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 벨레로폰의 비극 - 2

in #kr-pen7 years ago



[단편] 벨레로폰의 비극 - 2

오랜 옛날에 대홍수로 마을이 모두 물에 잠긴 일이 있었다. 마을 사람들은 모두 물에 휩쓸려가 죽거나 실종이 되었는데 노파의 조상은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노파의 조상이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던 것은 ‘맹그로브’ 나무의 부엉이가 요란스럽게 울어대서 미리 그 지역을 벗어났기 때문인데 그들은 매일 아침마다 ‘맹그로브’ 나무에 예를 갖추고 제를 올렸기 때문에 부엉이가 위험을 알려주었다고 믿고 있었다.

그들에게 ‘맹그로브’ 나무에 사는 부엉이는 나무신의 사자(死者)나 다름없었다. 그들에게 부엉이는 신성한 표상이 되었고 거대한 ‘맹그로브’ 나무는 나무신과 지상을 이어주는 가교 역할을 했다. 마을 하나를 싹 쓸어버릴 정도로 거대한 홍수의 여파가 지나갔음에도 워낙 거대했던 ‘맹그로브’ 나무는 그 위엄을 그대로 갖추고 있었다고 한다. 그 이후로도 꾸준히 ‘맹그로브’ 나무를 신주처럼 모신 노파의 조상은 자연재해나 전쟁과도 같은 위험이 있을 적마다 ‘맹그로브’ 나무위에서 시끄럽게 울어대는 부엉이 덕분에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고, 조상 대대로 ‘맹그로브’ 나무를 소중하게 모셔왔다고 했다.

무엇보다 노파는 ‘맹그로브’ 나무에 나무신의 정기를 받은 여자가 잉태한 나무도령의 한이 맺혀 있다는 괴기한 믿음을 맹신하고 있었다. 나무도령을 잉태한 여자가 인간남자와 눈이 맞아 머나먼 세상으로 도망가자 슬픔이 너무 컸던 나무도령의 눈물이 세상을 가득 채워 거대한 홍수를 만들었고, 나무도령이 자신의 눈물이 만든 거센 홍수의 물결에 잠기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거대한 ‘맹그로브’ 나무 때문이었다. 노파의 말대로라면 그녀 조상의 시초는 나무도령일지도 모른다.

사실, 허무맹랑한 이야기가 아니더라도 ‘맹그로브’ 나무는 그 존재 자체로 매우 신비롭다. ‘맹그로브’ 나무는 맑은 민물과 바닷물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생존하는데 바닥이 질펀한 갯벌로 이루어져 있고 소금기 많은 바닷물이 드나들기 때문에 보통 식물들이 생존하기 매우 어려운 환경에서 자란다. 게다가 땅 위로 드러낸 호흡뿌리라던가, 식물 가운데 유일하게 새끼를 낳는 태생식물이라는 점도 놀라운 점이다.

어쨌거나 이 신비로운 나무에서 떨어진 굵은 가지나 죽은 나무에 그들의 신성한 표상인 부엉이를 새긴 물건은 매우 신비로운 효험을 지닌다고 노파는 굳게 믿고 있었다.

주인의 말대로라면 목각부엉이를 바라보고 가부좌를 틀고 앉아서 숨을 모으고 집중해서 주인이 알려준 주문을 일백 번 암송하고 잠을 자면, 꿈을 꾸는 동안 내가 원하는 시공간을 들여다볼 수 있는 능력이 생기고, 내가 꾸고 싶은 꿈을 꿀 수 있다. 그리고 나는 꿈속에서 내가 꿈꾸고 있다는 사실을 의식할 수 있는 자각능력을 얻는다.

그러나 나는 저 물건을 내 방에 들여놓기는 했어도 그냥 관상용일 뿐이지 단 한 번도 그따위 사이비 종교 교리 같은 시도를 한 적은 없다.

“쩝, 쩝, 에이 쉬.”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욕설이 섞인 한숨을 길게 내쉰 후 옷걸이에 걸린 점퍼를 걸치고 집을 나섰다. 거리는 아직 조용하다. 나는 버스정류장에 들러 혹시 걸인 악사와 이국적인 소녀가 나와 있을까 싶어 정류장 주변을 서성거려보았다. 하지만 그들이 늘 있던 자리는 텅 비어 있었다. 하기야 사람이 하나도 없는 이른 시간부터 나와 장사를 할 바보는 없는 법이다.

오전부터 날씨가 흐리더니 비가 추적추적 내리기 시작했다. 나는 소나기가 쏟아질 것을 우려해 근처 편의점에 들러 소주 한 병과 먹을거리를 사 들고 집으로 마구 뛰었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가을비였다. 버스정류장을 지나치는 길에 행여나 걸인 악사와 이국적인 소녀가 그 사이에 나와 있진 않을까 싶어 눈으로 대강 훑어보았지만, 여전히 그 자리는 텅 비어 있었다. 애써 그들의 흔적을 찾으려는 나의 행위가 우스워 나는 홀로 쓴웃음을 지었다.

다시 텅 빈 방안으로 들어와 먹을거리를 대강 바닥에 던져두고 침대에 몸을 던졌다. 사실 오늘처럼 날씨가 흐린 날에는 집안에서 축 늘어져 있는 게 최고다. 그때였다. 아침부터 마음이 어수선하게 요동치더니 바지 왼쪽 주머니 안에 있던 휴대전화가 내 몸을 정신없이 흔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발신번호는 회사였다. 부장님의 긴급소집이거나 회사의 어떤 급한 일이 틀림없다. 그게 아니라면…….

‘과장님, 인사 관리부의 박 부장님이 어제 저녁에 지병으로 병원에 입원하셨답니다. 오늘 오전 중으로 병문안을 갈 참인데, 혹시 시간이 가능하신지요?’

전화의 내용은 예상 밖이었다. 아니다. 어쩌면 전화의 진동이 울릴 때부터 불길한 느낌을 받았으니 어느 정도 예상은 했던 걸지도 모른다. 나는 곧장 양복으로 갈아입고 차를 몰아 박 부장이 입원한 병원으로 향했다.

박 부장은 코를 골며 곤히 잠들어 있었다. 간호사의 말에 따르면 어젯밤까지는 의식이 없었다가 오늘 새벽에 다시 의식이 돌아온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그는 도통 어젯밤까지 사경을 헤매고 다닌 사람이라고는 도무지 믿어지지 않을 만큼 씩씩하게 코를 골아대고 있었다. 그의 코 고는 소리에 맞춰 병실 천장이 들썩거렸다.

병실은 지독할 만큼 고요했다. 그의 병실을 지키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오직 회사직원들만이 의례적으로 들락날락 거릴 뿐, 아내도, 자식들도 없었다. 그도 기러기였던 것이다. 오로지 병실에 놓인 난초만이 쓸쓸한 한숨을 내뿜고 있었다. 어두운 숲의 부엉이 울음소리가 이곳까지 들리는 듯했다. 나는 과일바구니를 그의 머리맡에 조심스레 올려두고 병실을 빠져나왔다. 괜스레 우울한 기분이 들어서였다. 아니, 그보다, 갑자기 병실에서 울려 퍼지는 부엉이의 울음소리가 나의 귀를 파고들어가 괴롭혔기 때문이다.

병실을 빠져나왔지만 부엉이의 울음소리는 한동안 계속해서 나를 괴롭혔다. 도시에 사는 사람 중에 부엉이의 울음소리를 들어본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그런데도 내 귓전에 울리는 소리가 부엉이의 울음이라고 판단할 수 있었던 것은 내면에서 직감하는 그 어떤, 강렬한 느낌 때문이었다. 부어-부어-거리며 밤을 지새우며 고독하게 울어대는 짐승의 고뇌, 그것이 부엉이의 울음이었다.

나는 병원을 빠져나와 병실로 들어가는 직원들과 인사를 나누고 집으로 가는 길에 참새가 방앗간을 그냥 못 지나치듯이 포차에 들러 소주로 속을 뜨끈하게 채웠다. 박 부장은 나와 입사시기가 거의 비슷해서 오래전부터 나와 친분을 유지한 사이다. 그는 축 늘어진 목살만큼이나 낙천적이고 유쾌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나보다 조금은 늦게 기러기 생활도 시작해서 자주 술잔을 기울이고 고민도 털어놓곤 했었다. 그런 그가 고혈압이 있었을 줄이야. 우리는 모든 걸 털어놓을 만큼 친분이 두터운 사이라고 생각했건만 그는 나에게 자신의 건강을 숨기고 있었다.

낙천적인 가면 속에 차오르는 내면의 화를 감추고 언제나 괜찮다고만 했다. 동기보다 진급이 늦어도 괜찮다, 가족이 머나먼 타지로 떠나가도 괜찮다, 괜찮다, 괜찮다……아아, 그는 너무도 미련한 사람이었음이 분명하다. 그의 병실은 너무나도 고요했고 그 모습을 지켜보는 내 가슴은 왠지 모르게 슬퍼지고 뜨거운 눈물로 발현되었다.

포차에서 일어서는데 내 귓가에 또 부엉이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택시를 잡았다. 처음에는 내가 거주하는 원룸을 목적지라고 외쳤다가 불현듯 버스터미널로 목적지를 바꾸었다. 나도 모르게 버스터미널로 향하고 싶다는 강렬한 열망이 솟아오른 것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버스터미널에는 내가 그토록 보고 싶어 했던 머리가 벗겨진 걸인 악사와 이국적인 소녀가 늘 있던 곳에 서서 연주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주변에는 사람들이 빙 둘러싸고 있었다.

나는 그들을 발견한 기쁨을 주체하지 못하고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그곳으로 뛰어갔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