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렌 켈러의 짧은 벼락

in #zzan6 years ago

1968년 6월 1일 헬렌 켈러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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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렌 켈러는 우리에게 알려진 것보다는 알려지지 않은 편이 훨씬 더 많을 거야. 헬렌 켈러가 설리반 선생의 도움을 받아 말을 하게 되고 글을 쓰게 되고 세상으로 나아가는 그 감동 스토리야 위인전으로든 영화로든 글로든 접해 보지 않은 사람이 없을 테지만 그녀가 대학을 졸업한 뒤 어떤 삶을 살았는지는 사실 알려져 있지 않은데 그 이유는 그 행적을 알리고 싶어하지 않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설리반과 헬렌은 근 50년을 함께 산다. 설리반은 결혼을 하고서도 헬렌과 한 집에서 지냈어. 친구들은 이 스승과 제자 관계를 ‘로미오와 줄리엣’에 비했다고 하니 약간은 그 오묘하면서도 애매한 둘 사이를 짐작할 수 있을 거다. 헬렌에게 설리반은 세상으로 향한 유일한 문이었지만 설리반에게도 헬렌은 세상을 지탱하게 해 주는 기둥같은 존재이기도 했어.

설리반이 극히 어려운 집에서 자랐다는 건 알지? 알콜중독자 아버지와 결핵 환자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고아원에 맡겨졌고 거기서 동생을 잃고 자신도 시력에 치명적인 장애를 입은 사람이었지. 맹인학교에 들어가서 치료를 받다가 어느 정도 시력을 회복한 뒤 일자리를 찾은 게 바로 대책없는 헬렌 켈러의 가정 교사였고 거기서 설리반은 초인적인 의지로 헬렌 켈러를 거둔 거거든. 즉 헬렌 켈러에게 설리반이 은인이었다면 설리반 역시 헬렌 켈러를 떠나서는 막막한 인생이었다는 얘기지.

임종할 때 설리반은 헬렌이 슬퍼하면서 “선생님이 없으면 나는 아무 일도 할 수 없어요.”라고 말하자 “그럼 나는 실패한 인생을 산 거야.”라고 대답할 만큼 그녀는 헬렌으로 하여금 독립적인 인생을 살아가도록 평생 독려하고 가르친 사람이고 세상을 향해 열린 문과 같은 존재였지. 하지만 동시에 설리반은 헬렌에게 벽이기도 했어. 헬렌의 자유 의지가 자신의 뜻에 거스를 때는 매우 단호하게 막았고 평생 동안 헬렌의 선택과 결정에 개입하려고 애썼으니까. 그 대표적인 사례가 헬렌에게 벼락처럼 닥친 짧은 사랑에서 일어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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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렌은 장애를 입지 않았으면 무척 활발하고 명랑하게 그리고 열정적으로 남자들 사이를 휘젓고 다녔을 사람이었어. 그녀는 잃어버린 눈을 빼고 파란색 유리눈을 맞춰 넣었고 빨간 하이힐을 즐겨 신는 멋쟁이였어. 그리고 당연하게도 여자로서의 욕망도 있었지. “젊은 남자들의 냄새에는 불·폭풍·바다와 마찬가지로 뭔가 본질적인 것이 있다”고 했다고 하니까 짐작이 가지 않니? 하지만 삼중장애인에다가 혹여 헬렌에게 무슨 일이 있을까 노심초사하던 설리반이 곁에 있는 그녀에게 다가설 남자란 흔치 않았겠지.

그런데 설리반이 잠시 그녀의 곁을 비우게 돼. 남편과 불화가 극에 달하고 폐결핵 진단까지 받은 설리반이 요양을 떠나게 된 거지. 그때 그녀의 곁을 지키며 점자와 수화 통역을 맡게 된 건 헬렌 켈러보다 일곱 살 연하의 남자 피터 페이건이었지. 헬렌은 생애 처음으로 ‘사랑’을 경험한다.

언젠가 일본 만화 ‘하늘이 허락한 사랑’인가 하는 만화를 본 적이 있다. 그건 비장애인 남자와 장애인 여자의 사랑 얘기였는데 둘은 시끄러운 지하철역에서 선로를 사이에 두고 수화로 밀어를 나누고 작별 인사를 한다. 그걸 본 한 할머니가 말하지. “이 시끄러운 전철역에서 그렇게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커플은 자네들 뿐일 거야." 아마 헬렌과 피터의 사랑도 그랬을 거야. 점자를 더듬으면서 입 모양을 어루만지면서 그들은 아무 말도 없이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겠지.

“사랑이 담긴 말 속에서 달콤한 행복을 느꼈다. 나는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전율했다. 그의 사랑은 밝은 햇빛처럼 다가와서 내 무력함과 고독을 환한 빛으로 비추어주었다. 사랑받고 있다는 행복감이 나를 사로잡았다. 한 남자의 삶의 일부가 되고 싶다는 바람에 나도 모르게 무릎을 꿇었다.”

헬렌 켈러는 이 남자와 사랑의 도피까지도 꿈꾸게 돼. 하지만 그들은 도피하지 못한다. 헬렌의 어머니에게 들통이 났거든. 어머니는 이 시덥잖은 청년이 자신의 가문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고 무엇보다 헬렌이 남자와 결혼해서 애를 낳고 평범하게 산다는 것을 상상하지 못했을 것 같아. 그리고 그건 설리반도 마찬가지였어. 헬렌이 독립적으로 살기를 바라면서도 그녀는 헬렌 없이는 설 수 없는 존재이기도 했거든. 앞서 말했다시피. 어머니와 설리반은 의기투합해서 헬렌을 가로막는다. 이 부분을 다룬 책이 있는데 <헬렌 켈러 인 러브>라는 책이야. 도서관에서 잠깐 읽었더랬는데 그런대로 재밌다.

피터가 집안 사람들의 저지로 헬렌에게 오지 못할 때 헬렌은 이렇게 독백을 한다. “사람들은 내게 묻는다. 맹인이면서 어떻게 밤과 낮을 구분하느냐고. 밤공기는 가볍지만 낮 공기는 더 무겁고 더 촉촉하며 생기가 어려 있다고 나는 그들에게 말한다. 나는 가방을 들고 일어서서 인정한다. 내 연인은 오지 않을 모양이다. 오늘 낮의 공기는 눈이 멀어 지낸 그 어떤 날보다 더 무겁게 내 피부를 짓누른다.” 피터는 사랑이 좌절된 후 다른 사람과 결혼해서 살아가게 되지. 헬렌은 “가족에게 상처를 주었다.”고 여기고 역시 사랑을 지워 버리고.

그런데먼 훗날 피터의 자식이 편지를 보낸다. “아버지는 평생 당신의 사진을 서재에 두고 간직하셨어요. 왜 그런지 말해 줄 수 있나요 미스 켈러?” 그 편지를 받고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 그 편지를 읽었을 때 헬렌의 마음은 어땠을까? 어쩌면 야반도주를 꿈꾸며 그를 기다리던, 하지만 끝내 그는 오지 않았던 그 시간을 돌이키며 감회에 젖었겠지. 만약 설리반이 그 편지를 봤었다면 또 어땠을까. 과연 그녀는 헬렌을 가로막았던 걸 후회했을까? 아니면 그래도 내가 옳았다며 입술을 다물었을까? 설리반이 죽은 다음에도 30년을 더 살면서, 13명의 대통령의 초대를 받아 백악관을 드나들었고 평생을 장애인들과 사회적 약자들을 위해 싸워 FBI의 감시를 받은 위대한 여성 헬렌 켈러는 과연 그 사랑을 어떻게 간직했을까?

1968년 6월 1일 세상을 떠난 그녀는 저승에서 피터 페이건을 만나 뭐라고 말했을까? 그곳에서는 점자도 수화도 필요없었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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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쳐 알지 못한 이야기가 많군요 ~ 흥미롭게 잘 보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