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6년 10월 5일 모르데차이 바누누의 폭로
1986년 10월 5일 영국 선데이타임즈는 특종 기사 하나를 터뜨린다. 이스라엘의 핵 시설에서 9년간 근무한 나이 서른 둘의 핵 기술자 모르데차이 바누누가 제공한 자료를 바탕으로 이스라엘의 핵 비밀을 폭로하는 기사였다. “이스라엘은 네게브 사막지대의 디모나에 있는 비밀 지하기지에서 지난 20년간 핵탄두를 생산해왔고, 미국 소련 영국 프랑스 중국에 이어 100~200기의 핵무기를 보유한 세계 6대 핵 강국”이라는 것이 기사의 내용이었다. 이스라엘의 핵무기 현황을 밝힌 적은 없지만 대충 보유하고 있으리라 짐작하던 양보다 10배는 더 많은 수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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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세계가 경악했다. 이에 따르면 이스라엘은 북아프리카와 아라비아 반도, 이라크에 이르는 이슬람 세계를 쑥밭으로 만들기에 충분한 핵탄두를 보유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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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누누는 모로코에 거주하다가 이스라엘로 이주한 독실한 유태인의 자식이었다. 그는 이스라엘 비밀 핵 시설 기술자로 근무하고 있었지만 뜻밖의 해고를 만난다. 그 이유는 무능함보다는 그의 과거 이력 때문이었다. 이스라엘 정보 기관은 그가 대학 시절 좌파 학생운동에 가담한 정황을 포착했고 이는 핵 시설 근무로서는 결격 사유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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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과거를 캔 것은 성공적이었을지 모르나 이스라엘은 그로 인해 낭패를 보게 된다. 해고 전 ‘비밀엄수’ 서약을 하긴 했으나 바누누는 섬유공장으로 위장한 핵시설을 몰래 촬영한 필름을 확보하고 있었다. 핵무기 개발 반대 운동을 하는 기독교 단체와의 교류를 통해 종교도 기독교로 개종하고 반핵운동의 신념을 확립한 그는 마침내 선데이 타임즈를 통해 이스라엘의 치부를 만천하에 들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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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기사가 폭로되던 날 이미 그는 자유의 몸이 아니었다. 선데이 타임즈가 사실 확인을 위해 이스라엘 언론과 접촉한 것이 빌미가 되어 이미 악명 높은 모사드는 바누누를 타겟으로 잡고 있었고 9월 말 그를 납치해 이스라엘로 데려왔던 것이다. 바누누에 따르면 미모의 여성을 만나 술 한 잔 했는데 깨어나 보니 이스라엘 감방이었다고 한다. 나찌 잔당 아이히만을 아르헨티나에서 납치해 올 때도 그랬지만 이스라엘 모사드는 정보 기관으로서는 대단한 능력을 발휘한다. 그 능력의 도덕성 여부는 차치하고. 어느 나라 정보 기관처럼 요원들이 인터넷에서 댓글이나 달고 자빠졌다면 죽었다 깨나도 못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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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누누는 반역 혐의로 18년 형을 선고받는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가히 그 나라 역사인 구약의 아합을 능가하는 잔인함을 선보인다. 18년 가운데 바누누는 12년간 독방 생활을 해야 했던 것이다. 그 뿐이 아니었다. 바누누는 창문도 없는 좁은 방에서 24시간 전등이 켜진 채로 지내야 했다. 교도소 당국이 그 등을 꺼서 그나마 주야를 구분할 수 있게 해 준 것은 2년 반이라는 시간이 흐른 뒤였고 신문이나 TV 시청도 허용되지 않았으며 면회도 직계가족과 변호사에게만 허용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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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나마 독실한 유태교 신자였던 부모는 기독교로 개종한 국가적 배신자 아들과 의절을 하고 한 번도 찾지 않았다. 동생의 불법 납치와 재판의 부당함을 호소하던 형도 간첩으로 몰려 망명객이 돼야 했다. 이스라엘 언론들은 그의 대학 시절 누드 모델 활동까지 세세히 끄집어내면서 ‘정신병자’로 몰아갔던 바, 정말로 이스라엘 당국은 이런 교도소 생활을 통해 그를 미치게 만들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아니 그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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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는 끝내 18년의 형기를 끝내고 만기 출소한다. “당신들은 나를 미치게 하는 데에 성공하지 못했다!”가 그의 일성이었다. 미치지 않았을 뿐 만 아니라 그의 반핵 신념은 더욱 당당해졌다. “ 나를 배신자라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말하겠다. 나는 내가 한 일에 대해 자랑스럽고 행복하게 생각한다.... 국제원자력기구(IAEA)는 즉각 디모나 핵발전소에 대한 사찰을 실시하라.....나는 이스라엘을 또다른 홀로코스트(유대인대학살)로부터 구하기 위해 폭로를 했다. 내가 무거운 처벌을 받았으나,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 일이었다고 생각한다. 나 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이 그것(핵무기 폭로)을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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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 인들 대다수는 그를 조국의 배신자로 취급했다. 그를 죽여야 한다는 여론이 1/3을 넘었고 언론은 그의 행보를 일일이 추적, 공개함으로써 사실상 그를 공격할 것을 사주했다. 바누누는 생명의 위협을 받으면서도 이스라엘을 떠날 수 없었고 외국인과의 대화도 금지당했으며 거주 이전의 자유마저도 박탈당했다. 그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자신들의 핵무기는 ‘자위적 핵무기’였다. “모든 서구 민주주의 국가들에게 ‘안보’가 중요하긴 하지만, 위험하거나 국가 존재를 위협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안보가 삶과 죽음을 가르는 것을 의미한다.” (예루살렘 포스트) 즉 안보를 위해서 핵무기는 정당하다는 주장이었다.
바누누는 핵무기에 반대하는 자신의 신념 때문에 그렇게 삶의 절정기를 환한 (밤이 되어도 불조차 꺼주지 않는) 감옥에서 보냈고 여생도 험악한 칼날 앞에서 살아야 했다. 그래도 이스라엘의 양심적인 단체들과 진보적 시민들은 바누누를 옹호하며 그의 인권과 자유를 호소했지만 ‘안보’ 논리에 처참하게 밀렸다. 바누누는 2009년도에 한 번 더 체포됐다. 이유는 “외국인과 말하는 것을 금지한 가석방 조건을 어겼다.”는 것이었다. 이 이야기를 들으며 많은 분들이 이스라엘의 만행에 분노하겠지만 그에 덧붙여 진보를 자처하는 세력이 북한의 “자위적 핵무기”에 공감하고 심지어 “그 핵무기는 결국 우리 민족의 무기 아니냐”고 주장하고 있는 우리 현실에 오버랩시켜 보면 알쏭달쏭의 늪에 빠지기도 한다. 어디까지가 이스라엘이고 어디까지가 바누누의 진보인지 분간이 가지 않기 때문이다.
자신의 신념을 위해 목숨을 거는 사람은 많지 않지만 희귀하지도 않다. 그러나 자신의 신념이 자신이 속한 공동체의 ‘안보’나 ‘존립’에 반할 때 그 신념을 끝내 사수하는 이는 매우 드물다. 바누누는 명백하게 그런 사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