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며
영화나 드라마를 감상하려고 할 때
조금이라도 작위적인 장면이 나오면 몰입이 떨어지고
예전에 다른 배역으로 봤던 얼굴이 나오면 머리가 자동으로 드립 연구 모드에 돌입한다.
[형이 거기서 왜 나와? 미드 원 헌드레드에 나온 데스몬드]
[데스몬드는 로스트에서 다음 세상에서 만납시다, 형제여! 라는 말로 깊은 인상을 남겼다.]
그러니 어지간해서는 초반부를 넘기지 못하고 꺼버리게 되는 증후군이 있다.
하지만 이런 나도 가끔씩은 몰입할 수 있는 작품을 찾아 제대로 감상하고 싶기도 하다. 다른 평범한 사람들 처럼.
유치하지 않은 작품을 맞이해서 성공적으로 초반부를 넘기면 무사히 이야기에 빠져들어 다른 세상으로 여행을 떠났다 돌아오는 기분을 느낀다. 그런 작품은 몇 안된다. 학창시절 선생님이 수업중에 딴얘기로 빠져서 정신없이 듣다가 종이 치면서 번쩍 깨어나는 그런 신비한 느낌.
그런 느낌을 준 몇 안되는 영화.
특정한 나라 사람이라는 수식어보다
진정으로 지구 사람이라는 수식어가 어울리는 주인공 존 올드맨의 이야기, The Man From Ear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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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일러를 포함한 리뷰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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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교수
정규직 대학 교수.
언제 짤릴지 모르는 직장인이나 언제 수입이 급감할지 모르는 가게 주인 등 불안정한 직업을 가진 사람이 볼 때, 부러운 자리이자 안정적인 직업이다. 연봉은 모르긴 해도 꽤 높은편일거고, 전공분야의 원하는 연구에 매진하며 살 수 있고, 학생들로부터 존경받고 사회적으로도 인정받는 직업인 것이다. 꿰찼으면 당연히 평생 누리다가 최대한 늦게 퇴직하고 싶을텐데, 존 올드맨은 그런 자리를 내려놓고 돌연 떠나겠다고 선언하며 작별 파티에 동료 교수들을 집으로 초대한다.
픽업트럭에 단촐한 이삿짐을 정리하고 있는 존. 그의 집으로 친구들이 하나둘씩 차를 몰고 나타난다. 주차 걱정 전혀 없이 아무데나 세우는 모습을 보며 나도 저런 곳에서 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직장으로부터 그렇게 멀지도 않으면서도 주변에 이웃집과 다닥다닥 붙어있지 않는 집...
진짜 나로서 진심을 담아 굿바이
갑작스런 소식에 부랴부랴 달려와준 친구들, 따뜻한 작별의 말은 이미 만나자 마자 간단히 다 나누었다.
존이 조니워커 그린 위스키를 꺼내자 모두들 환호하며 잔을 채우고 고고학 교수 댄이 건배사를 한다.
[Long life and good fortune to our esteemed friend and colleague, John Oldman.]
[우리의 친구이자 동료 존 올드맨이 만수무강 하고 운수대통 하기를.]
잔을 비우고 나자 자연스럽게 이 자리에 부른 이유, 무슨 할 말이 있는건지하는 의문과 관심이 존에게 집중된다.
갑자기 종신 교수직을 버리고 떠나겠다고 동료들에게 통보한 다음, 굳이 집에까지 초대해서 앉혀놓았으면 이제는 납득할만한 설명이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말을 꺼내기가 쉽지 않다.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겉보기에 30대 중반으로 보이지만 사실 14000살 쯤 먹었고 노화가 진행되지 않는 몸이라는걸 주변에서 눈치채기 전에 10년마다 아는 사람 없는 곳으로 떠나가야 하는 신세라는 얘기는 분명 시작하기에 쉽지 않은 편에 속할 것이다.
그래서 존은 집필중인 소설의 설정인 것 처럼 이야기를 시작한다.
신학 교수, 고고학 교수, 인류학 교수, 생물학 교수, 심리학 교수...
전공분야에 대한 전문성과 자존심, 어쩌면 인생까지 바쳐 얻은 깊은 지식을 가진
쟁쟁한 인물들 앞에서 섣불리 이런 소설(?) 얘기를 꺼내면 보통은
그 설정의 부실함이나 모순, 디테일 부족 같은 것이 드러나며 깨지기 마련이지만
어떻게 된 일인지 존은 허점을 드러내지 않는다.
모순점을 찾기 위해 여럿이 돌아가며 심문하는 상황에서 모순 없이 대답할 수 있다면 진실을 말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존은 3인칭으로 하던 소설 얘기를 은근슬쩍 1인칭, 자기 자신의 관점으로 바꿔서 말하기 시작한다.
심상치 않음을 깨달은 교수들이 존의 이야기에 빠져들고
여러 질문 가운데 누군가 이런 질문도 던진다.
이렇게 비밀스러운 얘기를 왜 우리들에게 해주는건가.
존의 대답.
여러분들에게 작별인사는 진짜 나 자신으로서 진심을 담아서 하고 싶었다. 그동안 알고있던 꾸며낸 모습이 아닌.
분노, 좌절
이야 재미있다 그것 참 신기한 이야기군
꺼내기 힘든 진실을 얘기 해줘서 고마워
어쩌면 존 올드맨은 이러한 반응을 기대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람들의 반응은 분노와 좌절이었다.
동료들은 학자답게 존의 이야기에 대해서 이론적인 가능성을 인정하고, 모순점을 드러내기 위한 질문을 던지지만 그 모든 질문들이 다 반박당하면서 점점 분노와 좌절감에 빠져들게 된다.
증명할 수 없는
자신이 구석기 시대에 태어나서 지금까지 살아남았다는 존의 주장 vs 그럴리가 없다는 주장.
날카로운 질문들로 궁지에 몰아 심리적으로 무너트려 자백을 받아낸다면 그럴리 없다는 주장이 증명된다.
하지만 모순 없이 다 대답을 한다면 서로가 증명할 수 없는 주장이다.
모든 질문에 막힘없이 답할 수 있다고 해도 설득력을 더 얻을 뿐 증명이 되지는 않는다.
고고학 교수 댄은 지적 호기심과 탐구심을 가진 학자의 태도로 접근하며 마치 설명충 처럼 이야기의 진행을 돕는다. 존의 이야기가 틀렸다는걸 증명할 수 없다면 일단은 맞다고 가정하고서 이야기를 계속 진행해보자는 얘기다.
생물학자 해리는 존에게 자신의 실험실에 잠깐 들러서 몇가지 간단한 실험으로 영생의 몸인 것을 증명할 것을 제안한다.
존은 1000년간 갇혀서 연구당할지 모르는 실험실은 경계해야 하며 자기는 증명하고 싶지 않다고 거절한다.
친구지만 존에게는 너무 위험한 모험일 것이다. 만약에 영생의 몸으로 결론 나면 해리는 실험결과를 함구한채 존을 그냥 보내줄까? 실험 결과를 세상에 발표하면 그다음 수순은? 정말로 갇혀서 실험당하는 신세가 될지도 모르는 일이다.
인간은 상황에 따라서 돌변하고 잔인해 질 수 있다는 것... 오랜 경험으로 경계심을 품게된 모습을 보며 오싹함을 느꼈다.
존은 자신과 비슷하게 영생하는 사람을 만나 이틀에 걸쳐 얘기를 나눠본 적이 있다고 말한다. 꽤 설득력 있는 얘기를 들으면서 상대방도 불사자인 것 같기도 했지만 어쩌면 거울처럼 맞장구만 치며 거짓말을 하는지도 모르기 때문에 완전히 믿을 수는 없었다고 한다.
같은 논리를 존 올드맨 자신에게도 적용해볼 수 있다. 이 자리에서 불사의 몸으로 경험한 것을 이야기는 해줄 수 있으나 증명할 수 없기는 마찬가지라는 것.
성경에 기록된 인물
종교쪽 역사에 기록된 적이 있느냐는 질문에 존은 곤란한 기색을 보이며 통과하고 다음 질문으로 넘어가자고 한다.
그러자 청중들은 처음으로 궁지에 몰았다는 승리감에 대답을 강요하고 존은 얘기를 시작한다. 성경에 꽤 유명한 인물로 기록되었다는 얘기를.
워낙 단순해서 더 진짜같은, 종교에 대한 상식을 뒤엎는 이야기에 모두들 충격을 받는다.
심리학자이자 가장 연장자(겉보기에는...)인 윌이 나서서 이제 그만 거짓말을 끝내라고 강요한다. 권위있는 심리학자이자 정신과의사로서 주의깊게 관찰이 필요하다는 소견을 내겠다는 협박과 함께.
이에 존은 거짓 연기를 한다. 여기까지가 스토리였고 장난쳐서 미안하다고 마무리 지어서 사람들이 충격에서 나오도록 해주었다.
샌디
조교수 샌디. 존에게 사랑을 고백하지만 비극(결혼해서 아이를 낳으면 샌디와 아이들은 나이를 먹고 결국 죽게되는 동안 존은 그걸 지켜봐야 함)이 예정되어 있다는 이유로 존에게 거절당한다.
샌디도 영생하는 존재라는 분석글을 본 적이 있다. 확실히 묘한 연출이 있긴 하다. 다른 사람들이 놀라는 타이밍에 샌디는 놀라기보다는 사람들 반응을 살핀다. 마지막에 윌이 죽었을 때도 의미심장한 말을 한다. You've never saw a grown child die. (장성한 자식이 죽는걸 본건 처음인가 보군요.)
영화를 여러번 다시 보고 나서 나름 결론내자면
감독의 의도가 있었다면 좀더 명백한 연출이 있었을테니 샌디는 일반인이 맞다는 것이다.
존이 혼자 차를 몰고 떠나려 하다가 멈춰서 샌디와 함께 가기로 한건 비극이 예상되더라도 현재의 감정에 충실하자는 태도라고 생각된다. 미래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현재를 살지 못한다면 앞으로도 영영 현재에 충실하지 못한 삶이 이어질테니.
엔딩곡 Chantelle Duncan - Forever
링크 : https://www.themoviedb.org/movie/13363-the-man-from-earth
평점 : AAA
뭔가 너무 궁금해지는 그런 영화네요. ^^
꼭 보세요~
이영화이서 > 존은 자신과 비슷하게 영생하는 사람을 만나 이틀에 걸쳐 얘기를 나눠본 적이 있다고 말한다.
영화보면서 이사람이 누굴까? 궁금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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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무지 떠오르는 인물이 없더군요. 그냥 거짓말장이 였을거 같기도 하고...
조만간 곧 봐야겠습니다.
리뷰만 보아도 꿀잼이네요!
즐겁게 감상하시길.!
드라마 도깨비의 김신이 생각나는 영화네요.^^
트리플 에이에서 자주 뵙겠습니다.
마무리하지 못했는데 봐야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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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리뷰를 통해 보고 싶어진 영화네요. 꼭 한번 봐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