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읽수다.44th《송곳》

in #book6 years ago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날이었습니다. 물안개가 산중턱에서 피어오르는 모양을 감상하다 다소 쌀쌀해진 기운을 느꼈습니다. 어느 후미진 골목책방에 들어가 핸드드립커피로 온기를 채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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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의 취향 공유, 책읽수다 시즌2. 통권 44번째 도서

송곳 4~6, 최규석

1~3권은 3년 전에 책읽수다에서 다룬 적이 있습니다. 완결이 되지 않아 이후 내용이 무척 궁금했었는데 이제야 끝을 보았네요.

전체적인 인상은 무거운 슬픔. 인간은 결국 한낱 인간일 뿐이어서 이윽고 평화를 얻지 못하고 씁쓸한 뒷맛을 남기는 구나, 싶었어요.

다큐도 이런 다큐가 없습니다. 인간에 대한 심리나 관계 묘사와 서글픈 사회상이 너무도 사실적이어서 만화를 보는 것 같지가 않았습니다. 고통스러운 장면들 가운데 가슴을 파고드는 날카로운 대사들은 비단 세상을 향한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매 권마다 울컥한 부분이 있습니다. 명장면 명대사를 꼽아보았어요.

4권. '고구신인지 구고신인지' 노동상담소장이 노조원 교육을 하는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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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회 때도 달리기 일이삼등한테 상 주지 꼴찌한테 주는 거 아니잖아요."

"일등한테 상 주는 걸 누가 뭐라 그래요? 일등 못하면 벌을 주니까 문제지."

"경쟁에서 져서 그런 걸 어쩌라고요. 본인이 책임져야죠!"

노동상담소장은 구조의 문제를 얘기하던 중이었습니다. 우리나라 교육을 착실히, 성실하게 받아온 사람은 이를 순식간에 개인의 문제로 치환해버리는군요.

"패배는 죄가 아니오!
우리는 달리기를 하는 게 아니라 삶을 사는 거요. 우리는 패배한 것이 아니라 평범한 거요.
우리의 국가는 평범함을 벌주기 위해 존재하는 게 아니오! 우리는 벌받기 위해 사는 게 아니란 말이오!"

5권. 이수인이 파업을 서두르려고 하자 그만하고 싶은지를 묻는 구 소장과의 대화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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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하게 자고 싶어요. 음식 맛을 느끼고 싶어요. 싫지도 좋지도 않은 동료들이랑 아무 감정 없이 인사하고 싶어요.
애기한테 바다도 보여주고 싶고..
아내랑 장 보고 같이 밥도 해 먹고.."

일상 속 소소한 행복감을 되찾고 싶다는 이수인에게 지금 그만 두라며 퇴사하라고 쏘아붙이는 구 소장의 멘트가 뾰족하게 날이 섰네요.

"한방 세게 맞고 실려 나가고 싶죠?
싸움도 싫지만 도망치는 건 더 싫은 거잖아.
도망치면 내가 틀린 게 되니까.. 아니..
걔들이 옳은 게 돼버리니까."

6권. 그리고 안타깝고도 씁쓸하고 참담한 장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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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간 사람들이 다 써먹어서 이제 싸울 레퍼토리도 없어..
너무 좋은 사람들만 남아서 미워할 수도 없고..
그래서 나 그냥 나쁜 년 되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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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고문해서 고신이 배에 호스 꽂고 살고 정환이 다리 병신 되고! 그래도 기억 안 나?"

"우리 경찰이 고문하고 그런 거는 일절 없었던 걸로 알고 있는데.. 무슨 착오가 있으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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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한달 육십 받고 살 놈 누구 있어? 쟤는 흙 퍼먹고 사냐?!
그렇게 한판 했지. 그랬더니 이러더라.
'쟤는 활동가잖아. 우리 같은 노동자가 아니잖아.'
내가 이십년간 무슨 짓을 한 건가 싶더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