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2년 9월 24일 이장림 목사 구속 - <접속 1990 > 중에서
1992년은 내가 군대를 제대한 뒤 대학으로 돌아간 해였다. 여느 날처럼 술추렴을 한 뒤 들어선 술집 화장실에서 나는 특이한 낙서를 봤다. “타는 목마름으로 민주주의여, 만세”나 “파쇼 타도” 또는 “누구야 사랑해” 등등의 잡다한 낙서 위에 누군가 스프레이로 쓴 낙서였다. “1992년 10월28일 휴거.” 마치 철거촌의 깡패들이 협박하듯 담장에 써 놓는 시뻘건 글씨로, 대문짝만하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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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거론을 주장하는 단체는 ‘다미선교회’라고 했다. ‘다미’는 ‘다가올 미래를 준비하라’는 뜻이었다나. 다미선교회를 이끈 사람은 이장림이라는 사람이었다. 그는 ‘휴거’의 개념을 처음으로 국내에 도입한 사람이기도 하다. 1978년 어니스트 앵글리의 예수 재림 소설 <랩처드>(Raptured: ‘황홀한, 환희의’라는 뜻)를 번역하면서 처음 사용했는데 이 휴거는 한자어다. ‘휴거(携擧).’
성경에는 이 말이 등장하지 않는다. 단지 ‘데살로니가 전서’에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남은 자들도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라는 말씀이 등장하는데 이때 ‘구름 속으로 끌어올려짐’ 즉 공중 들림을 한자로 표현한 것이다. 예수 재림의 말세가 되면 선택받은 자는 구름 속으로 끌어올려진다는 것이다. 이장림은 이것이 실제로 일어난다고 예언했던 것이다. 이 휴거론의 파장은 예상 밖으로 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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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쩡히 잘 살던 철도원이 휴거에 대비한다며 가족을 데리고 잠적하는가 하면, 종말론 교회에 나가지 못하게 하는 부모를 원망하며 음독자살한 여학생도 있었다. 전 재산을 팔거나 재산의 태반을 매각해 교회에 바치고 10월28일까지만 연명할 재산을 들고 기도에만 몰두하는 사람이 한두명이 아니었다. 전국적으로 종말론 신도는 수천명에 이르렀고 해외 지부까지 있었다. 신도들 가운데는 들어올려질 때 몸이 가벼워야 한다는 이유로 낙태를 한 이들도 있었다.(자신의 하나님을 뱃속의 아이 무게도 감당 못할 만큼 약골로 여기다니. 이런 믿음이 부족한 자 같으니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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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시적인 해프닝으로 보기에는 종말론에 빠져든 사람들 수가 심상치 않았다. 그로 인한 피해도 방방곡곡에서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당국도 손을 놓고 있을 수 없게 되었다. 1992년 8월12일 대검찰청은 산하 수사기관에 “시한부 종말론이 확산되면서 일부 신자들이 생업을 포기하고 가산을 교회에 헌납하거나 일부 청소년들의 경우에는 학업을 중단한 채 가출하는 등 이른바 종말론이 심각한 사회문제로 비화함에 따라 이에 대해 본격수사를 벌일 것”을 지시한다. 하지만 신도들이 스스로 헌납했다고 주장하는 이상 손쓸 방법 또한 신통치 않았다. 하지만 마침내 검찰은 이장림을 옭아맬 단서를 찾아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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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장림이 1993년에 만기되는 환매조건부 채권(RP)을 구입한 사실을 찾아낸 것이다. 1992년에 휴거될 사람이 왜 환매조건부 채권을 구입한단 말인가. 이외에도 수십억원을 신도들로부터 받아 유용한 사실을 더해 검찰은 1992년 9월24일 이장림 목사를 구속한다. ‘휴거’ 한달 전이었다. 그러나 이장림은 억울하다며 피를 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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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이번 휴거(携擧) 대상자가 아니고 ‘환란시대’에 지상에 남아 순교해야 할 운명입니다. 그래서 활동비를 준비해 둔 것뿐입니다. 신앙생활을 충실히 한다는 이유만으로 이 법정에 서서 처벌을 받아야 한다는 현실이 도무지 납득되지 않습니다. 선교회를 설립한 이후 단 한 번도 신도들에게 헌금을 강요한 적이 없습니다. 한 신도가 아파트를 팔아 헌금을 낼 때 무작정 사양하는 것은 그의 독실한 믿음에 대한 모독이라고 생각해 임시로 보관만 했을 뿐입니다.”
이장림 목사가 구속됐지만 휴거를 기다리는 사람들의 믿음은 불타오르기만 했다. 자신들의 선지자에 대한 박해는 휴거 이전의 프롤로그로만 보였고 고립된 교회 안의 믿음은 불길처럼 타올랐다. 아예 가족과 집을 팽개친 신도들은 각 교회에 모여 집단생활을 하며 휴거를 기다렸다. 심지어 10월25일 이장림 목사가 사과 성명을 내어 ‘휴거는 일어나지 않는다’고 선언했으나 이미 또 다른 선지자(당시 고등학생이었다고 한다)를 새로이 영입(?)한 종말론 신자들은 아랑곳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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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의 휴거일 당일이었는지, 직전의 어느 날이었는지 확실하지 않으나 서울에 가을비답지 않은 소나기가 쏟아진 날이 있었다. 하늘이 시커멓게 되어 낮인지 저녁인지 분간이 안 갈 정도였다. “정말 휴거되는 거 아니야?” 내가 중얼거렸을 때 친구가 뒤에서 도발을 걸어왔다. “너는 무거워서 안 들려.” 나도 이렇게 받아쳤다. “너는 죄를 많이 지었으니 나랑 남겠네.” 시커멓게 된 하늘과 ‘우르릉, 쾅쾅’대는 뇌성벽력을 들으며 ‘이거 정말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거 아닌가?’ 하는 싱거운 두려움이 설핏 들었음을 고백한다. 아마 신도들은 세차게 쏟아지는 비와 지축을 울리는 천둥소리를 들으며 환호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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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10월28일이 왔다. 전국 166개 종말론 교회에는 하나님 눈에 잘 띄려는 취지인지 새하얀 옷을 차려입은 성도들이 집결했다. 그뿐만 아니라 종말론 따위를 믿지 않는 시민들도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보려고 주변에 운집했고 휴거가 안 됐을 경우의 비상 상황에 대비하기 위해 경찰도 총출동했다. 신도들의 휴거를 보여주기 위해 대형 텔레비전(TV)을 설치한 교회도 있었고 시엔엔(CNN), 로이터 등 외신들한테 이 역사적인 휴거의 순간을 취재하는 은혜를 베풀어 준 교회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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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밤이 오고 자정이 가까웠지만 애석하게도 신도들은 중력을 벗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나방 한 마리가 불빛 속을 날아가자 “나방이 휴거된다”고 환호성을 지르며 하늘을 향해 두 팔 벌렸지만 그들의 ‘하나님’은 그들의 머리털 한 오라기도 구름 속으로 끌어올려 주시지 않으셨다. 자정이 넘었어도 신도들의 몸은 땅 위에 머물러 있었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자 일부 교회에서 목사들은 담을 넘어 도망치고 믿음이 약한(?) 사람들은 책상을 둘러엎었다. 당시 현장에 있었던 사람한테서 들은 얘긴데 어느 신도는 흥분하는 동료들 앞에서 이렇게 외치기도 했다고 한다. “형제 여러분! 우리 시간이 아니라 이스라엘 시간으로 열두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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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 시간 12시가 돼도 휴거는 일어나지 않았다. 아마도 최고의 코미디는 바다 건너 필리핀에서 벌어진 일일 것이다. 한국 종말론자들의 선교를 통해 200명의 필리핀인들이 집결하여 휴거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12시가 넘어도 휴거가 일어나지 않자 설교자가 이렇게 선언했다고 한다. “교통체증 때문에 주님이 늦게 오고 계십니다.”
그렇게 휴거 소동은 요란하고 서글픈 해프닝으로 끝났다. 한국 교회는 이를 두고 이단으로 규정했고 성경을 잘못 해석하여 사람들을 현혹시켰다고 비판하는 한편, 기복주의와 물질주의에 젖은 한국 기독교에 대한 반성을 토로하며, 이웃과 사랑을 나누는 교회 본연의 모습을 강조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나는 다른 지점에 문제의 핵심을 두고 싶다. 한국 교회의 자성은 충분히 이유 있는 것이었지만 종말론의 구원 교리의 핵심은 “우리는 믿음으로 구원받지만 그렇지 못한 자는 지옥을 간다”는 주류 기독교의 그것과 결코 다르지 않았다는 주관적인 판단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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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말론의 문제는 “그날과 그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는”(마태복음 24장 36절) 종말의 시간을 정한 것일 뿐, 결국 심판의 날에는 그 믿음을 받아들이는 사람들만 구원받는다는 것은 한국 대부분의 기독교 교회가 신봉하는 믿음이 아니었던가. 그를 여실히 증명하는 풍경 하나가 이미 휴거 소동 이전에 실감나게 펼쳐진 적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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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5월7일 ‘기독교 대한감리회 서울 연회 재판위원회’는 “종교의 등불은 달라도 빛은 하나”라면서 타 종교에도 구원의 길이 있을 수 있다는 견해를 피력한 변선환 감리교신학대학 학장과 홍정수 교수에 대한 종교재판을 연다. 1885년 감리교가 이 땅에 전파된 지 107년 이래 처음 있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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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판정은 감리교 종단 본부도 아니고, 기독교회관도 아닌 그 이름도 유명한 김아무개 목사(동남아 쓰나미는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하셨던 바로 그분)가 시무하는 K교회였고 재판관(?)들은 대충 알 만한 사람들로 채워져 있었다. 신학적 토론은커녕, 인민재판의 기독교 버전이 펼쳐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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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교회 신자들이 악을 쓰고 야유하는 가운데 스승의 무죄를 항변하는 감신대 학생들은 입이 틀어막혔고, 질질 끌려 나갔다. 그런 분위기에서 감리교회법상 최고형인 출교 처분이 내려진 것이다. 감리교회 목사직 파면은 기본이었고, 신자 자격까지 빼앗은 최악의 형벌이었다. “대학원생들이 하나같이 그에게 학위 지도를 받으려 했기 때문에 한 교수가 학생 6명 이상을 지도할 수 없도록 제한하는 법을 만들어야 했을 정도”(감신대 이정배 교수)였던 감리교신학대 학장은 사탄의 졸개로 공식적으로 규정돼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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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의 종교재판관들처럼, 모세 앞의 애굽 왕 바로처럼 강퍅하고 완고한 종교재판관들 앞에서 변 학장은 꿋꿋한 최후진술을 남긴다. “타 종교를 무조건적으로 악마의 소산이라고 생각하는 개종 중심의 선교 신학은 제국주의적인 발상이다. 지구촌에서 다양한 종교가 공존하는 현실과 그 진리성을 인정하되 종교간 대화를 통해 상대방의 종교를 배워 스스로의 정체성을 확고히 하는 새로운 신학이 정립돼야 한다.” 이런 생각을 한다는 이유로 기독교인을 기독교 울타리 밖으로 내치는 기독교인들이, 휴거를 믿으며 그를 믿지 않는 자들을 통박하던 휴거론자들과 어디가 어떻게 달랐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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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로부터 얼마 뒤 나는 흥미로운 경험을 하게 된다. 학교에서 통일교의 실세라 할 박보희씨의 강연회가 열린다고 했다. 통일교는 80년대 내내 대학교 안에서 그 자금력을 바탕으로 체제 순응적인 학생 그룹을 끊임없이 조직했던 전력이 있었고 그 모임인 ‘원리연구회’는 동아리 연합회 회원 자격을 박탈당한 터였다. 그러나 문제의 강연회는 열리지 못했다. 나는 그 집회가 무산되는 현장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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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를 위해 피 흘려 온 민족의 대학에서 통일교 강연회가 웬말이냐?”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집회를 저지했던 주류는 “피가름의 교리, 섹스교 이단 통일교를 반대”하는 이른바 ‘복음 동아리’ 회원들이었다. 평소에 그럴 수 없이 선한 미소를 띠고 캠퍼스를 누비며 복음을 전하던 남학생들, 더할 나위 없이 행복감에 겨워 “오 주여, 당신께 감사합니다”를 노래하던 여학생들이 얼마나 험악하고 앙칼지게 변하는지 나는 경악하며 지켜보았다. “여러분더러 들으라는 말씀 드리지 않습니다. 원하는 사람만 들으면 되는 강연회입니다”라며 눈물을 흘리는 원리연구회 학생에게 단매에 때려죽일 듯한 욕설이 날아갔다. 통일교 쪽이 공개한 문건에 따르면 당시 학교 인근 교회 청년회에는 일종의 ‘십자군 동원령’이 공유되고 있었다. “신성한 대학의 터전에 사악한 이단의 발톱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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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교의 정치적 행각과 선교 방식, 그 교주가 찍어주는 대로 커플을 맺고 합동결혼식을 벌이던 행태에 대해서 한 번도 동의한 적이 없었으나 나는 그 자리에서는 심정적으로 그들의 편이 됐다. 그들에게도 종교의 자유는 보장돼야 한다고 믿었기에. 하지만 거기 있던 선량한 기독교인들에게 통일교란 추방당해야 하고 타도돼야 하고 감히 우리 학교에서 집회를 허락받을 수 없는 이단자들이었을 뿐이었고 통일교는 ‘사탄’일 뿐이었다. “1992년 10월28일 종말을 믿지 않는다”는 이유로 부모를 사탄으로 몰았던 종말론 신도와 그들의 간극은 또 과연 얼마나 컸을까. 나는 지금도 잘 가늠이 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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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세상을 떠난 고 홍근수 목사(향린교회)는 이렇게 말한 바 있다. “나를 모르면 지옥에 간다니,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이라니. 이런 신성모독이 어디 있는가. 왜 사랑의 하느님을 돌팔이 잡신으로 만들며 예수 그리스도를 사이비 무당으로 만드는 것인지 모르겠다.” 나는 이 말에 동의한다. 예수는 자신들이 ‘선민’이라는 우월의식에 휩싸여 유대인들이 “저런 족속으로 태어나지 않게 해 주심을 감사”드렸던 사마리아인에게 다가서며 “유대 천국 잡종 지옥”이라는 신화를 깼던 사람이고 나를 따르지 않는 어린양을 “너 지옥!”으로 갈라세우는 게 아니라 마지막 한 마리를 위해 끝까지 노력했던 목자가 아니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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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예수가 이 세상을 암행한다면 그는 휴거를 부르짖었던 사람들에게도 물론 혀를 찰 것이거니와 길거리에서 ‘예수천당 불신지옥’이라는 정신적 협박을 일삼는 자신의 신도들의 책상을 둘러엎을지도 모르고, 수만명이 죽어간 쓰나미를 하나님의 심판이라 치부하고, 인도의 사원이나 이슬람 모스크에 가서 가스펠송을 부르고, 남의 절에 들어가 불상의 목을 자르는 이들에게는 삿대질을 퍼부었을지도 모른다. 이렇게 호령하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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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사의 자식들아, 너희는 악하니 어떻게 선한 말을 할 수 있겠느냐.(마태복음 12장 34절)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하지 않았더냐.(요한복음 13장 34~35절) 너희는 사랑을 이렇게 하느냐”고 말이다. 나 역시 4대째 기독교인으로서 적어도 내가 성경에서 만난 예수는 그런 분이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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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가 되지않는것이 그들이 바보들이 아니라는것입니다. 그러함에도 그곳에 발을 들여 놓으면 나오기가 정말 힘들다고 하니 종교의 자유라는 것이 가정을 해체하고 가족과 반목하고 이러라고있는것은 아닐진데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1992년 10월 28일. 오후 체육시간에 먹구름이 몰려오던 광경이 아직도 기억납니다. 물론 금방 사라졌죠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