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보니

in #kr6 years ago

스팀잇에 들어오는 것이 몹시 두려웠다. 공백이 길어질수록 더 그랬다. 그간 머릿속으로 여러 번 글을 쓰고 지웠다. 그게 글로 이어지진 않았다. 어쩌다 보니(이 말을 써도 될진 모르겠지만) 두려워하던 일이 일어났다.

오늘은 집에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계속 머릿속으로 글을 썼다. 그리고 사라지지 않게 집에 도착하자마자 스팀잇을 열었다. 나름 큰 용기가 필요했지만, 막상 이 글을 올리고 나면 스스로 왜 그렇게까지 두려워했는지 우스워질 것 같다.


그토록 바라던 휴식을 맞아 이 주간 원 없이 놀고먹었다. 그러면서도 돈은 벌었다. 주에 3~4일은 놀고, 3~4일은 일했다.

그렇게 놀고먹는 동안, 평생 이렇게 살고 싶다는, 또 이대로 죽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행복했다. 이렇게 살기 위해 일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이렇게 사는 데엔 딱히 필요한 것이 없다는 것도 함께 알게 됐다.

이번 주는 내내 슬펐다. 행복한 시절은 금세 지나갔고, 지나고 보니 죽어도 좋겠다던 행복의 날들이 너무나도 보잘것없게 느껴졌다. 평생을 저렇게 살면 정말 행복할까?


사람들과 밀린 약속을 잡고, 남는 시간엔 책을 읽었다. 그리고 오래 누워있었다. 입버릇처럼 말하던 '아무것도 하지 않고 책만 읽는 삶'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자주 시간을 내 책을 읽었다.


내가 고등학생일 때, 마흔 살이 되면 음악으로 성공해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 유명세를 빌어 사진전도 열고, 책을 내겠다는 영악한 생각을 했었다.

늘 가지고 다니는 작은 노트에 떠오르는 생각을 소설의 한 구절로 정리해두기 시작했다. 처음 있는 일이었다. 아직 마흔은 안 됐지만, 음악으로 성공하긴 그른 것 같으니 태세 전환을 하는 걸까? 요즘은 굳이 음악이 아니어도 어느 정도의 삶만 영위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늘 그 '어느 정도'가 문제지만)

음악을 하고 싶어 곡을 써보았는데, 생각보다 신통치 않아 작가로 다시 도전해보려는 것이다.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새 앨범을 위한 곡을 모으고 있다. 요즘은 내가 무슨 생각으로 사는지 나도 잘 모르겠다. 모든 게 생각대로 안 되더라도, 살아질 구멍은 있겠지.


또, 음악을 많이 들었다. 오래 미루던 VPN 우회로 유튜브 프리미엄을 결제했다. 그러면서 구글 뮤직도 함께 사용하게 되었다. 이미 만들어진 리스트, 또 내가 만든 리스트를 번갈아 가면서 들었다. 가장 많이 들었던 것은 'Red Hot Chili Peppers 라디오'였다. 신기하게도 싫은 곡이 하나도 없었다.

오늘은 집에 오는 버스 안에서 '클래식을 연주한 재즈'를 들었다. 호기심을 갖고 플레이리스트에 있는 곡들을 조금씩 들어보았지만 마음에 드는 게 없었다. 그나마 조금 좋았던 것은 짐노페디를 연주한 곡이었는데, 멜로디를 연주하는 악기가 어딘가 아쉬웠다. 그래서 다른 버전을 찾아봤는데도, 죄다 관악기였다. 결국엔 포기하고 키스 자렛의 바흐 연주를 반복해 들었다.


또 이 곡을 많이 들었다. 정말 많이 들었다. 단순히 이 스탠다드 곡이 듣고 싶어 여러 버전을 찾아 들었는데, 이 연주가 가장 좋았다. 쌀쌀한 날씨와 잘 어울리는 따뜻하고 간질간질한 연주. 덩달아 아련해지는 기분.


지금은 어쩌다 보니(어쩌다 보니 이 말을 두 번이나 쓰게 되었지만) 우울의 시기가 찾아왔다. 이 글을 쓰게 된 것도 외롭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내일은 또 누군가를 만난다. 누군가를 어디에서 만나 이야기하고, 가끔은 눈을 맞추기도 하고, 목적 모를 의욕을 얻기도 할 테고, 돌아와선 지쳐서 그대로 누워버리겠지. 그럼 오래 눈을 감았다가 다시 음악을 틀고, 읽던 책을 집어 들고, 집안 곳곳을 따듯하게 만들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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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내세요!

행복한 시간은 너무 빨리 지나가고 힘든 시간은 너무 늦게 지나가죠.
그게 사람 살이 같습니다.

고딩이 40살 성공을 그리다니
너무 현실적인거 아닙니꽈? ㅋ

나루양이 궁금했는데 파다다닥 오셔서 울트라 방가rain!

외로움은 당연한거에요. 내맘 100%알아주는 생명체는 나뿐이니까요. 인정하면 들 외로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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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졸라외롭다

나루님 오랜만이에요. 다시 오시니 반갑네요. ㅎㅎ 저의 일상도 어쩌다보니 이렇게 저렇게 흘러가는 하루하루가 아닌가 싶네요.

아, 참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그놈의 외로움과 무기력과 우울의 시기.. 저는 10월에 심했고 지금은 한 풀 지나간 느낌이네요.

그렇지않아도 최근에 안보이셔서 나루님 글을 놓친게있나 어제 확인하러 왔었는데 ㅋㅋ 제마음이 전해졌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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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나 잘하세요.

ㅋㅋㅋㅋㅋ 그래도 난 1주일! ㅋㅋ
1주일동안 틈틈히 쓰면서 저장중인데 3줄 ㅎㅎ

공백이 있어서 두려우셨다니. 저도 여기에 두려움을 가득 담은 댓글을..ㅎㅎ
저도 요즘 왠지 모르게 가라앉아서 허우적대고 있네요. 생각해보면 겨울이나 연말마다 그랬던 것 같기도 하고요..
너무 오랜만이라, 정말 안부를 전하게 되네요. 이미 위 글에서 어떤 하루를 보내시는지 읽었지만. 잘 지내시냐고 묻고 싶네요. 오늘 조금 더 따뜻한 하루 보낼 수 있기를요.

오랫만이에요 나루님^^
우울의시기가 빨리 가고 다시 행복한 시기가 오셨으면 좋겠네요^^

가끔씩이라도 글 써주세요~~ 힘내시구요 ^^
이제 정말 겨울이네요.. 따뜻한 사람들 많이 만나시길 바래요

습관이 무서워요. 저도 글은 쓰지만 피드 잘 안 보게 되니까 이제야 봤네요. 찬찬히 자주 돌아오시는 쪽으로...ㅎㅎ