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부터는 확인작업 중, 생존자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면담 내용을 소개합니다.
김운한(16포병대대 군수장교)
김운한은 1950년 6월 25일 전쟁이 발발했을 때, 제16포병대대 군수장교로 보직되어 있었다. 김운한과 심일은 평소 친구지간으로 친하게 지냈으며, 이대용과도 잦은 교류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준장으로 예편한 뒤 몇 차례에 걸쳐 참전자 증언에 응했던 것으로 확인되었다. 육군군사연구소에서 실시한 증언청취 간에는 2016년 7월 7일과 11일, 두 차례의 면담이 이루어졌다. 1차 면담내용은 다음과 같다. “우리가 미리 점령한 관측소에 이대용 그러니까 1대대가 예비로 투입됐습니다. 그 우두산 꼭대기에 (중략) 점령한 곳에 그 이후 이대용이 올라왔고, 그때 합류를 했거든. (그때 1중대 진지에서 심일의 소대가 전투하는 것이 직접 보입니까?) 거기는 얼마 안 됩니다. 옥산포에서 이대용 1중대장이 방어했기 때문에 관측이 가능합니다. 직접 포로 쏘고 안 쏘고 하는 것은 안 보일지라도 그곳에서 응사하는 것은 다 들을 수 있습니다. 요새같이 숲이 많던 때가 아닙니다. 전부 허허 벌판이었어요. (이대용 장군이 굳이 왜 도망갔다고 말했습니까?) 나한테도 얘기 했는데 뭐. ‘야! 도저히 어찌할 방법이 없다. 나는 간다.’하고 도망을 쳤어. (그때 심일을 알고 계셨습니까?) 나하고 친구인데, 뭐. (그래서 보직해임이 되었습니까?) 보직해임이고 뭐고 대전차포가 없으니 무보직이지요. (연락장교로?) 연락장교가 아니야, 그냥 무보직으로 따라 다닌 것이야. (2차 면담에서 따라다니면서 뭘 했느냐는 질문에 ‘놀았지’라고 증언) 그때 수색중대장을 했을 것이요. 춘양에서 수색중대장을 7사단에서인가 했을 겁니다. 그런데 그것도 했다 뿐이지 근거가 없어요. 어디서 전사했는지도 몰라. (중략) 그런데 중대장이 아니고 수색을 하는 중대에 있었어.”
2016년 7월 11일에 실시한 두 번째 면담내용은 아래와 같다. “(이대용 장군이 심일에 대해 주장한 내용을 어떻게 생각하느냐?) 이대용 장군 말이 맞습니다. (그 때) 그 옆에 내가 있었습니다. (심일의 자주포 파괴 이야기를 언제 들었나?) 언제 때는 뭐고 그 이후지, 기록이 나왔다고 하니까 안 것이지. 육탄 5용사가 있는데 5용사는 누가 만들었는지 압니까? 기갑출신 2군단장이 있어요. ‘심일이 혼자 했다고 하는 것이 말이 안 되지 않습니까? 하사관 이름 하나만 불러주십시오’라고 해서 나는 모른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5용사가 나왔습니다. 심일이가 옥산포에서 나하고 있었고, 죽었습니다만 16대대 A포대 전포대장으로 있었던 강기회가 했으면 했지 심일이 한 것이 아닙니다. 강기회가 대포병사격으로 서로 맞대놓고 사격한 것으로 심일이 한 것이 아닙니다. 7연대가 자기들이 거기서 다 했다고 하려고 그것을 만든 것이지 어디 심일이가 그것을 했겠어요? 심일이는 하나의 만들어진 문제인데.....새삼스럽게 나 참! (중략) 전체 사병들한테 무섭지 않다고 하기 위해서 만들어 놓고 왜 이제 와서 야단인가 모르겠어. ‘탱크를 심일이 올라가서 부셨다. 그러니 탱크나 자주포가 무섭지 않다’하는 것을 부하들에게 이야기하기 위해서 손희선 장군을 비롯하여 조작한 것인데....”
김운한의 증언을 평가해 보면 우선 심일의 전장에서 이탈한 부분은 이대용이 주장한 도주가 맞다고 증언했다. 자주포가 파괴된 것은 실상 보병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포병의 대포병사격으로 파괴되었다는 주장을 내놓았다. 그러면서 그 장본인으로 강기회를 지목했다. 그의 이런 주장은 자주포가 한국군의 포병사격으로 파괴되었다는 북한 자료(노동신문, 박연히 훈장상신서 등)와도 일치한다. 자주포 파괴와 관련한 김운한의 증언 중 흥미로운 사실은 자주포 파괴를 둘러싸고 포병과 보병의 갈등이 존재했다는 사실이다. 그의 증언에 의하면 전쟁 중에는 물론이고 전쟁 이후에도 이를 둘러싸고 양측의 갈등이 일부 있었다고 했다. 필자는 이대용 장군의 살아생전 일기를 읽어 본 적이 있다. 1985년도 6월 일기에는 6사단 모임에 가기 싫다고 고백한다. 그가 말한 이유는 전공을 서로 자기 것이라고 우기는 아사리판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전쟁이 끝나고 난 뒤 한참이 지났지만, 전공의 시시비비가 제대로 가려지지 않았음을 의미하는 대목이다. 심일 전공의 의혹 이면에는 보병과 포병의 갈등이 존재하고, 만들어진 전공을 보병들이 유지하기 위해 전공을 키워가는 악순환이 반복된 것은 아닌지 조심스럽게 추측해 본다.
한편 심일의 옥산포 전투 이후 행적에 관한 문제이다. 김운한은 심일이 전속은 아니지만 대전차포를 잃어버렸기 때문에 16포병대대를 따라 다녔다고 증언했다. 보직해임 되어 포병으로 전속되었다는 이대용의 주장과 부분적으로 일치했다. 육탄 5용사 문제는 김운한이 먼저 이야기를 꺼냈다. 그에 의하면 자신이 전역(1976년)한 이후 기갑출신 2군단장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라고 증언함으로써 5용사의 병적을 찾을 수 없었던 과거 기록 검토 결과와도 일치했다. 하지만 기갑출신 2군단장이 없었기 때문에 그가 누구인지는 확인할 수 없었다. 다만 한 가지 추정해 볼 수 있는 것은 그런 문제를 군단장이 직접 나서서 예비역들에게 전화한다는 것은 군의 정서상 흔치 않은 일이다. 그래서 혹시 부군단장을 김운한이 군단장으로 기억하는 것은 아닌지 의심해 볼 수 있다. 2군단의 부군단장과 참모장 등에 대한 보직 역사에 대해 이후 확인해 볼 필요가 있다. 그의 증언 중에서 이대용의 주장과 상치되는 것은 심일이 제16포병대대를 따라 경북 춘양까지 철수했으며, 7사단으로 갔다는 증언이었다. 이에 대해서도 확인 작업이 필요하다.
전쟁 직후 기록들은 대부분 아무말잔치가 많죠.
우두산, 옥산포....춘천에 지명과 비슷하네요
예, 춘천에서 벌어진 일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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