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의 경제 시스템이 '성장'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것의 의미를 '더 많은 것을 누릴 수 있게 되는 것'으로 생각할 것이다. 예를 들어, '가정 경제'의 성장은 전에 살던 집보다 더 크고 좋은 집에 살게 되며, 비싸서 먹기 어렵던 것을 먹게 되고, 가보지 못했던 곳에 가게 되는 것이다. 어느 누구도 100원을 벌어서 100원짜리 쵸코파이를 사먹다가 200원을 벌어서 200원으로 가격이 오른 쵸코파이를 사먹는 것을 '성장'이라고 부르지는 않을 것이다. 오히려 전과 같이 100원을 버는데 쵸코파이 가격이 내려서 100원으로 두개를 사먹을 수 있다면, 그것이 '성장'의 뜻에 부합하는 변화일 것이다.
그렇다면, 혁신이라고 평가되는 블록체인 기반 가상화폐 경제는 과거보다 나은 미래를 약속해 주는 것일까? 단지 중개자에게 주던 수수료가 줄어든 만큼 내 수입이 늘어나는 것 정도라면, 그게 머 그리 대단한 것일까? 중앙집중적 기관이 내 정보를 들여다 볼 수 없게 된다는 것이 그리 대단한 가치가 있는 것일까? 서구의 개인주의적 전통에서 국가에 의한 사적 영역에 대한 개입은 매우 민감한 사안일지 몰라도, '나라가 하는 일'이라면 프라이버시는 희생할 수도 있다는 정서가 여전히 다수인 한국에서는 그리 중요한 일이 아닐 수 있다.(한때 전세계적으로 DPI, Deep Packet Inspection이라는 기술로 이동통신 사업자들이 무선 데이터 트래픽의 속도를 제한하는 제도를 도입하던 시기에, 유럽에서는 '왜 들여다 보는가?'가 문제가 되었지만, 한국에서는 '난 속도 무제한이라고 해서 가입했다'가 주관심사였다^^)
집중화된 중개 기관(금융기관)에 의존하지 않을 때 가능한 것들
가상화폐로 가능해지는 것이 무엇일지 떠올려 보려고 하면, 우리는 자연스럽게 현재 법정화폐로 금융 기관을 통해서 하던 것 중에서, 가상화폐로 하면 더 좋아질 것이 무엇일까를 생각하게 된다. 그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것인데, 가상화폐를 소개하는 많은 사람들이 가상화폐의 가치를 법정화폐의 대체재로서 설명했기 때문이다. 당연히 그들이 그렇게 설명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은, 독자들(혹은 청자들)이 가진 '화폐'에 대한 경험이 '법정화폐' 뿐인 상황에서 그것을 기초로 이해할 수 있게 설명하려다 보니 그렇게 된 점도 있다. 그러나 가상화폐는 우리가 법정화폐 중심의 경제 체제에서 경험해 보지 못하거나 이해하기 어려운 것들이 더 많이 내포되어 있다.
예를들어, 한 사람당 0.5원씩 기부하는 모금활동을 생각해 보자. 현재의 한국은행은 1원 이하의 화폐를 찍어내지 않는다. 그리고 어떤 은행도 인터넷 뱅킹에서 0.5원 송금을 제공하지 않는다. 설혹 어떤 은행이 그런 거래를 제공한다고 하더라도, 그 거래를 처리하는 비용(수수료)이 송금액에 비해 너무 크기 때문에, 현실에서는 일어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만약 가상화폐로 0.5원을 송금하면서 수수료를 0.1원으로 책정한다면, 그 거래는 작동할까? 당연히 작동한다.
0.5원을 전세계 누구에게나 송금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 그리 중요한 것일까? 그것의 가치는 네트워크 물리학자인 바라바시가 제시한 멱급수 법칙이 설명해 주고 있다.
무작위 네트워크와 스케일 프리 네트워크, Linked, 바라바시(2002)
바라바시는 위의 그림으로 사회기술 시스템에서 나타나는 네트워크 현상을 설명하였는데, 여기서 바라바시가 펼친 주장의 핵심은 ‘이 세상 모든 것은 극소수의 노드로 연결이 집중된 스케일 프리 네트워크로 진화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바라바시가 이야기한 또 하나의 중요한 사실은 연결을 한두 개만 갖고 있는 노드들 역시 무수히 많다는 것이다. 이것들을 낮은 비용으로 끌어모을 방법이 있다면, 거대한 규모를 만들 수 있다는 뜻이다. 바로 이것을 입증한 것이 ‘롱테일(Long tail)’이라는 개념이다. 이것의 대표적 사례로 거론되는 것이 구글의 분산형 광고인 ‘애드센스’인데, 애드센스는 방문자가 많은 웹사이트를 중심으로 만들어져 있던 웹 광고 상품을 방문자가 별로 없는 사이트들을 많이 참여시키면 거대한 광고 네트워크를 만들 수 있다는 것에 착안한 것이었다. 그리고 구글은 그것을 통해 일시적으로 나타났던 성장 정체 현상을 해결할 수 있었다.
이 이야기를 0.5원짜리 재화 이야기로 끌어오면, ‘세상에는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원하는(연결된) 극소수의 재화가 있지만, 이 세상의 한두 사람만 원하는(연결된) 재화들을 끌어 모으면, 무한대의 재화가 만들어진다’는 뜻을 내포한다. 이는 1년에 3%씩만 성장하더라도 전세계적 호황이라고 보는 근래의 경제 상황을 놓고 볼 때, 세계 경제에 엄청난 성장 잠재력을 공급할 수 있는 원천이 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0.5원의 송금이 글로벌하게 가능해 진다는 것은, 과거에는 '경제' 안으로 포함될 수 없었던 엄청난 양의 0.5원짜리 재화들이 경제 시스템 안으로 진입할 수 있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간단하다. 전세계에 있는 1억원짜리 재화의 합계가 클까? 0.5원짜리 재화의 합계가 클까? 500원을 기부할 의향의 합계가 클까? 1억원을 기부할 의향의 합계가 클까? 가상화폐는 세계 경제에 ‘롱테일 성장’이라는 새로운 성장 엔진을 장착시켜줄 거대한 혁신이다.
'시장'은 유일한 경제 시스템이 아니다
가상화폐로 무엇을 할 수 있을까를 떠올릴 때 우리가 또한 맞닥뜨리게 되는 우리 자신의 한계는, 우리의 경험 속의 화폐는 대개 '시장 중심'이라는 것이다. 물론 연세가 많은 노인들은 어린 시절과 청년 시절까지 '시장' 중심의 경제활동을 하지 않고 살았던 분들이 있다. 옛날 사람들의 상당수는 주로 '부양', '봉사', '선물', '기부'와 같은 비시장적 경제 시스템을 중심으로 살아왔다. 그러던 것이 20세기 후반에 급속한 '시장화'를 거쳐, 이제는 우리가 가치있다고 생각하는 것의 상당부분을 '시장'에 의존하여 획득하며 살고 있다.
가상화폐는 그런 점에서 우리에게 비시장적 경제 시스템을 복원시켜 줄 가능성을 가진 화폐다. 물론 이러한 비시장적 경제 시스템은 자본주의의 밖에 있다. 애덤 스미스는 '시장적 경제 시스템'이 어떻게 '성장'을 만들어 내는지를 보여주었다. 그리고 그것은 정말로 인류에게 엄청난 '성장'을 가져다 주었다. 그러나 이제 인류는 '시장'을 자신들이 가치있게 생각하는 것들을 가져다 줄 유일한 경제 시스템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계획'을 대안으로 생각했던 체제도 있었지만, 그것은 자기 한계를 드러내며 무너졌다.
가상화폐는 가치 이전을 중개하는 상품이나 조직이 없이도, 개인들 간에 직접(P2P) 이루어 질 수 있는 경제 활동을 다양하게 제공할 수 있는 사회기술시스템이다. 그에 비해 발권 화폐를 둘러싼 정치경제 시스템은 오직 거래에 따른 화폐 이전만을 정당한 것으로 인정한다. 내가 돈이 많아서 친구에게 집을 선물하면, 친구는 세금을 내야 한다. '불로 소득'이라는 죄를 저지른 때문이다.
가상화폐를 사용하여 이루어지고 있는 '나쁜 거래'는 가상화폐 경제가 만든 것이 아니다
가상화폐가 유통되던 초기에, 중개 기관이 끼어들지 않으면 '은밀한 거래'가 가능하다는 점이 많은 뉴스를 통해 보도되었다. 특히 마약이나 무기와 같은 '범죄적 거래' 혹은 랜섬웨어를 이용한 협박범의 범죄수익 수취 경로로 비트코인이 사용된다는 것은 공공연한 일이다. 가상화폐의 반대자들이 반대하는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하다. 하지만 현실 속에서는 가상화폐 없이도 거액의 무기가 미국 정부의 영업을 통해 달러화를 매개로 거래되고 있다. '합법적 거래'라고 불리는 그 거래를 통해서도 민간인 학살은 이루어진다. 고액권 화폐를 이용한 범죄적 거래도 여전히 다양하게 일어난다. 법률이 금지하는 거래에 내포된 위험에서 비롯되는 '공급 제한'에 따른 '고수익성'을 노린 시장이 뜨겁다.
무기의 거래가 아니라 생산을 불법으로 하면 될 일을 어렵게들 하고 있다. 마약에 의존하지 않아도 되는 사회를 만들면 될 일을 어렵게들 하고 있다. 우리는 그들이 왜 일을 어렵게 하는지 알고 있다.
(둘러 보니 복제글에 대한 경계(?)가 있으신 듯 하지만, 전체 구성의 일관성과 완성도를 위해, 블로그에 써두었던 글들을 옮겨와야 하는 점을 양해 바랍니다^^)
다른 어떤 매체에 작성되었든지, 가치있는 정보라면 결국 스팀잇에 기록되게 될테니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것 같습니다.
몇 번 읽으면서 요약하고 생각을 덧붙여보았습니다.
돈을 많이 찍어내면, 물가가 오르고, 내가 저축한 돈으로 살 수 있는게 줄어든다. 경제성장은 기술개발로 더 부가가치가 있는 상품을 만들어 팔아 고수익을 얻는 데 있다. 저비용으로 약간의 개선을 하고 마케팅 양념을 뿌리면 훨씬 비싸게 팔아 경제가 성장한다.
블록체인 기술은 스마트계약으로 거의 모든 중개서비스를 대체할 것이다. 또한 소수가 독점하던 정보권력을 공개된 분산원장으로 와해시키고 정보는 공개되어 권력은 약화된다.
바라바시의 연구에 따르면 무수히 많은 노드는 근처의 한 두 군데와만 연결되고, 모든 연결은 중앙 집중으로 진화한다. 적은 돈을 한군데로 모으려면 여러 노드를 거쳐야 하는데, 수수료가 비싸서 불가능하다. 롱테일 기술은 한번에 멀리 보내는 것인데, 현재의 블록체인 기술이 롱테일 기술에 해당된다.
티끌만한 돈이라 하더라도 수수료 없이 전송하면 태산을 만들 수 있다. 멀리서 보낸 티끌을 모아 경제를 성장시킬 수 있는데 이를 롱테일 성장이라 한다.
가상화폐는 시장경제의 성장모델인 신제품 없이도 개개인간 가치있는 중고 물품이나 가치의 교환이 가능하게 한다. 무작정 통화를 찍어내지 않으면서도 가능하다. 단, 정부는 여기에 세금을 매길 수 없고,
은행은 신용창조를 통해 이자를 벌 수 없다.
네. 저는 블록체인을 본격적으로 정치경제학의 대상으로 하는 연구가 시작되어야 하며, 그것을 통해 블록체인과 가상화폐를 향하는 정치적 공격에 대한 대응 준비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더 많은 토론 재료들을 만들어 보겠습니다^^
귀중한 자료 감사합니다.
멱급수 법칙 좋네요, 수많은 0.5원이 만들어내는 가치를 생각해보게 됩니다. 좋은글 감사드려요. 팔로우하고 글 지켜보겠습니다!
감사^^ 멱급수 법칙에 대한 내용은 '시장 중심 경제'에서의 '성장'에 대한 가상화폐적 비전입니다. 하지만 저는 개인적으로 가상화폐의 탈시장주의적 비전에 기대를 걸고 있습니다. 애덤 스미스가 바로 간파했듯이, '시장'은 탐욕스러운 개인들을 통해 작동하며 미래를 만들어냅니다. 그리고 근대 이후 서유럽 경제체제의 역사에서 '시장'은 다른 '경제 시스템'들을 압도하며, 사람들 사이의 연대가 효과적인 경제 원리가 아니라는 것을 입증이라도 한 듯이 위세를 떨쳤죠. 가상화폐 안에 잠재된 '시장주의' 극복의 열쇠를 찾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0.5원정도의 소액결제는 이뤄질수 없지않나요? 수수료가 더 많이 들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