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유럽의 차가운 비는 동아시아에서 뜬구름 잡는 로망을 갖고 찾아온 인간을 제법 많이 무력화시킨다. 전원이 완전히 나가버리지 않으려면 그들처럼 낮은 온도와 비에 담대해질 필요가 있다.
위도가 한참 높다는 것을 몰랐던 바는 아니다(당연히 ‘북’유럽이라고 친절하게 접두어까지 붙어 있으니까). 그렇다면 조금 더 추울 것이라는 것도 예상을 하긴 했다(그래도 6월말인데... 하며 마음으로 믿지 않았을 뿐). 비옷을 가방 구석에 넣으면서도 ‘에이, 쓸 일이 있겠어?’하는 생각이었고 우산은 챙기지도 않았다. 그리고 비와 추위가 합쳐지면 어떤 일이 벌어질 것인지에 대한 것은 삽질 대비 체크리스트에 올라있지 않았다. 결국 아침부터 추적추적 흘러내리는 차가운 비에 몸도 마음도 뇌도 각자 놀라 비상사태를 알리는 벨을 울려댔다.
뾔!뾔!뾔!
일단 비가 온다는 사실에 마음이 울적해졌다. 북유럽의 정취를 느끼게 하는 새하얀 눈을 보러 겨울에 왔다면 모를까, 초여름 하늘에서 수분을 들이 붓길 기대하지는 않았단 말이다. ‘오늘은 비가 오니 게으른 여행자가 되어 집 안에서 내리는 비를 바라보며 팬케이크를 구웠는데 내리는 빗소리가 아름답고 어쩌고...’ 따위의 여유는 한 6개월 여유롭게 여행하는 자나 부릴 수 있는 것이니 해당사항 없다. 게다가 이 비라는 것이 겨울비를 방불케 하는 앗! 차가운 온도.
양말과 장화와 코트와 장갑이 필요했지만 우리에겐 ‘운동화를 신고 운동화와 양말과 발을 동시에 적시느냐’, ‘슬리퍼를 신고 발을 적시느냐’ 정도의 선택의 여지와 다이소에서 산 싸구려 비닐 우비뿐이었다 (수세미양이 이것마저 가지고 오지 않았더라면 어찌해야 했을지). 가지고 온 여름옷을 있는 대로 껴입고 시린 발로 오지 않는 트램을 기다리며 서 있는데 그것은 여태 느껴보지 못했던 다른 종류의 추위였다.
‘아, 이래서 유럽에 장화와 레인코트가 당당한 의복으로 존재하는구나’ 하고 온몸 으로 깨닫게 된다(특히 발목으로 깊이).
이들에게 레인코트는 비를 막는 것과 함께 방한의 기능도 수행하는 훌륭한 기능성 의복이었다. 여자들이 본격 레인코트에 모자, 레인부츠를 신고 빠른 걸음으로 돌아다니는데, 오호라 이 패션이 예뻐보이기까지 한다. 유모차에도 방수 덮개를 덮고는 아이에게 비옷을 입혀서 얼굴에 빗물이 튀든 말든 힘차게 밀고 걸어간다. 그 모습이 어찌나 멋졌던지 하마터면 나도 알록달록 예쁘장한 방수모자를한개 살 뻔했다. 언제그걸쓸 수 있을지, 기회가 왔다 해도 쓰고 나갈 자신이 생길지 도저히 판단이 서질 않아 그만두었지만...
어쨌거나 싸구려 비옷을 사용해본 감상은 이렇다.
손이 자유롭고 바람에 우산이 뒤집히는 등의 남사스러운 상황을 겪지 않아도 되며, 근거 없이 무적의 용사에 빙의하게 되어 행동이 과감해지고 에라 모르겠다, 될 대로 되라는 식의 마음을 갖게 된다.
얼굴이 젖는 것을 막기가 참으로 힘겹다. 그냥 얼굴은 젖는 거다. 얼굴은 내 몸뚱아리 바깥의 어떤 것인 거다. 손도 자꾸 젖어서 지도나 책자를 만지기가 조심스럽다. 카메라로 사진 찍기? 어렵다. 그냥 물 속이라고 생각해야 된다. 아무튼지간에 비옷 안에 모든 것을 집어 넣지 않으면 바로 다 젖어버린다. 비가 내리지 않는 일정 사이즈의 공간을 만들어주는 우산과는 썩 다른, 인사이드와 아웃사이드가 아주 옹졸하게 확실한 패러다임이다.
비닐 우비(특히 흰색의 아주 크고 긴)를 입고 돌아다니면 사람들이 100퍼센트 쳐다본다. '아, 좀 이상하다' 하는 눈빛으로.
매우 뚱뚱해 보인다.
마음과 몸의 힘듦으로 인해 뇌의 기능도 급격히 저급해지는 바,
어느 순간 자포자기하고 블루 스크린이 떠버린다.
어서 재부팅하라고...
그것도
제대로 된 방법은 안 되니까
과격하게 해버리라고...
계획했던 곳에 결국 도착하지 못하고, 지친 심신을 달래야 한다는 명목으로 비싼 레스토랑에 가서 비싼 생선과 비싼 소고기를 시켜 먹고는, ‘내가 방금 그 알량한 도파민 분비를 위해 무슨 짓을 한 걸까’ 하며 좀 멍해져 버리고 마는 것이다.
북유럽의 차가운 비는 동아시아에서 뜬구름 잡는 로망을 갖고 찾아온 인간을 제법 많이 무력화시킨다. 전원이 완전히 나가버리지 않으려면 그들처럼 낮은 온도와 비에 담대해질 필요가 있다. 그리고 비옷을 입는 동시에 선글라스를 껴야 하는 상황에도 적응하는 편이 좋겠다.
예쁜, 너무 예뻐서 그것을 착용하기 위해 기우제를 지낼 만한 레인코트와 모자와 장화를 지참했다면 얘기가 달라지겠지만...
FINLAND
비어 있어 여유로운
북유럽처럼
본 포스팅은 2013년 출판된 북유럽처럼(절판)의 작가 중 한 명이 진행합니다.
저도 9월에 갔을때 추워서 기절하는 줄 알았어요, 매일 매일 하루도 빠지 않고 비는 오고 , 레인코트를 사고 싶다는 강열한 충동을 겨우 이기고 왔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사올걸 그랬어요 ㅎㅎ
그쵸 저도 장화라도 하나 사올걸 그랬다 후회 많이 했어요 ㅎㅎ
전 10월에 터키에 있다가 스탑오버로 들렀는데, 추워서 혼났습니다. 가져간 옷은 죄다 껴입고 돌아다녔지만 역부족이었던.. 돌아오는 마지막 날 정도에 햇빛이 있었고 날씨도 우중충 했다죠. 그래도 종종 생각나네요. :)
해가 나지 않으면 정말 추운 것 같아요. 그래도 해가 쨍한 날에는 청량하고 좋더라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