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5년 5월 29일 육삼이의 탄생
내 이름은 육삼이라고 합니다. 키가 좀 크죠. 지상이 60층이고 지하에 들어간 발뿌리도 3층이라서 더해서 63층이라고 해서 63이라는 이름이 붙었죠, 63빌딩. 몇년 전 드라마 추적자에서도 내 이름 가지고 장난치던데. 결혼 많이 한 여자 형사가 나를 지상 63층이라고 얘기했다가 면박을 받는 장면 기억하실라나. 여러 설이 분분하지만 설계상으로 나는 지상 60층 지하 3층이 맞아요. 전망대에서 올라가는 계단이 있더라는 분도 계시지만 그건 사실 전망대가 59층이기 때문에 그래요. 죽을 4자 불길하다고 44층이 아예 없거든.
암튼 나는 1980년 착공 때부터 화제였지요. 당시 서울에서 제일 높은 빌딩은 청계천의 31빌딩이었어요. 31층이라고 치고 그보다 두 배 높이의 건물이 별안간 들어서는 것이었으니 장안이 떠들썩할만도 했죠. 한국의 랜드마크라 할만 했죠. 여의도에 있는 방송국 조연출들은 나 때문에 골탕 많이 먹었어요. 시간에 늦는 선배한테 전화를 하면 이런 대답이 돌아오는 거야. “어 다 왔어. 63빌딩이 보여.” 젠장 나는 성산대교에서도 보인단 말이야.
미국의 SOM 사하고 국내 건축가 박춘명씨가 설계를 맡았고 총공사비는 1800억이 들어갔어요. 그때하고 지금하고 화폐 가치가 다르니 내가 어느 정도 값어치를 했는지 알겠죠? 그래서 그런지 다른 날림 공사 건물들과 나는 차원이 달라요. 얼마 전에 리모델링 공사가 시작됐는데 골조는 120년 갈만큼 튼튼하다는 거예요. 그 안의 기계장치들이 수명이 다했다는 거지. 초속 40미터의 강풍과 진도 7의 지진에도 버틸 수 있도록 튼튼하게 지어졌다니까요. 여의도에서 강도 7의 지진 나면 아마 나밖에 서 있는 건물이 없을걸.
내 벽면을 장식한 황금유리판도 장안의 화제였죠. 왜 그런 농담 기억나요? 내가 황금색으로 지어진 이유. 전쟁이 나면 국회의사당 돔이 짝 갈라지면서 레이저 빔 발사대가 뜨고 거기서 레이저가 발사되면 내 황금빛 몸체에 반사돼 한강을 내리쬐고 그러면 한강이 쫙 갈라지면서 마징가 z가 출동한다는 그 장대한 농담 말입니다. 내 황금 유리판은 미국에서 수입된 건데 어느덧 세월이 가면서 그 회사가 부도가 났다네요. 하지만 내 몸체의 황금유리판은 몇 개 깨진 게 없으니 다행이지요. 혹여 깨지면 어쩌냐고? 뭐 1000장 넘게 재고를 확보하고 있다니 걱정붙들어 매요. (그리고 리모델링 때 싹 개비했다고도 하고)
원래 여의도가 지반이 약한 곳이라 기초공사도 무지 힘들었고 공사 소음 때문에 집값 떨어진다고 아우성도 많았지만 어쨌건 들어선 다음 나는 서울 아니 대한민국의 랜드마크가 됐지요. 얼마나 부러웠으면 북한에서 나를 이겨 보겠다고 유경호텔 세우다가 그 꼴이 났겠수. 동양 최고였지. 남산보다 1미터 낮을 뿐이었고. 그 뒤에 타워팰리스나 하이페리온이 나를 앞지르지만 이상하게 사람들은 내 키가 젤 크다고 해요. 그런데 이 자존심 높은 키에 먹칠을 했던 놈이 있었지. 전두환이라고. 아 글쎄 그 작자가 북한이 금강산 댐을 터뜨리면 내 절반이 잠긴다고 뻥을 치지 뭡니까. 와 나 그때 열받아서 쓰러질 뻔 했어. 소행성이 한강에 떨어져고 그런 홍수 안난다고요.
내가 완전한 모습으로 태어난 건 1985년 5월 29일, 사람들이 탄성을 내지르면서 내 안의 부대시설물들을 돌아다니기 시작한 건 7월 27일. 솔직히 말하면 서울 사람들보다는 시골 사람들이 배는 더 왔을 거요. 그리고 유치원생하고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많았지요. 나도 젊은 아가씨들 좀 구경하고 싶었는데 여기 오는 젊은 여자분들은 대개 애인하고 폼 잡으러 오는 사람들이 많았지 뭐. 전망도 전망이지만 내 발치의 수족관하고 아이맥스 영화관도 대인기였지. 하지만 연예인 정치인들은 질리도록 봤어요. 김희애 이찬진 부부나 유호정 이재룡 부부나 얼마전의 하하처럼 유명인사들 결혼식도 내가 베풀어 줬고 정치인들 후원회 출판기념회는 툭하면 열렸고 언젠가는 프로야구 선수협의회 한다고 스타들이 몰려와서 황홀하기도 했지.
그 가운데 내 기억에 남는 행사는 1999년 8월 29일의 한 행사였소. 평소에는 나랑 별로 친하지 않았던 사람들이 대거 몰려와서 상기된 얼굴로 행사를 치르는 품들이 별다르게 보였나 봐. 그 행사의 이름은 민주노동당(가칭) 창당 발기인 대회였지. 전국에서 노동자 농민 빈민 2천여 명이 몰려왔었지. 기억나는 얼굴들만 해도 엄청 젊었던 권영길, 말상 단병호, 돌아가신 김진균 교수, 넙덕한 이갑용 등 열 손가락이 모자랍니다. 이때 투표로 정했던 고것 중 하나가 당명이었죠 아마. ‘민주통일진보당’하고 ‘민주노동당’이 맞붙었고 민주노동당이 이겼었지.
그때 뜻밖의 손님 하나가 있었지요. 당 이름 싸움에서 보듯, 당시 이른바 주류 NL들은 민주노동당을 고깝게 봤지. 강령에서 북한에 대해 비판적으로 묘사한 게 심사가 뒤틀렸겠지. (하여간 그 친구들은 나처럼 머리 속 리모델링을 좀 해야 돼.) 그런데 글쎄 그 자리에 김석형씨가 있지 뭐겠소. 김석형이 누구냐 하면 다큐멘터리 <송환에 등장하는 비전향 장기수. 뭐 나이 칠순이 넘어도 골수 빨갱이였던. 그리고 남한의 독자적 진보정당을 인정하기 힘든 처지의 그 양반이었단 말이야. 장기수들 내부에서도 많은 비판이 있었지만 그는 민주노동당을 입당했다고 해. 지금은 민주당 가 있지만 당시 민주노동당의 젊은 피였던 박용진의 회고를 들어보면 그는 장기수 송환 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제가 북으로 돌아가면 당비 납부가 제대로 안될 것 같아 당비납부는 통장에 2년치 당비 넣어두고 갑니다.. 2년 뒤에는 통일이 되어야지요. 그 때까지는 우리가 다시 만날 길이 열려야 겠지요.”
민주노동당 창당 발기인 대회 때 모였던 그 수천 명의 면면을 나는 유달리 상세히 기억합니다. 왜? 나랑 그때껏 인연이 깊지 않았던 사람들이잖아. 그들이 한 깃발 아래 모여서 토의하고 외치고 주장하던 목소리 또한 생생해요. 그들은 열의에 차 있었어. 희망이 가득했고 의지가 빛났다고. 이갑용부터 김석형까지 남한 진보정당 결성에 동의하는 모두가 참여한 자리였다고. 한다 하는 정객들의 한 끼 10만원짜리 식사 곁들인 행사보다, 유명 연예인의 결혼식과 디너쇼보다 내 그 행사를 기억하는 건 그들의 눈빛 때문이지요. 물론 그 뒤 세월에 그 눈빛들이 어떻게 갈라지고 탁해졌는지는 내 알 바 아니지만.
어쨌든 나는 오늘도 한강변에 우람하게 서 있습니다. 김석형부터 조갑제까지 김대중부터 이름없는 농민들까지 모두 품어 봤던 나도 이제 어엿한 대한민국의 역사 한 자락이 되지 않았겠어요? 지날 때 한 번쯤은 올려다 봐 주시우. 저기서도 참 많은 일들이 있었지 하고 말입니다.
내일 63아쿠아리움갈 예정인데
63한테 인사한번 해야겠군요 ㅎㅎ
아쿠아리움도 많이 낡았더군요... 옛날에 비하면 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