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도 소녀였던 시절이 있었다

in #kr-newbie7 years ago

엄마도 소녀였던 시절이 있었다

엄마가 여름 옷을 꺼내다가 묵혀둔 사진첩을 발견했다. 엄마는 사진첩을 들여다보고 쓰레기 더미로 던진다. "왜 버려. 무슨 사진인데?" "쓸데없는 사진." "무슨 사진이냐고." "옛날 엄마 결혼사진." "나 볼래." "이런 거 봐서 뭐 해." 엄마는 끝까지 내게 사진첩을 건네주지 않았다. 나는 쓰레기 더미로 가서 엄마가 버린 사진첩을 집어왔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엄마 결혼사진. 사실, 나는 엄마가 결혼했었다는 사실조차 까먹고 있었다.

사진첩을 펼친다. '엄마가 이쁘다'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화장이 진하다. 진한 화장이랑 엄마 얼굴이랑 어울리지 않는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엄마가 아빠와 부둥켜안고 뽀뽀하는 사진이 내 눈을 사로잡았다. 충격이었다. 엄마가 나와 형 말고 다른 사람에게 뽀뽀를 할 수 있는 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아빠 품에 안긴 엄마의 모습은 귀여운 아기천사 같았다. 나는 사진첩에 나온 순둥순둥한 엄마의 미소를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엄마도 아기 같은 미소를 지을 수 있는 한 사람이구나...

맞다. 나는 잊고 있었다. 엄마도 소녀였던 시절이 있었다는 사실을. 친구와 밤늦게까지 놀다가 아빠에게 종아리 맞았던 시절이 있었다는 사실을. 내일이 오기를 거부한 채 진탕 술을 마시며 친구들과 밤을 지세웠던 시절이 있었다는 사실을. 소개팅에서 만난 남자 한 명 때문에 밥도 못 먹으며 가슴 벌렁벌렁 뛰었던 시절이 있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사진첩을 덮고 엄마를 바라본다. 사진첩에 나온 순둥순둥한 소녀는 어디 갔느냐. 삶의 무거움에 짓눌린 주름살. 힘을 잃어버린 머릿결. 목표도, 방향도 잃은 늘어진 뱃살. 상처투성이인 엄마의 몸이 보여준다. 엄마로 살아야 했던 30년의 세월이 만만치 않았음을 말이다. 24살의 소녀였던 엄마는 자식을 키운다는 게 어떤 책임과 고통이 뒤따르는지 몰랐을 것이다. 알았다면 분명히 도망갔을 것이다. 세상 물정 모르는 24살의 소녀는 '두 아들의 엄마'라는 무거운 짐을 어깨 위에 짊어지고 삶을 살았다. 아니. 엄마는 삶을 견뎠다.

순둥순둥한 소녀에서 ’철수 엄마'가 된 한 여자. 철수에게 맛있는 거 사주려고 뒤꿈치에 물집 잡혀가며 더우나 추우나 걸어 다녀야 했던 한 여자. 터진 물집에 마데카솔을 바르면서 두 아들을 낳은 걸 후회할 때도 있었겠지.철수에게 이쁜 옷 입히려고 50시간 내내 편의점에 서 있어야 했던 한 여자. 눈이 저절로 감겨 머리를 땅바닥에 부딪히기도 했겠지. 땅바닥에 머리를 박고 평생 눈을 감고 싶다는 생각도 했겠지.

엄마는 온몸이 상처투성이가 됐는데도 왜 두 아들에게 눈물 한 방울 보이지 않았던가. 엄마는 왜 생에 한 번뿐인 청춘을 버려가며 두 아들의 행복을 위해 본인을 희생해야 했는가. 전화만 하면 "왜요. 끊어요."만 외쳐대는 두 아들 따위 때문에 엄마는 한 여자의 삶을 포기해야 했던 것인가. 가슴에 카네이션 한번 달아준 적 없는 두 아들 따위 때문에... 엄마는 바보다. 엄마는 기회비용을 잘못 계산했다. 엄마의 멍청한 선택에 나는 화를 참을 수가 없었다. 나는 울었다.

눈물을 닦는다. '엄마는 소녀였던 시절이 있었다'라는 문장을 생각해본다. 이 문장이 마음에 안 든다. 불편하다. 왜냐고? 이 문장은 엄마는 '두 아들의 엄마'로서 미래를 살아야 하고, 과거였던 소녀로 되돌아갈 수 없다는 뜻 같기 때문이다. 안 된다. 엄마는 다시 소녀가 될 수 있어야 한다. 엄마는 다시 소녀가 되어야 한다.

엄마가 던져버린 사진첩을 들고 엄마에게 다가간다. 보기 싫다던 결혼 사진을 엄마에게 보여준다. 알려주고 싶었다. 엄마도 순둥순둥한 소녀였던 시절이 있었다고. 엄마는 다시 소녀로 되돌아 갈 수 있다고.

<꿈>
행복한 꿈을 꾼다. 내일, 편지 한 통 없이 엄마가 사라진다. 3년이 지났다. 내게 편지 한 통이 날아온다. 엄마의 편지였다. 이제서야 '엄마'라는 삶의 짐을 내려놓았다고. 000 한 여자의 삶을 살고 있다고. 행복하다고. 나중에 만나자고. 엄마와 아들로 만나는게 아니라 000이라는 한 여자와 라는 한 남자로 만나자고.
ㅡㅡㅡㅡㅡ

군대에서 엄마를 생각하며 쓴 글입니다. 하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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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라는 이름으로 포기했던걸...아니 포기할수 밖에 없었던것들을 생각하니 가슴이 아프네요..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ㅎㅎ 저도 가슴이 아팠었는데... 요즘은... 뭐... 또

눈물이 나네요 엄마!!

ㅎㅎㅎ 감사합니다

며칠 전에 친구들과 한 얘기가 떠올라서 눈물이 핑 도네요~ㅎㅎ
~의 아내, ~의 엄마가 아닌 어머니 성함으로 사실 수 있도록 우리가 옆에서 응원해드려요~!!ㅎㅎ
아자아자~!!

네 ㅎㅎ 아자아자! 같이 응원해요!

부모님 이야기는 항상 먹먹하네요. 저는 늦기전에 효도해 보려고 1년에 한번씩는 해외 여행을 같이 가드리고 있네요 ㅎㅎ 제가 결혼하면 이것도 못하겠죠....

저는 ㅠ 엄마에게 해줄 수 있는게 별로 없네요? 엄마랑 같이 대화 많이하기? 엄마 이야기 들어주기? ㅎㅎ

잘 읽었어요...왠지 짠하네요. 저도 엄마라서 그런가...

읽어주셔서 감사해요 ㅎㅎ 웬지 쑥스럽네요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