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05.09
Saint-Jean-Pied-de-Port ○---● Roncesvalles (27km)
흐림, 맑음, 비, 비바람(폭풍우), 흐림
고단했던 피레네 산길
가파른 경사길이 시작되고, 몇 걸음 걷다 멈추다를 반복했다.
이미 무거워질대로 무거워진 몸을 이끌고 걸었지만 굵은 빗줄기가 점점 재앙수준으로 변해가자 한발 한발 내딛는 것 자체가 힘들어졌다.
펄럭이는 우의와 그 사이 빼꼼히 내놓은 얼굴은 몰아치는 그대로 맞아 물에 빠진 생쥐 꼴이었다.
쌓인 눈과 하얗게 몰아치는 빗줄기.
너무나도 힘들었고 그 자리에 주저 앉고 싶었다. 눈물이 날 것 같았다.
하지만 돌아갈 수도, 멈출 수도 없기에
앞으로 걸어갈 수 밖에 없었다.
종교를 믿는 것의 가장 큰 장점은 극한의 상황에서 심적으로 의지할 곳이 있다는 점이다.
삶이 행복하고 편할 때에는 감사하기보단 그 삶에 취해 잊어버리곤 하지만,
그래도 내가 너무나도 힘들어 포기하고싶을 때, 앞길이 보이지 않을 때면 큰 힘이 되어 준다.
바쁘다면서 한동안 못했던 기도 여기서 다 했던 것 같다.
걸음마다 기도했다.
무섭고 두려웠던 그 길 위에서 아는 성가 모르는 성가 다 동원해서 불렀고, 주저앉지 않고 여길 꼭 넘어가야 한다는 생각 하나만으로 꾸역꾸역 걸어갔다.
정말 인간다움이라고는 눈꼽만치도 없는 길
8km 정도 남았을 때가 고비였다.
어떤 표지판을 보고 드디어 론세스바예스에 도착했나 싶었는데 중간 쉼터
였다.
기대했는데 실망했다. 사실 낚인 것 같아서 짜증도 났다 ㅋㅋㅋ
작은 쉼터 안은 비바람을 피해 잠시 쉬어가는 순례자들로 가득했다.
여기서 쉬는 것 보다는 빨리 내려가야겠다는 생각 뿐이었다.
다행히 끝나지 않을 것 같았던 오르막이 끝나고 산을 내려가는 길이 시작되었다.
문제는 올라온 길 보다 훨씬 더 경사졌고, 비에 젖은 탓에 미끄러웠다.
드디어 잘 닦인 길이 나왔다.
이 날씨에 학교에서 단체로 수학여행을 온 듯한 학생들이 깔깔거리며 빗속을 헤치고 그쪽으로 걸어갔다.
반면 그 옆에는 도저히 길이 아닌 것 같은, 누워야 할 것 같은 흙더미 경사가 있었다.
"설마 저게 길은 아니겠지."
설마가 사람 잡았다.
내려가는 길은 인간다운 저 길이었으면 했다.
하지만 그쪽으로 향하던 찰나 다들 그 길이 아니라며 옆 길을 가리킨다.
피레네의 순례길은 인간답지 못했다.
세상 살면서 온 몸에 이렇게 힘을 주고 버텼던 적이 있을까.
빗물에 미끄러지지 않기 위해 내 딛는 모든 걸음마다 긴장을 담았다.
젖은 발은 등산화 속에서 앞으로 쏠려왔고, 몇 걸음 걷다가 뒤로 툭툭 쳐서 발을 뒤로 보내주어야 했다.
다행히 내리막은 혼자가 아니었다. 저 앞에 가는 아저씨와 H가 있기에 여기서 데굴데굴 구르더라도 누군가는 구조대를 불러줄 수 있을 것이라고 위로하며 한발 한발 앞으로 나아갔다.
우리는 서로를 쳐다보거나 뒤를 돌아보거나 말을 하지 않았다.
모두가 여기를 무사히 빠져나가야 한다는 생각 뿐...
스틱을 짚고 발을 디디고 또 스틱을 짚고 발을 디디고
두시간 가량을 그렇게 아무 말 없이 내려갔다.
론세스바예스 RONCESVALLES
산을 내려오자 비가 그쳤다. 장난하나...
관광버스를 타고 온 사람들이 무리지어 내려 입구로 들어갔다.
지랄맞은 피레네
를 건너뛰고 론세스바예스부터 시작하는 사람들인 것 같았다.
비는 거의 그쳤지만 약하게 빗방울을 보며 그 사람들은 우비를 입더라. 버스에서 숙소까지 가는데 우비라니, 얄밉다.
론세스바예스 알베르게는 옛 수도원을 개조한 건물로 그 규모가 상당히 크다.
덕분에 도착했을 때 입구를 찾지 못해서 관광 안내 센터에 들러 물어봐야 했다.
알베르게 마당으로 들어서자 자원봉사자들이 맞아주었다.
신발과 가방을 로비에 벗어두고 사무실로 들어가니 먼저 도착한 H가 접수를 기다리고 있었다. 카운터 옆에 비치되어있는 신상정보 기록카드(?)에 이름, 국적, 까미노에 온 목적 등등을 적고 여권과 끄레덴샬을 접수원에게 제시했다.
2층이 내 침대
벽에 보니 순례자 메뉴 예약이 가능해서 숙박비랑 순례자메뉴 비용까지 한꺼번에 결제했다.
종일 고생했으니 순례자메뉴 통크게 결제!
배정된 곳은 신식 숙소였다.
론세스바예스는 구식 숙소와 신식숙소로 나뉘는데 신식은 훨씬 더 시설이 좋아서 내심 여기 배정받길 바랬다.
도착할때까지만 해도 너무 늦게 와서 구식이라도 잘 곳만 있으면 다행이다 싶었는데 봉잡았다.
더구나 내 침대는 2층이기는 하지만 샤워실/화장실 옆 쪽이라 수시로 화장실을 드나드는 나에게는 베스트였다.
사물함에 가방을 넣고, 침낭과 옷가지, 샤워용품들을 꺼내 샤워실로 갔다.
세면대, 화장실과 샤워실이 함께 있는 구조였는데, 칸막이로 샤워 부스가 나뉘어있었다.
차례를 기다렸다가 샤워실로 입장했다.
속옷까지 홀딱 젖어있었고, 긴장이 풀린 탓인지 온 몸이 물 먹은 솜 마냥 무거웠다.
입고있던 옷을 모두 벗어버리고 따뜻한 물에 몸을 맡겼다.
정말 갓 끓인 라면 한 그릇 먹고 따뜻한 전기 장판에 누워 자고싶을 정도로 육체적, 정신적으로 피로가 컸다.
내 자리로 돌아가 젖은 우비를 침대 모서리에 걸치고
탈수 맡겼던 옷가지들을 휙휙 창가에 널어버렸다.
"오셨네요. 고생하셨어요!"
생장에서 만났던 한국인 남자애들이 지나가다 나를 발견하고는 반갑게 인사했다.
나보다 두시간정도 일찍 도착했다고 한다.
전역하자마자 친구끼리 같이 순례길을 왔다고 하는 그들, 역시 젊은게 최고다.
"J언니가 아직 안왔어요."
순례오기 전에 참고했던 한 블로그에서는 피레네를 11시간동안 넘는 바람에 숙소에 자리가 없을 뻔 했다는 글이 있었다.
J가 혹시라도 너무 늦게 도착해서 자리가 없으면 어쩌나 걱정되었다.
나를 제외한 두 친구는 유심이 없었기 때문에 어디쯤 오는지, 연락할 방도가 없었다.
사실 연락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이런 지랄맞은 날씨 속에서 답을 할 수 도 없기에 그냥 기다려야 했다.
다행히 J는 우리보다 한시간쯤 뒤에 알베르게에 도착했고, 지하 숙소에 배정받았다고 한다.
론세스바예스 알베르게
이미지 출처 : http://www.alberguederoncesvalles.com/contenidos.php?idG=1
옛 수도원을 개조한 론세스바예스 알베르게는 지상 3층까지, 지하 1층까지 모두 숙소일 정도로 상당히 규모가 컸고 깔끔했다. 순례를 하는 동안 머물렀던 알베르게 중 규모면에서나 시설면에서나 탑_이었다. 생장에서 머물렀던 숙소에는 비할 것도 없었다.
1층과 지하에는 넓은 식당과 자판기들, 세탁실과 휴게실 등이 있었는데 그 중에서도 와이파이가 되는 유일한 장소인 식당에는 순례자들로 가득 차 있었다.
어슬렁 거리면서 숙소를 구경하는데 누가 나를 불렀다.
"한국인이시죠?"
나는 딱 봐도 한국인처럼 생겼나보다.
직장을 그만두고 온 나와는 달리 휴가동안 까미노를 걷기 위해 여기까지 왔다고 한다. 너무 늦게 도착하는 바람에 구식 숙소를 배정받았다고 한 그녀.
휴가가 보름 정도 되는 터라 부르고스까지 갈 수 있을지 모르겠다는 그녀를 보며 내가 만약 그 정도로 긴 휴가를 쓸 수 있었다면 과연 회사를 때려치고 왔을까
하는 생각이 잠시 들었다.
그녀와 헤어진 뒤 신발장으로 가서 벗어둔 등산화에 신문지들을 가득 채워 넣었다. 진흙으로 하루만에 만신창이가 되어버린 나의 불쌍한 등산화를 내일 그나마 나은 상태로 신을 수 있도록 흙도 좀 털어주고 신문지로 감싸두었다.
H그리고 J와 함께 식당에서 오늘의 버라이어티한 하루에 대해서 이야기 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도데체 여길 왜 왔는지 한탄하며 인생에서 피레네는 단 한번으로 충분
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Albergue de Roncesvalles - Orreaga
Roncesvalles
https://goo.gl/maps/pNcqp8bbPVH2
순례자 메뉴
저녁 먹기도 힘들다는 J와 H는 알베르게에서 쉬기로 하고 나는 미리 신청한 순례자 메뉴를 먹기 위해서 안내된 레스토랑으로 이동했다. 다시 비가 추적추적 내리기 시작했기에 보송보송한 옷이 젖게되어 짜증이 났다.
숙소에서 좀 떨어진 레스토랑에 도착했다.
테이블에는 빵과 포도주, 그리고 물이 세팅되어 있었고 식당 직원은 식권을 내는 사람들을 하나 둘씩 입장시켰다. 외국의 식사 분위기가 생소하기도 하고 민망해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순례자들로 가득 찬 식당은 동양인은 비아리츠에서 만난 중년 부부와 나 뿐이었다. 그 분들은 나와는 멀리 떨어져 있었길래 아는척 할 수도 없었고, 자리 이동을 하기도 눈치보여서 가만히 앉아있었다.
오른쪽에 앉은 여자들에게 용기내어 말을 걸었다.
스코틀랜드 출신의 데비와 캐롤라인.
가톨릭 신자인 그들은 서로 오랜 친구였는데 혼자 오는 것보다 둘이 오는 것이 더 좋을 것 같아서 함께 왔다고 한다.
내가 혼자 여기까지 왔다는 것을 듣고는 브레이브한 걸이라며 감탄했다.
오늘 넘은 피레네를 두고 데비는 이렇게 말했다.
"헬Hell을 넘었는데 또 헬Hell이 나와... 이건 진짜 미친 것 같아"
격하게 공감했다.
기다리던 음식이 나왔다.
녹색 스프는 양파 맛이 나는 이상한 맛이었다.
메인 메뉴는 닭다리와 프렌치 프라이었는데 닭이 덜익었다. 분위기를 보고 기대했는데 별로였다.
여긴 치킨을 먹을 줄 모르나?
이런 식사 분위기가 생소한 나는 데비와 캐롤라인에게 이렇게 먹는 것이 맞냐고 물어보자 그들은 잘 하고 있다고 칭찬해주었다.
언니들 넘 맘에든다.
왼편에 있는 미시간에서 온 아저씨와 잠시 이야기를 나누었다.
자기 지역의 카톨릭 미니스트리에서 수감자들의 교화를 위해 일한다고 하는 이 아저씨 또한 역시 피레네 넘은 이야기를 하면서 날씨가 거지같았다고 욕했다.
"우비에 한쪽 팔을 끼워넣은 순간에, 바람이 불어서 휙 날아가버렸어. 너울너울 날아가는 내 우비를 보면서 제발 꿈이길 바랬지"
이 아저씨는 애써 꺼낸 우비가 바람에 날아가버려서 바람막이만 입은 채로 산을 내려왔다고 하니 정말 욕할 만 했다.
한식 중에서도 불고기를 제일 좋아한다던 미시간 아저씨는 저녁 8시에 있는 순례자 미사를 가기 위해 여덟시가 되자 자리를 떠났다.
기본 세팅 와인과 물
뭣이 중헌디
론세스바예스 알베르게 1층 복도에는 순례자들이 기부(?)한 물건들_이 놓여 있다.
사실 기부라기보다는 버린 것에 가까운 물건들...
손가방부터 시작해서, 모자, 셀카봉 등등 없는 것이 없다.
심지어 청바지까지 있으니, 이 모든 것을 짊어지고 피레네를 넘은 뒤에 과감히 배낭에서 빼버린 것들이다.
길 떠나기 전에는 필요할 것이라고 여겼던 것들이 오히려 나를 더 힘들게 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진실로 나에게 필요한 것들이 무엇인지 돌아볼 수 있게 되는 것 같다.
첫날부터 피레네를 넘는 것은 정말 지옥같았고 쓰디쓴 경험이었지만
지금부터 순례자로써 마음을 굳게 먹기에 가장 적합하지 않나 싶다.
내일은 나도 짐을 다 지고 가야 한다.
빨리 팜플로냐에 도착해서 필요없는 짐들을 다 보내버리고 싶다.
알베르게 : 14유로
순례자메뉴 (전식, 본식, 후식) : 10유로
탈수 (도네이션): 0.5유로
자판기 요거트 : 0.7유로
날씨가 미쳐 날뛰기 전 피레네
혼자 떠난 마시의 산티아고 순례길
0. 나는 왜 걸었을까
1.산티아고 순례길 D-1 바욘역에서 기차를 타고 생장으로
2.산티아고 순례길 D-1 까미노 출발지, 생장피드포르에서 순례자 등록까지
(jjangjjangman 태그 사용시 댓글을 남깁니다.)
호출에 감사드립니다! 즐거운 스티밋하세요!
어머나!! 저도 3개월만에 다시 순례길 이야기를 쓰고 올릴까 말까하는 중인데 마시님도 다시 쓰시는군요!! 아 갑자기 길에서 순례자 만난 느낌 ㅜㅜ 피레네 저는 바람이 하도 세서 사람들 넘어지고 난리도 아니었어요 (저도 똥밭에 주저앉음..) 론센바예스에서 드신 식사도 제가 먹은 거랑 어쩜 저렇게 똑같나요... 반가운 마음에 주절대고 갑니다.. 부엔 까미노 :)
똥밭이라니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ㅠㅠㅠ 정말 피레네는 인생에 한번이면 충분하죠 ㅋㅋㅋㅋ
그래도 문득문득 그리운게 다시 가고싶어요~ 아마 그때도 피레네 다시 넘을듯 합니다.
반가워요!! 부엔카미노~!
마시님 덕분에 저도 "아 몰랑" 하고 올렸어요 ㅋㅋㅋ 고마워요!! 스팀잇에서도 꼭 산티아고까지 도착할 수 있길!! :)
우와 잘하셨어요!!! 우리 산티아고 꼭 입성해요 >_<
산티아고 동지들이 하나둘 모여들기 시작하네요.^^
확실히 스팀잇이 정체일 때, 한달간 산티아고를 걸을 수 있는 인내력 있는 사람들이 살아남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ㅋㅋ
정체된 피드를 우리 산티아고 순례자들이 묵묵히 걸어가자구요.
오랫만에 멋진 대문으로 돌아오신 거 격하게 환영합니다.^^
반겨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800km 언제 다 걷나 싶다가도 하루 이틀 꾸준히 가다보면 어느 새 산티아고죠 :)
스팀잇에서 같이 걸어요! 언제 한번 스팀잇 순례자 모임도 하면 좋겠네요>_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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