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영진(1대대 3중대 경기관총분대장)
신영진은 2016년 7월 18일 육군군사연구소와의 면담 인터뷰에 응했다. 개전 당일 그는 1대대 3중대 경기관총분대장으로 보직되어 있었다. 그의 면담내용은 다음과 같다. “(당시 상황에 대한 설명을 부탁하자) 그 당시 그런 공격을 심소령이 가서 전투를 하고 전차를 부수고 그런 시간 여유가 없었어요. (중략) 심소령이 전차에 올라가서 뭘 했다는 건 난 이해가 가지가 않아요. 들어 본 이야기도 없고. (수류탄을 나중에 지급해줬습니까?) 처음에 보급된 건 오후 늦게 쯤 보급되었을 거예요. 25일 오후 늦게 몇 개만 소대 전체에 다 보급이 안 되었어요. (옥산포 전투 당시 어디에 있었는지?) 그 옥산포. (중략) 그 때는 옥산포에 나무가 조그만 했었어. 우리는 중턱에 위치해 있었고, 포위상태에 있었어. (당시 심일이 전차를 부셨다는 소리를 들었는가?) 못 들었어요. 보지도 못했고, (옥산포에 전차가 쭉 오는 건 보셨습니까?) 전차도 보지 못했어요. 나중에 전차를 어디서 봤냐면 소양강 다리를 파괴한 다음에 소양강이 쭉 있으면 소양강 지금도 아마 있을는지 몰라요. 소양강 중턱에 올라가면 그 산이 상당히 커요. 그런데 암벽 비슷한 게 있더라고. 거기에 경기관총을 설치하고 그 때 뭐 장비라는 게 뭐 있었어요? 그 당시 대전차포하고 80밀리 박격포, 60밀리 박격포 그것 밖에 없었어요. 인민군 애들이 가만히 있는데 파괴를 했으니까, 그 당시에 다리를 못 건너고 평야에 들판에 있는데 어떻게 아군들이 쏘는 포가 잘 맞아 야 명중을 관측을 잘 했구나 생각했더니 나중에 그 쪽에서 쏘는 포였어. 우리가 쏘는 포가 아니고, 그 쪽에서 포 쏘는 소리로 연기가 나오게 되니까 우리는 아군이 쏴서 명중하는 걸로 그렇게 인식했지. 그런데 소양강 다리 파괴하고 나서 그 사람들이, 전차가 나오기 시작했어요”
신영진은 육군군사연구소와의 면담에서 앞뒤 정황이 뒤섞인 듯한 증언을 했다. 옥산포와 소양교 등을 헷갈리기도 했다. 증언내용의 일관성에서 문제가 있어 보였다.
하지만 신영진의 증언에서 주목할 대목은 6월 25일 오후 늦게 수류탄을 지급했다는 사실이다. 이날 아침 연대에 비상이 걸려 진지에 투입되었지만, 투입될 당시에는 수류탄을 지급받지 못한 채 오후 늦게(저녁 무렵) 소대별로 약간의 수류탄을 받았다고 했다. 심일 소대는 비상이 걸리자 포가 준비 되는대로 바로 투입되었다. 즉 오전 중에 1차진지(서원리)에 투입되었고 축차적으로 철수 중에 있었다. 심일의 소대는 서원리에서부터 계속 후방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수류탄이 25일 저녁 무렵 소대별로 몇 개씩 지급되었다는 것은 심일 소대가 수류탄을 휴대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것을 추정케 한다. 25일 14:00경 수류탄과 화염병을 이용해 적 자주포를 파괴하기는 물리적으로 어려운 상황이었다. 합리적 의심이 가는 대목이다. 이에 대해서는 육군본부 전체의 상황도 검토해 보아야 할 것이다. 과연 육군 전체에 수류탄 지급문제가 어떻게 처리되었는지 확인해 볼 필요가 있다.
신영진이 7연대 1대대원으로서 당시 전투현장 인근에 있었음에도 심일의 자주포 파괴를 듣지도 보지도 못했다는 것은 당시 그가 소속된 3중대의 진지는 164고지 우측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이었다. 옥산포 지역에서 볼 때는 164고지 거의 후사면에 가까운 지역이었다. 3중대는 25일 야간이 되어서야 164고지 좌측으로 진지이동을 한다.
다만 1대대의 다른 생존자들이 심일의 자주포 파괴를 보지도 듣지도 못했다는 주장과 일치한다. 이들 생존자들도 옥산포를 직접 바라볼 수 없는 지역에 위치해 있었던 것으로 확인된다. 옥산포를 진지에서 직접 관측할 수 있었던 부대는 이대용이 소속되었던 1대대 1중대였다.
잘읽고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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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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