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마다의 의가 있다. - 황진과 곽재우

in #zzan6 years ago

저마다의 의가 있다. 황진과 곽재우
.
1593년 5월 한때 평양과 두만강에 이르렀던 일본군은 수천 리 후퇴하여 부산에 집결했고 전쟁을 끝내기 위한 협상은 계속 진행 중이었다. 그런데 그 와중에 부산의 1년 전의 진주성 패전을 설욕코자 대거 출동한다는 소식이 들려 온다.
.

일본의 대군이 진주성을 친다! 그럼 어떻게 할 것인가. 유감스럽게도 조선으로서는 뾰족한 대책이 없었다. 10만의 일본군을 상대하려면 명나라 군대가 도와 줘야 했는데 명나라 장수들은 진주성에 갈 생각이 꿈에도 없었던 것이다. 박박 긁어 모아야 일본군에 댈 것도 아니었던 조선 관군은 도저히 상대가 되지 않겠다는 결론을 내리고 소백산맥 넘어 전라도로 철수한다. 하지만 성은 비워지지 않았다.
.
1년 전 진주성 전투에서 일본군을 이겼던 기억이 인근 백성들에게는 생생히 남아 있었고 그들은 진주성에 들어가면 살 길이 있다고 굳게 믿어 진주성 안으로 밀물처럼 들어왔다. 진주목사 서예원은 그들을 내치지 못했다. 그들을 내치면 들판에서 헤매다 굶어죽거나 왜놈들의 밥이 될 터인데 어찌 두고 본단 말인가. 그러나 그들을 건사할 대책도 없었다. 자그마치 6만 명의 피난민들이 좁디 좁은 진주성 내에 들끓고 있었다. 그들이 하루에 먹을 식량만 해도 대단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진주성을 지킨다.” 전라도 나주 출신 의병장 김천일이 선언한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마자 의병을 일으켰고 강화도 인근에서 활약하다가 일본군이 철수하면서 남하하여 진주성에 들어왔던 사람이었다. “진주는 전라도로 향하는 길목이다. 이곳을 맥없이 내준다고 해서 일본군들이 순순히 돌아간다는 보장이 어디에 있는가. 우리는 성을 비울 수 없다.”
.
전라도 출신 의병장들이 연이어 호응했고 이들은 단결하여 성을 지키기로 결의한다. 여기에 가세한 것이 조선 최고의 용장이라 할 만한 충청도 병마절도사 황진이었다. 그는 1년 전 광주 목사 권율의 휘하에서 일본군의 전라도 침공군과 맞아 싸워 크게 이긴 바 있었다. (이치 전투) 이 유능하면서도 용감한 장군 황진이 진주성에 입성한다는 소식이 들리자 진주성 안의 사기는 더욱 왕성해졌다. “왜놈들 올테면 오라 우리는 끝까지 싸운다.”
.
이래저래 진주성은 양측 다 물러설 수 없는 외나무다리가 되어 갔다. 경상우감사 김륵은 자신이 진주성에 들어갈 용기까지는 없었으나 어떻게든 병력을 끌어모아 진주성 방위에 보태고픈 마음이었다. 그의 머리에 우선 떠오른 사람이 경상 우도, 즉 낙동강 서쪽에서 가장 잘 싸웠던 의병장 곽재우였다. 김륵은 곽재우에게 간곡히 부탁한다. “진주성에 들어가 주시오.” 곽재우가 합세한다면 뭔가 길이 트이지 않을까. 그러나 곽재우는 이 요청을 딱 잘라 거절한다.

"오직 임기응변하는 자만이 군사를 부릴 수 있고, 지혜로운 자만이 적을 헤아릴 수 있습니다. 지금 적병의 성대한 세력을 보건대 그 누구도 당하지 못할 기세를 떨치고 있습니다. 3리밖에 안 되는 성으로 어떻게 방어할 수 있겠소이까. 나는 차라리 밖에서 응원을 할지언정, 성 안에 들어가지는 않겠소.”
,
임진왜란이 일어나자마자 의병을 일으켰고 지금껏 적지나 다름없던 경상도에서 가장 열심히 싸웠고 곽재우라면 그 이름이 높아서 일본군들조차 ‘꽉쥐’라고 부르며 두려워하던 사나이. 그가 이렇게 나올 줄은 꿈에도 몰랐던 경상 우감사 김륵이 벌컥 화를 낸다. "장수가 대장의 명령을 거역하다니 이래가지고 군율이 서겠는가."
.
하지만 곽재우는 한 수를 더 뜬다.
.
"나 하나가 죽든 살든 문제가 안되지만, 그 수많은 전투를 벌이며 경험을 쌓은 금쪽같은 병사들을 어떻게 승산 없는 싸움에 몰아넣는단 말입니까. 그냥 여기서 자결을 할지언정 진주성엔 들어가지 못하겠소."
.
곽재우는 끝내 진주성 입성을 거부했다. 그 뿐이 아니었다. 그는 진주성에 들어가기로 한 충청도 병마절도사 황진을 만난다. 노골적으로 진주성 입성을 말리기 위해서였다.
.
"장군은 충청도 병마절도사요.(즉 진주성을 위해 싸울 의무가 없소) 당신 같은 중요한 사람이 왜 조정의 특별한 명령도 없는데 뻔히 죽을 곳으로 가겠다는 거요? 나랑 같이 밖에서 싸웁시다." 그러나 황진 역시 단호했다.
.
"이미 김천일 등과 약속을 했소. 어찌 외로운 처지에 이르러 약속을 어길 수 있단 말입니까? 죽는 한이 있더라도 신의를 저버릴 수는 없지요."
.
곽재우는 결국 이별의 술잔을 나누고 진주성으로 들어가는 황진의 뒷모습을 가없이 바라본다. 함께 하지 못함을 아쉬워했을까. 끝내 황진을 성에서 끌어내지 못한 것을 슬퍼했을까. 두 사람은 공히 용감한 사람들이었다. 곽재우는 노비와 농민들 몇 명으로 의병을 일으켜 그때껏 싸워 온 사람이었고 황진은 조선 무장들 가운데 가장 치열하게 싸운 장수였다. 하지만 일신의 안위 따위는 가리지 않던 용감한 두 사람의 앞길은 그렇게 갈렸다.
.
마침내 제2차 진주성 혈전이 시작됐다. 1593년 6월 21일. 거의 10만 대군의 일본군은 진주성을 겹겹이 에워싸고도 남았다. 하지만 조선군은 잘 싸웠다. 그 정점에는 황진이 있었다. 그는 목숨을 돌보지 않고 성벽을 뛰어다니며 전투를 지휘했고 불사신같이 보이는 듬직한 용장이 문루에 버티고 서 있는 것만으로도, 그 우렁찬 호령이 울리는 것만으로도 사람들은 공포를 떨쳐 냈고 이를 악물었고 돌을 던지고 사다리를 밀쳐 냈다. 그러나 죽여도 죽여도 성 아래를 둘러싼 10만 대군의 수는 조금도 줄지 않았다. 조선군과 백성들은 점점 지쳐가고 있었다.

6월 28일. 격렬한 전투 끝에 기어코 일본군이 성벽 위에 올라섰다. 절체절명의 순간 김해 부사 이종인이라는 장수가 일본군을 향해 내닫는다. 그 뒤를 따라 조선군이 저마다 무기를 들고 뛰어들었고 지옥 같은 육박전이 시작됐다.
.
원래 단병접전, 즉 근거리에서의 칼싸움이라면 일본군이 나았으나 일단 몸으로 부딪친 뒤에는 칼솜씨를 발휘할 틈도 없었다. 김해부사 이종인을 선두로 조선군은 물러서지 않았고 성벽 위의 일본군은 속절없이 쓰러져 갔다. 대승리였다. 성 밖의 시신은 성 높이만큼 쌓였고 성벽 위 일본군 시체의 높이 또한 성가퀴를 넘었다.
.
이 소식을 들은 황진이 달려왔다. 병사들은 지친 몸으로도 군례를 올리며 병마절도사를 맞았고 황진은 믿기지 않는 승리를 치하하며 일본군의 시산혈해를 둘러 보았다. 바로 그때 시신 사이에서 불이 번쩍했고 사람들의 귀에 익숙한 조총 소리가 천둥처럼 울렸다. 그리고 황진이 마치 도끼에 찍혀 나간 아름드리 나무처럼 육중하게 쓰러지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시체더미에 숨어 있던 일본군의 저격이었다. 그 뒤 황진은 다시 눈을 뜨지 못했다. 진주성의 기둥이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그가 죽은 후 진주성은 하루도 버티지 못했다.
.
용감한 항전. 그러나 끔찍한 패전. 이 소식을 접한 이순신은 난중일기에 자신이 들은 사실을 적은 후 이렇게 덧붙여 놓았다. “나는 밤새 혼자 앉아 있었다.” 뭐라 덧붙일 것도 없고 그렇고 싶지도 않은 슬픈 군인의 마음. 그 충격이 얼마나 컸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
하지만 곽재우 역시 밤새 그렇게 앉아 있었을 것이다. 되지 않는 싸움은 못하겠으며 부하들을 지에 내몰지는 못하겠노라 부르짖었던 자신의 모습이 일순 회한으로 떠오르기도 했을 것이다. 차라리 그들과 함께 죽었다면 이리 안타깝지는 않으리라 눈물을 흘렸을 것이다. 그러나 곽재우가 지켜야 할 의(義)는 따로 있었다.

그에게 의란 용감하게 싸우다 죽는 것이 아니라 지혜롭게 살아남고 살아남아 이기는 것이었다. 의병을 일으킨 뒤 일본군과 여러 번 싸우면서도 그는 절대로 정면으로 부딪치지도 않았고 불리한 농성전을 자초하지도 않았다. 언제나 지형 지물을 즐겨 활용했고 치고 도망가다가 또 뒤통수를 치고 다시 돌아서 숨어버리는 유격전은 그의 장기이자 일본군에게는 최대의 공포였다.
.
곽재우에게는 이런 유명한 설화가 따라다닌다. 일본군 가는 길에 벌통 든 궤짝을 놓아 일본군이 상자를 열어 보고 벌에 뜯길 때를 틈타 섬멸했고 그 다음에 또 일본군들 앞에 궤짝을 갖다 놓는다. 바짝 약이 오른 일본군이 상자에 불을 질러 버리자 갑자기 폭음이 이곳 저곳에서 진동하고 일본군들이 붕붕 날아갔다. 상자에는 폭탄이 들어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곽재우는 결코 같은 작전을 두 번 해서 쓰지 않고 항상 적의 예상보다 앞서서 작전을 세웠고 그들의 허를 아프게 찔렀다. “우리는 살기 위해 싸우는 것이지 죽기 위해 싸우는 것이 아니지 않은가.” 아마 곽재우는 이렇게 말했을지도 모른다.
.
아마도 곽재우 나름의 의기가 가장 극명하게 발현된 것은 전쟁이 끝난 후 일본과의 화친을 주장한 때가 아닌가 한다. 전쟁은 끝났으되 일본은 불구대천의 원수였고 후손 대대로 용서할래야 할 수 없는 악마의 집단이라는 인식이 팽배해 있을 즈음이었다. 그런데 몇 안되는 살아남은 전쟁 영웅이자 일본군과 가장 격렬히 싸운 사람 중의 하나인 곽재우가 일본과 화친해야 한다는 상소를 올린 것이다.
,
아마 그의 친구들 가운데에는 진주성에서 죽어간 황진과 6만 조선 백성들이 대체 무엇이라 하겠느냐며 힐난하는 이들도 있었을 것이고, 남명 조식을 함께 스승으로 모시는 처지였던 북인들도 곽재우를 격렬하게 비난한다. 실록을 쓰는 사관들조차 곽재우의 공을 칭찬하면서도 “화친을 주장한 건 곽재우가 공부를 안한 탓”이라는 식의 기록을 남길 지경이었다. 그러나 곽재우는 의연했다. 그 상소의 일부를 잠깐 읽어 보자.
.
"화친을 믿고서 방비할 것을 잊는 자는 망하는 것이요, 화친을 말하면서도 마음을 다해 노력하는 자는 보존되는 것입니다. 적을 게으르게 하고 백성을 쉬게 하는 방법으로 화친보다 나은 것은 없습니다.”
,
뒷받칠할 능력이 없는 대의명분보다는 안정과 재건을 위한 굴욕도 감수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 역시 그의 주장이 받아들여지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임금부터 장졸들까지 일본이라면 이를 박박 갈고 그들과 다시 친하게 지낸다는 사람이 있으면 목을 따겠다고 덤벼도 시원치 않을 상황에서 어찌 화친 주장이 용납된다고 상상할 수 있었으랴. 그러나 곽재우는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
어쩌면 그 순간이 그에게는 황진의 진주성이었을지도 모른다. 자신이 모욕당하고 자신의 주장이 무시될망정 백성들의 휴식과 안전을 위해서 물불 가리지 않고 뛰어들어야 할, 무모하게라도 들이밀어야 할 무대 말이다. 그렇게 곽재우는 자신의 의를 지켰고 자신의 선택이 비겁함의 소산이 아님을 증명했다. 혹여 곽재우는 황진을 두고 이렇게 중얼거리지 않았을까. “보고 있나 명보? (황진의 자) 이제 진주성에 들어가던 자네의 심경을 확실히 알겠군.”
.
곽재우와 황진. 그 둘 가운데 누가 옳았다고 단언할 수는 없다. 곽재우의 선택은 언뜻 비겁해 보이나 지극히 현명했다 할 것이다. 그러나 황진 이하 진주성 방위군이 후퇴하고 진주성을 비웠더라면 살기등등한 10만 일본군이 빈 성만 차지한 후 고이 돌아간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었다. 황진의 선택이 무모해 보이나 소중한 이유다.
.
진주를 포기하고 전라도로 넘어가 버렸던 관군도 비난할 수만은 없다. 일본군 10만 대군을 상대하려면 그들 역시 모든 것을 걸어야 할 테고, 자칫하면 조선의 전투력이 깡그리 녹아버릴 수도 있었다. 저마다의 의(義)는 그들 안에 있었다.
.
꼭 곽재우와 황진 뿐이 아니더라도 오늘날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 앞길에도 종종 이런 선택의 기로가 들이닥치기도 한다. 그때 우리가 지녀야 할 자세는 임진왜란 당시 진주성에서 보여준 두 의로운 사람들의 삶의 궤적을 이어받는 일일 것이다.
.
지혜롭되 비겁하지 않고 용감하되 무모하지 말 것. 더 많은 사람들의 평안과 이익을 위해서 자신의 정성을 아끼지 않을 것. 곽재우와 황진은 우리에게 그런 당부를 남기고 있는 것은 아닐까.

Sort:  

방금전 촉석루의 야경을 찍고왔는데 너무 똑같아 신기하군요 ㅎㅎ

퍼온 그림인지라 ^^ 혹시 제가 퍼온 것이? 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