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있다는 느낌

in #kr-pen7 years ago (edited)

어려서부터, 넌 왜 이렇게 자신감이 없냐고 자신감을 가지라는 소릴 수도 없이 들어 왔다. 사람들은 자신감을 가지란 말을 교묘하게 바꿔 말하곤 했다. 그건, 어깨를 펴고 다녀라, 땅을 보고 걷지 마라, 같은 말이었다.
나는 그런 말들이 싫었다. 자신감이라는 게 도대체 뭔지 모르겠지만, 그게 없다는 말이 왠지 나를 주눅 들게 했다.
세상 사람을 자신감이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 두 부류로 나눌 수 있다면 나는 후자에 속할 게 분명했다. 나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도 그런 말을 해 오곤 했으니까.

대학생 시절, 같은 과 여러 학년이 모여 과제 같은 걸 하러 며칠 같이 다닌 적이 있다. 그때 일인데, 평소 이야기 한 번 나눠 보지 않았던 선배가 나를 보더니 다짜고짜 자신감을 가지라고 말했다. 나는 뭐라 할 말이 없어서 감사하다고 웃었는데, 돌아서서는 가슴이 답답해졌었다. 그로부터 몇 년 후, 그 선배는 세상을 떠났다. 사고라고 들었지만, 단순한 사고가 아니란 걸 짐작할 수 있었다. 선배의 부고는 건너 듣게 됐는데 장례식장이 멀지 않은 곳에 있어서 마지막 인사를 하러 갔었다. 그날, 선배가 했던 말은 수정될 수 없는 것이 되어 버렸다.

나는 나를 좋아하지 않았다. 그래서 항상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신경 썼고 그런 것들로 내가 규정될 거라고 여겼다. 돌아보니 그렇다. 성적이 떨어지면 부모님이 실망하시진 않을까 걱정했다. 내가 한 말을 친구가 어떻게 생각할까 고민했다. 내 목소리가 남들에게 어떻게 들릴지 곱씹었다.

기억나는 일이 몇 있다. 중학생 시절, 문학 작품 같은 걸 읽는 시간이 되면 나는 바짝 긴장했다. 선생님이 나를 시킬까 봐 두려웠다. 아무리 피하고 싶어도 내 차례는 돌아왔고 나는 염소 같은 목소리로 지문을 읽어 내려 갔다. 그러다가 흐느끼면서 웃었다. 웃음이 내 방어기제라도 됐었는지 우는 게 아니고 웃고 말았다. 얼굴은 빨개졌고.

내게 시선이 집중될 때면 어김없이 염소 소리와 함께 흐느끼는 웃음이 터졌다. 그렇게 한참을 웃고 있으면 내 다음 사람이 지목됐다. 고등학생이 되어서도 몇 번 더 그런 상황에서 웃음을 터뜨렸다. 흐느끼며 웃는 나를 보며 선생님과 친구들은 처음엔 같이 웃다가 결국에는 쟤는 왜 저럴까 하는 눈빛을 했던 것 같다.

대학생이 된 후 그런 일이 더는 생기지 않았다. 조별 발표 과제 때는, 나는 발표 같은 건 못하겠다고 자료 조사 더 열심히 할 테니 빼달라고 사정했다. 조용히 학교에 다녔고 조용히 졸업했다. 그리고 조용히 취업 공부를 하다가 조용히 취직을 했다. 조용히 퇴사했으며 조용히 읽고 쓰는 시간을 보내는 중이다. 그래서 잊고 있었다.

그런데 오늘 나는 또 흐느끼며 웃었다. 요가를 하던 중이었다. 바닥에 엎드려 양팔을 뒤로 해 양 발목을 잡아 팔과 발을 점점 위로 올리는 활체위를 하고 있었다. 거기까진 괜찮았는데, 선생님이 변형 동작을 해 보자고 했다. 변형 동작은 활체위를 하면서 오뚝이처럼 몸의 중심을 앞쪽에 뒀다가 뒤쪽에 뒀다가 하는 것이었다. 힘차게 굴러 가며 동작을 하고 있는데 선생님이 단상에서 내려오는 게 보였다. 수강생들 사이를 왔다갔다 하는 선생님을 보고 갑자기 웃음이 터졌다. 다행히 염소 소리 같은 건 없었지만, 웃다가 동작을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번엔 그렇게 웃는 게 힘들지 않았다. 흐느끼며 웃었다는 말 대신 웃어젖혔다는 말이 더 잘 어울릴 법했다.


처음으로 오직 내 의지로 하루의 시간을 쓰고 있다. 요가 하러 갔다가 돌아와 늦은 아침 혹은 점심을 먹고 책 읽는다고 앉아서 꾸벅꾸벅 졸기도 하고. 그러다가 뭘 만들어 먹겠다고 왔다 갔다 하고. 스팀잇에 들어왔다가 글을 쓰기도 하고.
꼭 내가, 내가 바라는 누군가가 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기도 하고. 그러니까 슬며시 내가 좋아질 것 같기도 한 요즘이다. 그렇게 숨고 싶어 하던, 남들 앞에 조그만 것 하나 드러내는 걸 두려워했던 내가 스팀잇에 글을 올리고 있다. 그것도 꽤 내밀한 이야기를. 물론 올리는 글엔 내 이름도 얼굴도 나타나지 않지만, 내 계정의 이름 또한 내 이름 중 하나 일 것이다.

내게 없는 것이 자신감 하나뿐이겠나. 많은 걸 가지고 있지 않아도 그게 나라는 걸 인정하는 게 중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어쩌면 자기 자신을 인정하는 걸 사람들은 자신감이라고 말하는지도 모르겠다.
사전에서는 '자신감'을 '자신이 있다는 느낌'으로 정의한다. 이때 '자신'은 어떤 일을 해낼 수 있다는 믿음 같은 걸 말할 테지만, 나는 '내가 있다는 느낌'으로 바꿔 읽어 보려고 한다.
내가 있다.
내가 있다는 느낌이 아주 오래전 봉인된 그 말을 다시 바꿔 줄 수 있을 것 같다. 그렇게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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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자신만이 내자신을 잘 알고 그 뜻대로만 움직인다면 그누가 뭐라던 아무상관 없죠... 속에 있는 말들을 이렇게 포스팅 해주셔서 저도 타인을 잘 모르는데 함부로 말하진 않았는지..하고 생각해보게 되네요.

오늘도 자기의지대로 사는 행복한 하루가 되시길 빌어봅니다 !

예전에는 제가 남이 바라보는 대로 규정되는 줄 알고 작은 일에도 예민하게 반응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짧은 말 한마디도 마음에 품고 있었고요. 앞으로는 좀 더 느긋하게 내 자신을 바라보면서 지내려고요.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내가 있다.

다부지고 귀여운데요? ;)

저는 모르는 걸 누군가에게 물어 볼 때, 당차게 물어 봅니다.

모르는데, 그래서 뭐 어쩌라고? 묻지도 않고 했다가 그르치는 것보다는 낫잖아?

뭐 대충 그런 자세입니다. 수억 수십억에 달하는 계약건을 맡겨 오는 사람에게는 '해본 적 없는데요? 가르쳐 주시면 하고요.' 라고 당차게 말합니다. 뭐 그런 정도의 타인에게 큰 손해를 가져다 둘 일만 아니면, 아직 얼마든지 수정할 수 있는 기회는 있다고 보거든요.

;) 오늘도 우리 힘내요?!

좋은 자세인 것 같은데요? 오히려, '해본 적 없는데 가르쳐 주시면 하겠다'는 태도가 더 자신감 있고 믿음직해 보이지 않을까 생각해요. 이런 태도를 가질 수 있는 것도 아마 자기 자신에 솔직해서일 테지요.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힘내요 힘!!

그런 면에서 남자들은 어찌보면 강제적인(?) 혜택을 입는 일도 있네요.
저 같은 경우 군대에 가서 사람 바뀐 케이스인데, 아랫배에 힘을 꽉주고
군가를 부르면서부터 목소리가 커지고 당당함을 익혔다고나 할까요.
아랫배 힘주고 노래부르기.. 이거 진짜 좋은 훈련입니다. 말에 힘을 주고 말을 하니까 사람들이 대하는 태도가 달라지더라구요.

노래 부르는 게 정말 도움이 되나봐요. 예전에 몸이 좀 안 좋아서 물리치료 같은 걸 다녔던 적이 있었는데 선생님이 평소에 노래를 부르라고 하더라고요. 그때는 웬, 노래? 하면서 속으로 웃었던 기억이... 진짜 산속에라도 가서 아랫배에 힘주고 노래 불러 봐야겠는데요. 아니다, 운전하면서 하는 게 제일 좋겠군요. 댓글 감사합니다!

ㅎㅎㅎ 저도 국어/문학시간에 책 읽다가 웃음보가 터진 적이 몇 번 있었어요 ㅋㅋㅋ 짝궁이 장난쳐서 웃고 ㅋㅋ 읽다가 그냥 웃음이 나와서 웃고 ㅋㅋㅋ 선생님이 “ 재 또 시작했다. 짝궁이 읽어” 뭐 이러시기도 하고 ㅋㅋ
글 아주 재미나게 쓱~~ 읽어 내려왔어요. ^^
저녁 맛있게 드시고 편안한 밤 되시기를 바랍니다.

웃음보 라는 말이 참 귀엽네요. 그렇게 웃는 걸 웃음보 터진다고 말하는 거였네요! 글 재밌게 읽어 주셨다니 정말 감사합니다. 쓰면서는 좀 우울했거든요. 재밌는 댓글 보고 웃게 됐어요^^ 좋은 에너지 감사해요.

잘 읽었어요
마트에서 계산할때 다른생각이 나서
웃음이 나올때 손님이 불쾌하실까봐 억지로 참는
생각이났어요
하루가 벌써 저물었어요
좋은밤 되세요 ^^

웃음을 참는 게 쉬운 일은 아닌 것 같아요. 옐로캣님이 계산하시면서 웃음을 참는 모습을 상상해 보면서 웃어 봅니다. 글 읽어 주셔서 감사해요^^

스스로를 찾고 있는 시간을 보내고 계시는군요. 부럽습니다 :)

네. 조바심 내지 않고 아주아주 천천히 가 보려고요. 댓글 감사합니다^^!

내가 있다는 느낌의 자신감은 안정이 되는 느낌일것 같아요 :) 자기다움이 느껴지는 기분이에요.

정말 그런 느낌일 것 같네요. 내가 있다는 느낌의 자신감을 갖기 위해, 스스로를 잘 느끼며 살고 싶어요. (제 마음을 최대한 표현한다고 쓴 문장인데 어쩐지 말장난처럼 느껴지네요) 글 읽어 주셔서 감사해요~!

글 잘 읽었습니다.
울고싶은데 웃었던 적 저도 있어요..
그게 참 슬프기도 했었는데..
지금은 그러진 않는거같아요..조금 용기가 생겼나봐요
내가 있다라는 내가 여기있어도 괜찮다는 느낌을 간절히 찾을때도 있었어요.
요즘은 따스함, 사랑이 참 그립답니다.^^

응원합니다 :) 그리고 반갑습니다. ㅎㅎ저는 개인적으로 쿨하다는 말이 싫어요. 무슨 모든 문제의 만병통치약처럼 쿨해야 되는 걸 강요하시는 분들이 있어서요. ㅎㅎ

저는 애초에 쿨한 것과는 거리거 먼 사람이어서요ㅎㅎ
반갑습니다. 저도 응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