런데 이 진텃벌에는 한 여인의 가슴 아픈 사연이 전해지고 있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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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자호란이 일어나기 얼마 전, 꽤 잘나갔다고 하는 이모(某) 참판 댁에서 잔치가 벌어졌다. 이 참판 부인의 생일 잔치였다. 대충 비슷한 벼슬아치의 부인들이 모여들었고 음식을 나누고 웃음꽃을 피웠다. 술도 살짝 한 잔씩 했겠지. 그런데 여기서 좀 어울리지 않는 화제가 등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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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차 난리가 났을 때 오랑캐 손에 잡히게 됐다고 하면 어떻게들 하시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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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들 또르르한 벼슬아치들의 부인이었고 삼강행실도부터 내훈까지, 조선에 들어와서 좀 이상해진 성리학적 여성의 윤리관을 체득하고 있던 사람들이었다. 즉 몸이 ‘더럽혀지지’ 않기 위해 어찌 어찌 해야 한다는 교육을 받았고 그 모범 사례(?)들을 익히 알고 있었다는 뜻. 저마다 기염을 토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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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분강개는 천정을 찔렀고 오랑캐에 대한 분노는 서까래를 울렸다. 어떤 이는 목을 매겠다 했고 어떤 이는 은장도를 사용하겠노라 비장하게 말했다. 또 아무개 참의 부인은 은장도로는 어려우니 단검을 장만하겠다고 했고 아무개 판서의 며느리는 우물에 뛰어드는 것이 가장 확실하다고 했다. 생일의 주인공 이참판 부인도 당연히 큰소리를 쳤다. “정말이지 죽어 버려야지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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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참판 부인의 눈에 한 부인이 들어왔다. 한 마디도 안한 여자는 그 뿐이었다. 분노의 바다와 결의의 강물 위에 뜬 섬 같았다. 승지 김모(某)의 부인이었다. 알듯 모를듯 미소만 머금으며 남의 이야기를 듣고만 있는 모습에 이참판의 부인은 궁금증이 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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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지댁은 어찌 하시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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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지의 부인은 말이 없었다. 그러나 이참판이 재우쳐 묻고 모든 여인들의 시선이 자신에게로 몰리자 어쩔 수 없이 김승지의 부인은 입을 열었다. 그런데 그 말이 전연 뜻밖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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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가 봐야 알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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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말 한 마디에 잔치는 파장이 나고 말았다. “아니 어찌 사대부의 부인으로서 그런 말을 할 수 있단 말이오. 오랑캐가 몸을 더럽히려는데 그때 가봐야 안다니.” 이참판 부인은 격노하여 소리를 질렀고 다른 부인들도 합세했다. 원래 화가 나면 말이 가늠이 되지 않는 게 인지상정, 이참판 부인은 앞뒤 가리지 않고 퍼부어 댔다. “아 참으로 되놈에게 몸을 팔 자가 아닌가.” 김승지 부인은 뭇 여인들의 손가락질을 받으며 집으로 돌아가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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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자호란이 터졌다. 임금이 강화도 피난 가다가 길이 끊겨 남한산성으로 피난가는 판국이었으니 일반 백성들은 물론 웬만한 벼슬아치들도 피난길에 나서보지도 못하고 청나라군의 점령 하에 들어갔다. 그리고 전 세계 전쟁사에 빠짐없이 등장하는 여자 사냥이 벌어졌다. 이참판의 부인을 비롯하여 생일 잔치에 왔었던 대부분의 부인들이 포로가 됐다. 김승지 부인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은장도다 단검이다 우물이다 하던 여성들은 모두 신념(?)을 꺾고 목숨을 지켰고 특히 이참판 부인은 청나라 장수의 애첩이 돼 심양까지 동행하게 된다. 청나라 군에게 끝까지 항거하다가 목숨을 잃은 것은 김승지 부인 하나였다. 김승지 부인은 자신을 겁간하려는 청나라 군을 물어뜯으며 저항했고 결국 처참하게 죽음을 당해 그 시신이 진헛벌에 뿌려졌다는 사연이다. (실화라기보다는 전해지는 이야기라도 봐야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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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목숨을 정절과 바꾼 여성들이 비난받을 이유는 하나도 없다. 목숨 앞에서 정절 따위는 동네 삽살개에게 주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 끔찍한 성폭력 피해를 감당하는 것조차 쉽지 않았을 여인들에게 무슨 타박을 하겠는가. 비분강개하여 오랑캐들과 목숨 걸고 싸우자는 말은 잘했는데 방비는 거의 세우지 않아 적들이 대놓고 알린 작전대로 쳐들어와도 속수무책이었던 남정네들이 무슨 말을 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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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 하나 탓하자면 그들이 “그때 가 봐야 알지 않겠는가.”하던 이를 마녀 사냥하며 그를 희생양삼아 자신들의 ‘성리학적 성 윤리 인지 감수성’ 을 과시하고자 했던 문제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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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경파와 온건파가 논쟁할 때 강경파가 질 가능성은 별로 없다. 상대방의 의지와 용기, 그리고 도덕성을 일갈하면 되기 때문이다. 현실론은 용기 없는 자의 비겁함이 되고 회의론은 대의명분을 어기는 패역이 되는 것은 아주 간단한 경로를 통해서였다. 그리고 그것은 당시 그들의 남편 세계에서도 똑같이 적용됐다. “어디서 감히 그런 소리를 하느냐”는 준엄함 앞에서 “아니 그래도 말입니다.”를 되뇔 수 있는 소심함은 남아나지 못했다. 그 결과는 인조 임금의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우리 역사상 최악의 세레모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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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도 노여움도 없이 살아가는 자는 조국을 사랑하고 있지 않다는, 유시민이 인용하여 80년대 내내 유명해졌던 네크라소프의 싯귀를 기계적으로 받아들인다면 분노는 전쟁을 위해, 또 누군가와 맞서 싸우기 위해 매우 필요한 감정이다. 그러나 결코 충분한 조건은 되지 못한다. 전쟁을 시작하기 전에는 거품을 물더라도 정말 전쟁을 할 양이면 분노에서 자유로워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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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가 봐야 알겠지” 내지는 “이 전쟁 정말 필요한 건가?” 하는 계산이 필요하고 상황 분석이 요긴하고 “대체 어떻게 하면 이기나?” 하는 의문이 절실해진다는 뜻이다. 그 앞에서 “이런 답답한 인간들. 이순신 장군은 열 두 척으로 133척을 무찔렀는데, 우리 모두가 뭉치면 무슨 일을 못할까?” 하는 외치는 건 자기위안 외에는 아무 도움이 되지 못한다. (이순신은 치밀한 계산으로 이긴 거지 용기로만 이긴 게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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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슬프지만 우리 역사에는 그렇게 ‘용감한’ 사람들이 저지른 참담한 패전의 역사가 너무나 많다. 나는 그게 겁난다. 결코 비겁하지 않고 용맹스러웠던, 죽음 앞에서도 비겁함을 몰랐고, 적 앞에서 물러설 줄 몰랐던 사람들에 대한 추모와 감동과는 별도로, 그들이 당한 패배의 폐해가 무지막지하고 어이없을만큼 컸던 사실 말이다. 어떤 의미로든 ‘전쟁’은 분노와 명분으로 하는 게 아니다. 그리고 그러면 진다. 진텃벌에서 숨져간 김승지댁 부인처럼 무고한 희생자를 낳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