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의 자격과 소문의 벽

in #kr-pen7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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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에 자격이란 있는가? 우선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한 작가만을 소설가로 보는건 너무 편협하고 보수적인 시각이다.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 반지의 제왕, 해리 포터, 셜록 홈즈와 같은 소설들은 신춘문예를 통과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 소설들이 유명해지고 영상화까지 되어도 문학으로 인정하기 싫어하는 보수적인 사람들이 있지 않는가. 성공하고도 이토록 박한 평가를 받는데, 신인이었다면?

수입을 얻느냐, 얻지 않느냐를 기준으로 삼을 수도 없다. 예술가들은 사후에 비로소야 인정 받는 경우도 흔하지 않은가?

그렇다면 전업이냐, 취미냐로 나눌 수 있는가? 취미로 소설을 쓰는 사람은 취미일 뿐 소설가로 부르기에는 부족할까? 전업 소설가의 삶이라는게 보통은 아주 어려운 길이다. 취미로 소설을 쓰는 사람은 그 어려운 길을 포기한 사람일까? 그 어려움을 겪어야만 소설가라면, 화려하게 등단하여 처음부터 부와 명예를 손에 넣은 소설가는 소설가가 아닌게 된다. 그래서 전업이냐, 취미냐도 자격을 판별할 척도로는 부족하다.

그렇다면 써낸 소설의 수는 어떤가? 작품에 따라 분량이 다르다고 하면 글자수는 어떤가. 이는 따져볼 여지도 없다. 분량이 같다고 같은 시간을 투자하는 것도 아니며, 작가가 자신이 쓴 모든 글을 대중에게 내비치지도 않는다. 내비친다 하여도 바뀌는 것은 없고. 출품 주기 또한 유용한 정보는 될 수 없다. 출품과 출품 사이를 오롯이 집필로 보내진 않으니. 하지만 이 문제는 조금 더 중요하다. 학창 시절에 과제로 시를 한편 써낸 적 있는 사람을 시인이라 부른다면 대부분의 사람이 시인이며 소설가가 된다. 이게 무슨 문제냐고 하실 독자분도 계실 것이다. 본문은 계속해서 소설가에 부여된 권위를 깎아내고 있으며, 소설가라는 호칭을 더 많은 작가들에게 돌리고 있으니까. 그렇지만 호칭은 구분을 위해 존재한다. 그렇지만 누가 명확한 기준을 정할 수 있을까?

그래서 소설가의 자격이란 굉장히 모호하다. 그렇다면 모호한 소설가의 자격 대신 소설의 자격을 살펴보자. 소설은 무엇인가? 무엇이 글에 소설이라는 지위를 부여하는가? 이것 또한 모호하기는 마찬가지다. 실은 그래. 구분해서 뭘 하겠는가? 시대가 지나면서 사람들은 자연스레 많은 직업을 가지는데. 소설가도 언젠가는 호칭으로써의 기능을 상실할 것이다. 아니, 이미 그러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논리를 따지자면 이렇겠지만, 내 주관은 다르다. 남을 향한 내 주관이 아니라 나를 향한 내 주관을 품는건 내 자유이니 억지로 바꿀 필요도 없고, 바뀌기가 쉽지도 않다. 그 주관이란 무엇이냐 하면, 나는 이청준의 소문의 벽을 읽고 나면 내 글을 소설이라 부르고 싶지 않아진다. 소설 대신 내 글과 소문의 벽을 구분할 적당한 표현이 필요하다고 느낄 정도로. 아마 독자분들은 내 프라이드를 아실 것이다. 나는 프라이드가 있는 사람이고, 그래서 이게 열등감이나 자격지심과는 다르다고 생각한다. 사실 아무리 프라이드가 없다고 해도, 대가의 작품을 읽은 것으로 좌절할 정도라면 어떻게 지금도 이렇게 글을 쓰고 있겠는가. 그렇다면 이를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왜 이청준이며, 왜 소문의 벽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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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누가 시인이고 누가 소설가일까요. 저도 생각하던 것이었기에 글을 읽는 내내 공감했습니다.

그냥 소설이라는 것을 쓰는 사람이 소설가라고 생각합니다 정의 분류 모든걸 떠나서 소설을 쓰는사람 진짜 소설가라면 소설을 지금 이순간에도 쓰고 있는 사람이 소설가 아닐까요

SNS상에는 가짜뉴스라는 장르의 소설가가 넘쳐나기도... ^^;;

아이고...

금강경에도 그런 표현이 있지요. 그 이름이 소설이고 그 이름이 시일뿐이겠지요. 우리는 being 그 자체를 때로는잊고 살지요. 그러다보니까 이름붙이는게 편한가 봅니다. 그게 족쇄일지도 모르지요. 어쩜 행복한 족쇄일수도 있구요. 프라이드가 있다는 것은 어찌보면 존재 그 자체를 인정하는 것일수도 있겠습니다.

이청준의 '소문의 벽'을 일단 읽어야겠다 싶네요 ^^

꼭 읽어보시길 바랍니다.

왠지 어려울 것 같은 느낌적인 느낌...

참 근본적인 질문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시인의 경우 역시 마찬가지라 생각이 들구요.
사실, '누구나 시인'이라는 말에는 다소 오류가 있다고 생각하는 입장입니다만, 그렇다고 정체를 명확하게 지시할 수 없는 노릇이니까요.

그래도 글을 쓰고 있는 순간만, 시인이 되었다, 소설가가 되었다가 사라지는 것이 시인과 소설가를 변별할 수 있다고 말하고 싶은데, 또
그렇게 말하기에도 자존감이 쉽게 허락하지 않는 부분도 있으니 말입니다.

잘 보고 갑니다.

+) 그래서 스팀잇에서 '지워지지 않는 글'을 쓰기가 더 어렵게 느껴지네요...ㅎㅎ

어려운 문제네요. 사람마다 느끼는 단어의 무게감이 다르니 말입니다.

등단의 과정과 소설가의 자격을 논하는 문제는 문단 안에서도 논쟁의 화두가 되고 있는 것으로 압니다. 이른바 정통소설만이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할 수 있다는 현실을 비춰보았을 때, 다른 나라에선 소설의 붐을 이끌고 있는 장르소설이 온전한 소설로 대접 받지 못하는 현실을 지적하며 현 등단 제도의 문제점을 지적하기도 합니다.
인터넷의 발달로 누군가가 쓴 소설이 타인에게 읽힐 통로가 많아졌다는 시대적 변화를 수용하여 소설가의 등단과 자격을 재정립할 필요가 있어보입니다.^^

어쩌면 우리는 문학작품이 끼치는 사회적 영향을 알고 있기에 소설가나 작가의 문턱을 더욱 높이게 되는 건 아닌지 생각이 들었습니다만은 정말 구분이 모호한 것이 사실이네요 : ) 읽으면서 많은 부분에서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소설가냐 아니냐를 나누기보다 소설을 써서 돈을 버는(혹은 돈을 버는게 목적인) '프로'소설가와 '아마추어'소설가로 분류하면 되지 않을까요?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한' 소설가 라던지요.

소설가 그 자체를 논하기 보다는 수식어를 바꿈으로써 범위를 넓히는 것이 더 아름다워 보입니다. :)

그래서 쓰고 있는 이상 우리 모두는 작가다, 라는 말을 좋아합니다. :)

쵸코님의 그 댓글 아직도 기억하고 있지요 :)

이 글을 읽자마자 이청준의 소문의 벽을 검색해서 여지껏 읽다가 왔어요. 그 어떤 책 리뷰보다 사람의 흥미를 끄는 그런 글이었어요^^ 그런 글을 쓰는 분의 프라이드는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뤠잇~ 이라는 말을 더이상 쓰지 않게 된 날에 마지막으로 Great이라 외쳐봅니다.

이청준의 소문의 벽은 못 읽어봤지만, 읽다보니 쓰고 싶지 않아지는 경우도 이해 갑니다...

일단 이청준을 읽은 후에 쓸 수 있겠군요

ㅎㅎ '소문의 벽'은 없고 [당신들의 천국]이 있네요..읽어 보겠습니다.
막상 글을 쓰려고 해보니
제겐 글을 쓴다는 것 자체가 넘사벽이더군요....

이미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사람이 하는 일에는 국가 고시나
민간단체를 통한 자격증을 교부하는
소위 전문직도 있고
옛날의 도제제도처럼 장인의 수하에 들어가
잔심부름부터 시작해서 일정 수준에 도달하면
그 자격을 인정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문인들에게도 신춘문예라는 좁은 문을 통과하는
문단의 적자로 인정하는 분위기입니다.
그러나 문학 뿐 아닌 모든 예술이
그렇게 정절이 깊은 행위는 아니었는지
여기저기 서자들이 태어나 자라고
그 서자들이 두각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제가 생각하는 자격이란
얼마나 많은 시간과 노력을 기울이느냐 부터
자격이 주어진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여기에도 어느 정도의 객관성은 요구됩니다.

전짓불은 들고 있는 사람은 보이지 않은 채
원하는 형체를 드러나게 하여 상대를 제압하는
가학성을 지니고 있는 것과 유사하지 않을까요?

많은 부분 공감하며 읽었습니다.
좋은 포스팅 감사합니다.

그렇군요. 자신의 실체는 숨기고, 대상을 드러내어 자격을 심사하는게 전짓불의 가학성과 비슷하군요. 좋은 해석 감사합니다.

글 뿐 아니라 댓글에서도 깊은 사색이 느껴지셔서 감탄할 때가 많습니다.

지금 소설쓰려고 노력 하시는 분들을 소설가라고 하겠습니다 :)

만5세 바께 안되서 억울하게 죽은 관우를 도와주십시요

사실 우리가 익히 아는 예술가 중에 죽어서 인정받은 경우는 오히려 드뭅니다. 고흐나 이중섭이 워낙 강렬한 인상을 남겨서 그렇지 대개는 생존 시에도 인정받던 사람들이죠. 반대로 생전에는 어마어마한 명성을 누리다가 사후 잊힌 경우가 많습니다. 소설가로 가면 그런 경우는 더욱 적지요.
내적 기준을 벗어난다면, 대중이 그를 소설가로 인식하거나 대중은 모르더라도 관계자들이 인정하고 있을 때 소설가라는 직업을 가졌다고 하고 싶군요. 결국 직업의 정의가 중요하다고 봅니다. 사회적 관계를 떠나 직업이 성립할 수 있는가. 수렵시대의 남자들은 누구나 사냥을 했을 텐데 그들을 '주술사'와 구분짓기 위해 '사냥꾼'이라는 직업을 부여할 수 있는가. 직업이 아닌 역할이라는 더 큰 테두리로 보면 어떻게 달라질까. 그런 생각이 꼬리를 무는군요.

그러고보니 생전에 인정 받지 못한 예술가는 대중들에게 노출될 기회도 없었을 것이고, 생전에도 기회가 없었던 사람이 사후에 기회를 얻는건 쉽지 않은 일이네요. 관계자들의 인정이 중요하다고 하면 다시 또 딜레마에 빠지는데 아서 클라크, 톨킨, 롤링, 코난 도일은 한국에서 관계자들에게 소설자의 지위를 인정 받을 수 있었을까요?

각 장르의 편집자들과 기성 작가들에겐 인정받을 겁니다. 출판되느냐 아니냐는 또 다른 문제지만요.

장르 개척자는 후배들에 의해 소설가가 되는건가요.

장르 개척자는 오히려 지위가 공고할 겁니다. 어느 장르든 세상에 나왔다는 건 처음 그 가치를 알아본 편집자와 출판사가 있다는 얘기니까요. 그리고 한동안은 독보적 지위를 누리겠죠. feat. 귀여니

그책. 찜하겠어요! 이청준의 소문의 벽! 어멋! 인터넷에 전문이 조회가 되네요. 바로 읽어보겠습니다.ㅎ

말씀하시는 내용은 소설이나 시인같은 작가분들에게만 국한되는 내용은 아니겠구나...라는 생각을 하면서 지나갑니다~

이청준의 소문의 벽에 비유하신 것은 무슨뜻인가요? 이청준의 소문의 벽 정도는 되어야 진정한 소설가라고 할 수 있단 그런뜻인가요?

어렵지요 ... :D

등단을 해야만 시인이고 소설가인가. 예전에야 그럴지도 모르지만 이제는 그 벽이 낮아진 듯 합니다. 덕분에 다양한 분야와 문체의 글을 많이 읽을 수 있게 되어 재미있기도 하구요. ㅎㅎ 저도 그 중의 1인이 되고 싶네요..

적어도 신춘문예로 등단한 사람들이 그렇지않은 소설가들을 같은레벨로 보지 않는다는건 자주들은거같네요. 사실 대중소설정도만 보는 독자들끼리도 그런 종류의 컴플렉스가 있어서인지 순문학수준이 어쩌고하는 논쟁이 보이기도합니다.

솔직히 우리나라의 그 '신춘문예'가 참 좁은 길이라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렇죠... 어느 길이 다 그렇다 싶기도 하지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