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분지족과 사회적 관심

in #happy7 years ago

안분지족과 사회적 관심

나이를 먹어든다는 것은 대체로 경험의 영역이 확장된다는 것과 같다. 그리고 폭과 깊이가 늘어나면 필요할 때 한정한 자원으로 과거에 했던 행동을 반복하는 방법을 알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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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다지 부유하지 않은 집이나 커피포트 정도는 가지고 있다. 그 아래로 보이는 것은 미니오븐이다. 이처럼 오늘날의 도시빈민의 삶의 양상은 이전 시대와는 다르다.)

이를테면 나는 차를 마시는 것을 전혀 즐기지 않는다. 그렇기에 거의 이십대 후반에 이르기까지 카페에서 친구를 만나지 않는 이상 집에서 차를 마시는 일이 거의 없었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그런 나조차도 숙취가 심한데 국물요리를 먹을 상황이 안 되는 날이나 감기기운이 올 거 같은 으쓱한 날 아침 차를 한 잔 마시면 몸이 아늑해진다는 사실을 안다. 집에는 커피포트도 있고 티백도 있다.

또한 나는 차를 즐기지 않고 카탈스럽지 않으므로 실은 크게 종류 구애받지 않고 티백차라도 상관이 없다. 차 한 잔을 만들어 마시는 일은 너무나 간편하다. 싸구려 커피포트와 티백만 있으면 새벽에 일어나 설거지를 하기 전 물 앉혀서 데우고, 설거지 도중 티백 차에 물 붇고, 다시 설거지 도중 차를 마시면서 남은 설거지를 하면 되는 것이다.

너무 아무것도 아닌 일이지만 쾌감을 준다. 그런데 아마 이걸 해본 적이 없고 이 쾌락을 느낀 적이 없다면 굳이 이 시점에 안 했을 일이다. 경험의 힘이다.

삶에 대한 내 태도는 종종 윤서인이 자신의 만화에서 기를 쓰고 가르치려는 태도와 흡사하다. 쉽게 만족한다. 물론 만족만 하는 건 아니다. 우울도 있고 분노도 있다. 그런데 만족하는 방법도 여럿이고 간단하다. 심지어 가격도 싸다. 그리고 이십대 중반 이후부터 이런 일을 겪을 때마다 '좋은 시대에 살고 있구나...'라는 생각을 종종 했다.

당연하게도, 나보다 더 어려운 사람에겐 그게 어려울 것이다. 나는 어떻게든 일을 하면 월수 백 정도는 벌 수 있는 환경 속에서 원룸 자취생활을 했고, 등록금을 내 이름으로 된 빚으로 지출하지 않았다. 누군가에겐 이와 같은 순간적이고 즉각적인 만족의 순간을 만들어내는게 더 어렵고, 그리 싸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안다.

그렇지만 이십대 중반 이후 서울에서의 내 삶 역시 일인가구 도시빈민의 그것이었다. 굳이 경제력으로 위에서부터 줄을 세워본다면 70~80% 정도였을 것 같다는 느낌이다. 동세대에서 잰다면 좀 더 높아지기는 하겠지만 그래도 중위값보다 크게 위에 있을 것 같지는 않다. 그런데도 나조차 그리 느꼈다면 그런 종류의 안락을 추구할 수 있는 이들의 숫자가 아주 적지는 않을 것이다.

물론 아이러니가 있다. 지난 십 년간 일인가구 도시빈민의 안락을 지탱한 것은 중국산이었다. 이십대 중후반엔 다이소의 생활용품이, 서른 이후엔 인터넷에 쉽게 구매가능한 값싼 전자제품이 있었다. 그것들이 없다면 나는 이 정도로 행복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 만약 중국과 같은 후발주자가 공업화되지 않은 세상이었다면, 나같은 이도 정규직 일터에서 일하며 4인가구를 꾸려야 한다는 압박을 받으면서 살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양가적인 감정이 있다. 나는 그 길을 가보지 않았다. 그 길에서 느끼는 보람이 아마도 따로 있을 것이다. 나는 아이를 가지고 싶다고 강하게 열망하지만, 지금의 내 길에선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저 길(정규직 노동자이며 4인가구 가장이 되어야 한다는 압박을 느끼는 이)에선 너무 자연스러운 일이다. 가보지 않은 길의 경험이 퇴적되었을 때, 어느 쪽이 더 행복하고 불행했는지를 내가 따질 길은 없다.

하지만 종종, 아니 상당히 자주, 경제학자나 사회평론가들의 우울하고 냉소적인 시선과는 달리, 이 일인가구 도시빈민의 삶이 내가 가지 않은 길보다 훨씬 가볍고(느낌을 표현하는 말이다. 다른 어휘를 찾기가 힘들다) 자유롭다고 느낄 때가 있었다. 물론 가지 않은 길과 견줄 수 없기 때문에 발생하는 감정일 수도 있다. 하지만 현 시점에서 나는, 오랜 일인가구 생활을 벗어나 동거인과 함께 둘이서 살며 고양이 두 마리를 키우며 사는 삶이 제법 만족스럽다. 나는 아이를 욕망하고 동거인은 그렇지 않다는 문제가 있지만 말이다.

그런데 나는 인생의 상당기간을 정치사회적 관심을 촉구하거나 그 관심을 가진 이들에게 무언가를 해설하는 일을 하며 살았다. 이 나라에서 행복과 안락의 중요성을 말하는 이들은 정치사회적 관심을 멀리하라고 말하는 경우가 많다. 위에서 언급한 그 만화가의 태도가 더할나위없이 전형적으로 그렇다.

말하자면 정치사회적 관심은 쉬이 우울과 분노를 유발시키고, 당신의 삶을 개선하지도 못하며, 많은 경우 무가치한 시간과 열정의 자선사업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확실히, 그런 측면이 없는 게 아니다. 특히 일반적 관심을 넘어 중독자가 되거나 어떤 단체에 대해 심하게 지출하거나 혹은 그곳을 일터로 삼고 혹사당하고 있다면 주변에서 진지하게 말려야 할 지경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행복/안락이란 소중한 느낌과 그것을 찾는 기술은 정치사회적 관심과 모순되지 않는다고 나는 느낀다. 내가 이 일인가구 도시빈민의 삶에서 느낀 안락함의 핵심은 삶에 대한 자율성과 결정권의 느낌이었다. 값싼 중국산 전자제품과 생활용품에 둘러싸인 방안에서 나는 이전 시대의 빈민과는 전혀 다른 경험을 동원할 수 있다. 값이 세게 매겨진 것들을 경험할 수는 없지만, 값이 약하게 매겨진 것, 심지어 값이 매겨지지 않은 것들만 경험해도 예전 시대의 빈민에 비해 그 폭과 깊이가 엄청난 것이다. 물론 그리 살다 보니 종종 저작권법을 위반하게 된 경우도 있었지만.

그런데 일개인이 정치사회적 관심을 가져야 할 가장 큰 이유 역시 나는 그 자율성과 결정권의 느낌을 회복하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인간은 홀로 거주할지라도 공동체 안에서 살며, 내 삶의 여러부분은 공동체의 행동과 정책에 대해 규정된다. 내가 원룸에서 여러가지를 스스로 결정한다 하더라도, 그것이 통제할 수 있는 영역은 한계가 있다.

당연히 정치사회적 관심을 기울인다 하더라도 자율성과 결정권이 갑자기 주어지는 건 아니다. 어느 정도는 그렇게 되더라도 '1/N'일 것일 뿐이다. 하지만 어떤 결정에 참여하거나 왈가왈부하는 것은 그 자체로 자율성과 결정권의 '느낌'을 회복하게 한다. 그리고 그 느낌은 그 자체로 행복과 안락을 제공하기도 한다.

사람들이 흔히 대립시키는 두 영역을 포괄시키는 에세이들을 언젠가 써보고 싶다는 생각을 서른 무렵부터 했다.

#happy #life #kr #krnewbie #kr-newb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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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빈민'이라는 단어가 확 와닿지 않는데, 역사를 반추하면서 가만히 생각해보면 그리 이상한 단어도 아닌 것 같아. 우리 또래들... 약간의 자유와, 인터넷과, 먹거리, 놀거리만 손에 주어졌지 그 옛날 도시 빈민의 삶과 다름 없는 삶을 사는 듯. 그래도 우리 또래 대부분은 나름대로 그 안에서 행복하다. 행복하면 그만 아님? 보팅, 리스팀 할게.

고마워 ㅎㅎㅎ

두 영역을 포괄시키는 에세이라니 ㄷㄷㄷ.. 어서 보여주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